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세간의 말을 언급하며, 임청각과 석주 이상룡을 예로 들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가 친일청산과 나라 바로세우기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발언이라 생각한다.
말 나온 김에 언론에 나오지 않은 석주 이상룡와 그의 가문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그리고 추미애 대표가 말한 민주당 이용득 의원과 석주 이상룡 선생의 관계, 탤런트 이서진과 이상룡과의 관계의 사실 여부도 정리해 보겠다.
* (쓰고나서 보니 예상보다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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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비중있는 사람이다.
그는 1858년 조선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 강점기를 살다 1932년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죽었다.
의병활동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상룡은 구한말 의병활동도 했다.(두 번이나... 모두 실패했다. 좌절...)
첫번째 의병 참여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이었다.
권세연 등이 부대를 결성해 경상도 지역에 연합작전을 전개하는데 참여했다.
당시 이상룡은 할아버지 상중이었는데, 그때의 안동의 유교적 분위기로는 상중에 현실참여하는 건 부도덕한 걸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이상룡에게 조부는 각별했다.
그래서 이상룡은 겉으로는 안 한다고 하고선 은밀히 의병을 도왔다. (그의 문집 등에 흔적이 남아 있다.) 군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상룡은 군자금 모금과 함께 작전장교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다.
권세연이 이끌던 안동의 을미의병은 안동부를 장악하는 등 성과도 있었지만 결국 친일정부와 일본군에 패배했다. 안동의 의병대장 권세연은 이상룡의 외삼촌이다.
이상룡의 두번째 의병참여는 을사늑약 체결 직후였다.
을미의병 때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거금을 들여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세우고 병사를 모집하는 등 전투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하지만 기지 위치가 일본군의 첩보망에 걸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전투를 하기도 전 탈탈 털려버렸다.(또 한번의 좌절) 이 사건으로 인해 이상룡은 일본경찰에 끌려가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어쨌든 언론에서 말하지 않은 진실 중 하나는 이상룡이 구한말 의병활동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연결고리가 되는 인물이란 점이다.
'전투형 선비' 이상룡의 정체성은 이때 완성됐다고 보면 된다.
계몽운동
1907년 이상룡은 안동에 협동합교를 세우고 근대식 교육을 시작한다.
유명한 계몽운동가이자 '대동사'의 저자 유인식과, 만주 독립운동의 큰 기둥, 김동삼도 함께였다. (김동삼의 행적에는 이상룡과 그 후손들이 나오고 이상룡과 후손들의 행적에도 김동삼이 늘 등장한다.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지관계.)
이상룡은 중국 근대 사상가 양계초(량치차오)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협동학교 교재 중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 있었다. 교재는 이상룡이 선정했다. (음빙실문집은 분량이 방대하다. 학생들은 공부하다 토했을 것. 교재가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었는데...)
보수적인 유교사회에서 협동학교는 난관이 많았다. 일례로 보수 유림 일부가 학생에게 단발을 시킨다고 반발해 협동학교 교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계에선 이런 보수 유림과 대비해 이상룡, 김동삼 등을 혁신유림이라고 부른다.)
장성한 아들 이준형은 협동학교의 교사였고, 어린 조카 이운형은 1기 졸업생이다.
잠시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을 얘기하자면, 그도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이준형은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에 큰 역할을 했고. 교육자이자 행정가, 그리고 독립자금 조달책이었다. 이상룡이 일찍 결혼한 덕에 부자간의 나이 차이는 열 여덟 살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 평생 동지적 관계로 살았다고 봐야 한다.
최초 서간도 기지 개척 때, 이상룡은 유일한 자식인 이준형에게 가장 위험한 척후를 맡겼다. 척후로 나섰던 이준형이 일본군에 막혀 되돌아오자 다른 길을 찾아오라며 다시 보냈다. (불쌍한 이준형..)
독립자금 조달을 위해 99칸 임청각을 팔아버린 장본인이 이준형이다. (물론 이상룡의 지시가 있었다.) 그 일로 임청각은 주인없는 집이 되어 오늘날까지 등기문제 조차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임시정부 수반의 생가가 이 모양이라니...)
(박정희 생가를 꾸며놓은 것과 대비된다. 다까기 마사오라고도 불리는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가 되어 만주 독립군을 잡으러 다녔다.)
이준형은 이상룡 사후, 귀국했다가 일제치하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협동학교 얘기가 나온 김에 1회 졸업생이자 이상룡의 조카 이운형 얘기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
이운형은 큰아버지 이상룡을 따라 20살에 만주로 갔고 이청천, 김동삼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서로군정서 비밀특파원으로 국내와 만주를 오가며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했다.(영화 '밀정'에 나오면 딱 어울릴 캐릭터.)
이운형의 아버지, 즉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 얘기도 해야겠다.
이상룡은 만주로 떠날 때 동생 이상동에게 종가인 임청각을 지키라고 부탁했다. 그 말은 "싸우는 건 내가 할 테니, 넌 집을 지켜라"란 의미였다. 하지만 이상동은 3.1운동 때 안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투옥돼 버렸다. (그는 안동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을 한 사람이다.)
.... 더 하면 너무 길어지니 다시 이상룡 얘기로 돌아가자.
만주의 자치정부 수립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더 이상 국내에서의 계몽운동만으론 사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 이상룡은 만주 망명을 결심한다.
한겨울. 교통편도 제대로 없는 시절, 임신한 아녀자와 아이들까지 이끌고 만주 통화현까지 간다. 그곳에서 이회영 일가와 조우해 독립운동 기지를 설립한다.
망명 군사정부 수립은 신민회에서 아이디어를 냈고, 이상룡, 이동녕, 이회영 등이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치밀하게 계획, 실행된 것.
이 대규모 망명에는 이상룡 일가와 이회영 일가 뿐 아니라 의병장 왕산 허위 집안, 백하 김대락의 의성 김씨 집안, 흥해 배씨 문중 등 안동의 유력 가문이 대거 참여했다. 안동의 마을 하나가 하루아침에 텅 비어버릴 정도였다.(일제가 방해할까봐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이상룡 집안은 대대로 수백 명 노비가 있었는데, 그 즈음 모두 해방시켰다.(이회영 일가도 마찬가지. 사전 교감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지금은 보수성향이 강한 안동이지만, 당시 안동에는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혁신유림들이 많았다. 한국의 노비해방운동의 최초 발생지도 안동이다. 혁신 유림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던 일. 안동은 보수 성향으로 변했지만, 1960년 초반까지만 해도 가장 진보적 성향의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단위면적당 독립운동가 숫자가 가장 높은 도시이기도 하다.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굽히진 않겠다'란 꼿꼿한 선비정신이 살아있었다.)
만주 서간도 통화현에 자리잡은 한인 이주단은 경학사란 자치조직을 만들었다. 초대 사장은 이상룡.
경학사는 후일 부민단,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정의부로 이어지는 군사조직을 갖춘 자치정부로 자체 치안, 교육, 행정이 이루어졌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우리나라엔 이미 망명정부가 있었던 셈이다.
일제의 만주국 수립으로 와해될 때까지 이상룡은 그곳의 실질적, 정신적 지도자였다.
사족이지만, 세계 농업사에도 이상룡은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절 북위 40도 이북에선 벼농사가 안 된다는 게 거의 정설이었는데, 이상룡이 만주에서 "일단 해 보면 되지 않을까?"하고 시도했다가 덜컥 성공해버린 것.(물론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오늘날 위도가 높은 유럽에서도 벼농사가 이루어지는데, 그 시작이 이상룡의 경학사다.(사실 이 업적은 어쩌다 얻어 걸린 것이니 넘어가자.)
이상룡의 업적 중 진짜 빠뜨리면 안 되는 게,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이 곧 대한민국 건국이 되도록 만든 데에도 공이 크다는 점이다.
3.1운동 직후 수립된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 하나가 아니었다. 한성정부 등 최소 5개 이상의 임시정부가 국내외에 세워졌다. 거기에 이미 망명정부 역할을 하고 있던 이상룡의 군정부도 있었다. 그대로 가면 임시정부가 난립하게 되는 상황.
그러자 이상룡은 상해 임시정부로 힘을 몰아주기로 결심한다. 이상룡은 스스로 서간도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고쳐 부르며 상해임시정부를 단일정부로 인정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서간도 조직이 상해 임시정부에 힘을 실어주자, 다른 임시정부들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상해 임시정부가 정통이 된 이면엔 이상룡의 결단이 큰 역할을 한 것.
만약, 그때 이상룡이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더라면, 여러 임시정부들로 분열돼,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도 혼란의 여지를 남겼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현재 대한민국 건국에 이상룡의 공이 매우 크다.
이상룡의 업적 중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신흥무관학교다.
경학사 부설 군사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인데, 이회영의 형 이석영이 거금을 들여 학교 부지를 매입했고, 이상룡이 운영자금을 맡았다.
이회영 일가는 중국에서 뿔뿔히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신흥무관학교의 경영에는 멀어졌고, 신흥무관학교 경영은 이상룡이 주축이 되었다.
이상룡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약 400억 정도였다고 전해지는데, 그걸 몽땅 신흥무관학교에 털어넣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수천 명 젊은이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하다보면, 400억 쯤은 금방 증발해버린다.
그래서 전답을 판 것도 모자라 종가인 안동 임청각까지 팔아버렸다.(종손이 독립운동에 종가집까지 팔아버리다니.)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독립투쟁사의 가장 큰 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배출된 약 3천여 명의 독립군 장교들은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광복군 등 각지에서 활약했다. 만약 신흥무관학교를 빼버린다면 한국의 무장독립투쟁사의 3/4이 날아가버릴 것이다.
청산리 대첩 때 신흥무관학교는 졸업생과 교관을 파견해 싸웠다. 당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이상룡의 서로군정서는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
이범석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다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로 파견되어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인물. 후일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이 됐다.
빈 라덴 이전까지 역대 현상금 랭킹 1위였던 약산 김원봉도 신흥무관학교 출신.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주축으로 결성됐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인 지청천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둘 다 경험한 사람. 그는 후일 광복군 총사령관이 된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과과정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일본 육사의 그것과 비슷했던 건, 교관들이 그쪽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과 신흥무관학교
문재인은 어떻게 해서 이상룡과 임청각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정확한 계기는 알 수 없지만 일부 추측은 할 수 있다.
문재인의 모교 경희대학교의 전신이 신흥무관학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복 직후, 이회영의 동생이자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를 부활시켜 '신흥대학'을 설립한다.
그러나 이시영이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이승만에게 책임을 묻자, 둘의 관계가 틀어지고, 이시영은 부통령직을 사임. 그와 동시에 신흥대학은 재정난을 겪게 되고, 6.25전쟁의 혼란 중에 석연찮은 이유로 조영식에게 재단이 넘어갔다. 조영식은 열렬한 이승만 지지자였다.
그후 조영식은 신흥대학의 이름을 경희대학으로 바꾸고 신흥무관학교의 흔적을 지우는데 힘을 쏟는다.
최근에 와서야 경희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란 뿌리찾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경희대 동문들 중 자기 학교의 전신이 신흥무관학교란 걸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
즉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이상룡은 문재인 대통령의 모교인 경희대학의 설립자인 셈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능력이 없었다. 정부수반이란 자가 정부에 나오지도 않고 하와이에 머물렀으니 말 다했다.
거기서 차라리 가만 있기라도 하면 될텐데, 국제연맹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해버렸다.
신채호의 말을 빌자면,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저질렀던 것.
결국 이승만은 임시정부 요인들에 의해 탄핵됐다. (탄핵으로 파면된 한국의 최초의 대통령은 박근혜가 아니라 이승만이다.)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국가수반이 사고뭉치였던 것.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이 된건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이승만 모교인 프린스턴대의 총장 출신이란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왜냐면 상해 임시정부는 출범 당시 외교적 노력을 통해 독립을 하자는 쪽이 주류였고 그래서 미국에 연줄이 있는 이승만을 선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탄핵 후 2대 대통령이 된 박은식은 이승만이 저지른 짓을 수습하려 동분서주했지만 힘에 부치자 만주에 있던 이상룡에게 SOS 요청을 보낸다. 아마 이상룡이 만주 무장독립투쟁의 대부인데다, 상해 임시정부 출범 당시 전폭적 지지로 큰 힘이 되어줬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룡은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이 자신의 무장투쟁 노선과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구조요청에 응하기로 한다. 이상룡은 전부터 통합을 주장해왔고, 그러기 위해선 노선의 차이에 있어 양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이를 그대로 실천한 것. 그래서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이상룡은 임시정부 3대 수반이자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이 너무 큰 똥을 싸 놓았고, 이상룡도 그 똥을 치우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결국 좌절하고 이상룡은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후 임시정부는 김구가 수습하기까지 내분으로 혼란의 시대를 거치게 된다.
이상룡의 최후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는 만주일대의 한인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면서(간도참변),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는 급속히 몰락한다. 일본군의 추격이 거세지자, 이상룡은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다녔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건 운명을 같이했던 동지들의 실종 소식. 그들 중 상당수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동지들과 함께 일구었던 조직이 하나하나 부서져가는 와중에도 꿋꿋이 버티던 이상룡은 끝내 쓰러진다. 한 사학자는 여준, 이장녕의 사망 소식이 결정타였다고 분석한다. 그들은 이상룡과 반평생 고락을 같이 한 동지였다.
동지들은 죽었는데, 자신은 아직 살아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는지, 그 소식 이후 이상룡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독립이 이뤄지기까지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갖고 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 동지들 곁으로 갔다. 이상룡의 유해는 서간도의 야산 기슭에 묻혔다.
나중에 조카 이광민이 이상룡의 유해를 찾아 하얼빈으로 옮겨 묻었다. 이광민이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상룡은 유해마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광복 후 수십년이 지난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이상룡의 유해는 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임시정부 수반에게 대한민국은 한때 국적조차 주지 않았다. 참담한 보훈 수준이었다.)
다행히 현재 이상룡의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 임시정부 수반 묘역에 묻혀 있다.
참, 조카 이광민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 이광민 역시 만주 독립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상당히 똑똑했고, 기획, 재무, 행정방면에도 뛰어났다고 알려졌다.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있을 때 비서실장 역할을 하기도 했고, 후일 만주의 대표적 무장단체인 정의부 대표를 지내게 된다.
조카 이광민과 큰아버지 이상룡의 에피소드 하나.
이상룡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다닐 때 이광민은 변장을 시킨다며 이상룡의 머리와 수염을 빡빡 밀어렸다.(이상룡의 흑역사) 위키백과 사진에 나오는 이상룡의 멋진 수염과 은발은 이광민의 손에 의해 없어졌다. 그리고 검문당할 때 큰아버지에게 벙어리 노인 행세를 하라고 시켰다. 이광민은 중국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했지만, 이상룡은 한국인이란 게 티가 났기 때문. (평소 탈모증이 있던 이광민의 무의식에서 나온 과잉행동이란 우스개 소리도 있다.)
이상룡의 후손들
이상룡을 보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아흔아홉칸 임청각의 주인이자 거부였던 이상룡은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털어넣으며 전 가족이 투쟁에 나섰는데, ...그 결과 집안은 몰락했다.
후손들은 죽거나 고아원을 전전. 아이들은 참고서 살 돈은 커녕, 끼니걱정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상룡의 유일한 아들 이준형은 일제치하를 비관해 자살. (두 동생도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가거나 타지에서 죽었다.)
손자 이병화는 6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만주로 갔다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 때부터 무장투쟁에 나선 인물.
1920년대 압록강 유역의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이 활발했는데,(묻혀진 역사 중 하나) 그 전투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기록에 남은 것 하나는 이병화가 평안북도 청성진의 일본 경찰서를 습격해 일본 경찰을 사살했다는 것. 그리고 탈출해 본대로 복귀했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사람이라, 야전에선 잘 잡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체포된 건 국내 활동을 하면서, 가족과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 온통 노출되었을 때였다. 후손들 기억에 따르면 이병화는 축지법을 쓰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산을 잘 탔다고 한다.(민간인 입장에서 보면 신기할 지 모르겠지만, 주요 전술훈련 과목이 산악전이었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라면 그 정도는 기본이었을 것)
이병화는 미국작가 웨일즈가 쓴 책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함께 활동했다. (둘은 동갑내기에 같은 안동 출신.)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가 와해된 후, 이병화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됐고 고문당했다. 풀려났다가 다시 체포되기를 밥먹듯이 했다.대구 형무소엔 이대용(이병화의 다른 이름) 전용 감방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
8.15광복을 맞았을 때 이병화는 안동 형무소 수감 중이었다. 이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3년 46살 나이로 죽었다.
이병화의 큰 아들이자 이상룡의 맏증손자는 일제경찰 출신들에게 고문받다가 25살에 죽었다.(사회주의 혁명가였단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이병화는 생전에 큰아들을 먼저 보냈다.)
이병화의 둘째 아들은 한국 전쟁 때 실종됐고, 다른 자녀들은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석유를 팔러 다녔다.
만약 조상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굴리며 잘 먹고 잘 살았을 사람들. 친일파 후손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들 대부분은 가난해도 긍지를 갖고 산다. 친일 후손들의 병역회피 같은 비리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임청각 관련해 9명의 독립유공자가 있지만, 사실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학계에선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는 임청각의 독립운동가는 40명 이상으로 본다. 서훈을 못 받았을 뿐...)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상룡의 손자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는 걸 두고 그래서 혹시 이상룡도? 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다.
이상룡의 행적과 사상, 기록을 보면 그는 사회주의와 거리를 둔 민주주의자였고, 사상은 오히려 우익에 가까왔다.
하지만 이상룡은 일생을 통해 노선이 다른 사람에 대해 놀라울만큼의 포용력을 보여줬다.
일례로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두고 안창호와 편지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양보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손자 이병화와 조카 이광민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에 대해서도, 이상룡은 자기와 사상이 다르지만 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만주 무장독립투쟁은 중국공산당과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룡은 정치적 노선 뿐 아니라 종교에 대해서도 상당히 포용적이었다.
자기 대신 제사를 모시라고 부탁했던 동생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제사를 모시지 않자, 이상룡은 선뜻 인정하고 포용했다.(그 동생이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이상동이다.)
이상룡에겐 전통 성리학과 양명학, 계몽사상과 근대 민주주의 사상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 같다.
(그의 문집 '석주유고'엔 뉴튼 물리학 해설에 상당량의 지면을 쓰기도 한다. 그만큼 여러 방면에 열려 있었다. 문집 치고는 상당히 독특하다.)
(물론 석주유고엔 절절한 시와 동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많다. 만주 독립운동 개척 당시에 지은 시도 많은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젠장~ 너무 힘들다"이다.)
마치며
이상룡의 무장투쟁 노선과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놓고 본다면, 둘다 필요했지만, 이상룡 쪽에 조금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임시정부도 초반의 외교노선 일변도를 벗어나 후반기엔 무장투쟁 노선을 중시하게 된다.
그래서 광복군을 창설하고 본토 진공을 기획했고, 실행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고 일왕이 갑작스럽게 항복선언을 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복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광복군이 국내진공을 못한 걸 못내 아쉬워했다고 알려졌다.
만약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의 한축을 담당했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왜냐면, 승전국 지위를 차지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미군정이 아닌, 한국인 자치정부가 수립됐을 것이다. 친일청산은 일찌감치 끝났을 지도 모른다.
2차 대전 후 드골 망명정부가 승전국 지위를 획득하면서 역사청산을 확실히 끝낸 걸 보면 알 수 있다.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한 이상룡의 통찰이 다시 주목받는 부분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2001
허은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2010
이종서 [군자불기의 임청각, 안동 고성이씨 종가] 2016
채영국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 2007
김병기 [100년만의 만남 신흥무관학교] 2011
김희곤 [독립운동의 큰 울림, 안동 전통마을] 2014
<논문>
윤순갑 김명하 [석주 이상룡의 사회진화론 수용과 국가주의] 2004
문장수, 최재신 [석주(石洲) 이상용(李相龍) 선생의 서양 자연과학수용과 개화기 영남 유림들의 과학적 의식의 변 동 양상 분석] 2016
호광수 [석주 이상룡의 망명 한시 텍스트와 상황성] 2004
<기타 - 학술 강연집>
김희곤, 강윤정 [조국 광복을 이끈 안동 법흥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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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이용득 의원은 이상룡의 손자?
추미애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용득 의원이 이상룡의 손자라고 썼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실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용득 의원이 고성이씨 종가인 임청각 후손이라는 점은 맞고, 그리고 이상룡과 먼 친척인 것도 맞다.
이용득 의원이 이상룡 선생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해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이용득 의원은 노동운동을 오래했던 사람으로, 임청각의 독립운동가들의 정치노선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가 석주 이상룡 선생을 알리는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
탤런트 이서진이 이상룡의 후손?
이건 완전 아니다. 다만 같은 고성 이씨인 것은 맞고 따지자면 아주 먼 친척뻘 된다.
이서진으로부터 약 13대 쯤 거슬러 올라가야 이상룡과 조상이 같아진다.
(조선 중기 무렵 형제가 나란히 옆집에 살았다. 그게 현재 임청각과 탑동파 종택이다.)
즉, 이서진의 아버지는 고성 이씨 탑동파 종손으로, 이상룡과 본은 같지만 파가 다르다.
바로 옆집에 종가를 둔 두 집안이 과거에는 비교적 교류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근현대도 계속 교류가 있었는지는 의문.
왜냐면 이상룡의 후손들이 고아원을 전전할 당시 이서진의 할아버지는 제일은행 은행장을 지내는 등 상당한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룡 후손에게 도움을 줬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