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드렁한 일요일 저녁입니다...
문득 작은누이와 얽힌 얘기하나를 들려드리고 싶네요.
대학시절, CBS 프로그램의 심야프로그램중에
김창완의 꿈과 음악사이에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방 2개만을 썼던 대학시절,
저와 작은누이는 같은 방을 쓰며,
밤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재잘거렸던 樂이 있었더랩니다.
그러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잡힌, 김창완.
병적으로 산울림과 김창완을 좋아했던 우리 남매는 순간, 포섭되어 버렸습니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김창완이란 시간 고정책을 만나 버린것이죠.
방송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그냥 듣는것입니다.
무조건, 김창완이 좋으니깐...
우연한 기회에,
작은누이가 관제엽서를 몇장 얻어와서는 Request를 제안했읍니다.
타 방송에 비해 청취율이 떨어질것이라는 우리만의 예상도 하면서,
조금 독특하게 보내보자는 것이었죠.
저는 글을쓰고 미대에 다니던 작은누이는 관제엽서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의 사악한 의도는 적중되었고,
Request율 100%라는 경이적인 기록도 세웠습니다.
일주일에 2장씩 보내던 우리엽서는 정확히 소개되었고,
급기야 부산 구서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김창완이 외우게끔 되었을 정도였었습니다.
저는 항상 10곡의 신청곡과 간단한 아티스트 소개, 그리고 사연을 적었고,
작은누이는 나무가지, 꽃, 뿌리, 줄기 등의 그림과,
미연색의 뽀오얀 바탕그림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김창완이 저희 남매에게 어떤 전화번호를 눌러주기를 요청했고,
제가 그 전화번호를 누르던 순간이,
제 일생에서 잊지못할 추억의 한부분을 만들게 되었었습니다.
담당프로그램 PD의 전화요청, 그리고 리포터의 제안,
23세의 젊은이는 흥분했고, 25세의 아가씨는 즐거워 했습니다.
그리고 약 2주정도, 정확히 새벽 1시면 걸려오는 전화,
약 30분간의 통화,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난후의 몇시간 동안(대략 새벽 3, 4시까지)
남매의 즐거운 지저귐은 집안에 가득했고...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사업실패후 빚쟁이들과의 씨름으로,
몹시도 신경이 날카로웠던 아버지의 반격이 시작되었던 것이.
어느날 김창완 방송에 리포터로서 출연할 기회가 왔을때,
아버지는 거칠게 화를 내시며 저희 남매의 서울행을 막았습니다.
그때처럼 아버지를 원망해본적이 없었다는 작은누이는,
그 큰눈으로 밤새 밤새 울었드랩니다.
새벽 1시, 김삼일 PD의 전화, 서로 연결되어있던 건넌방 전화기의 격한 탁음.
하지만, 그때의 저는 아직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의 서울행은 그렇게 무산되는가 했습니다.
아끼던 3장의 LP를 들고서, 난생처음 방송탈 기회를 손꼽았던,
어리숙한 부산총각은 그렇게 주저앉았습니다.
그날밤 몹시도 취한 아버지는 우리의 방에 들어오셔서,
라디오의 소유권을 제한하려 하셨습니다.
울음을 흘리시며 아버지를 말리던 어머니, 시끄러운 악다구니,
빚쟁이들의 악다구니에 질릴만큼 질린 나지만, 그날밤 만큼은 지옥이었습니다.
12시가 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작은누이가 저를 부르더군요. 잠시 나가자고 하더군요.
그리고 우리 남매는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집에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국민학생이던 동생과, 조금은 이질적인 생활을 했던 큰누이,
두사람은 저희들의 야반도주를 몰랐습니다.
아직도 그날 이후 4일동안의 잠적을 모르더군요.
무난히 방송출연은 이루어졌고,
이후 여러번의 방송출연은 음반소개라는 미명하에,
김삼일 PD와의 작당으로 자주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이때의 치기어린 행동 덕분에,
방학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방송국의 Q-Sheet 작성하는 기회를 잠시 얻을수 있었고,
지금도 그때의 추억은 소중하게 제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꿈과 음악사이에 방송을 지켜보면서,
저의 로고가 매일밤 나오는 즐거움도 맛보았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작은누이의 얼굴을 매일 지켜볼수도 있었으며,
한 백혈병 소녀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일도 겪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창완이라는 사람을 옆에서 자주 볼수있는 기회를 얻었었고,
참으로 善하고 꾸밈없는 사람이라는
선입관이 깨어지지 않아 너무나 다행이기도 하였던 시절,
그때의 소리없는 야밤도주로 많은 것을 얻었었습니다.
지금은 할수 없는 감히 힘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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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누이가 31살의 나이로 시집갈때 너무너무 울었습니다.
너무나도 착하고 천진난만한 작은누이가 너무너무 고생을 하였던 고로,
작은누이의 결혼은 지극히 순탄치 못했습니다.
작은누이를 사랑한다는 사람의 집에서 너무나 격렬히 반대하여,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두사람은 동갑이었습니다)
학벌이 딸린다는 이유로(그 남자는 S대를 나왔습니다)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아버지는 재기에 실패하셨습니다)
부모의 흠을 이유로
(부도로 인한 경제사범으로 나의 아버지는 잠깐의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은누이로서는 생애 두번째의 야반도주가 있었고,
두사람은 아무런 식도 행하지 못하고 서울서 살았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오랫동안 울어본적이 없었습니다.
작은누이를 생각하면 갑자기 울음이 나곤 했었습니다.
머나먼 낯선 서울에 아무도 없는 조그만 아파트 방안에서 저에게 전화를 하면,
몇마디 상투적인 말 이후,
눈물섞인 말만으로 우리의 대화는 일관 되었었습니다.
1년후, 첫 딸아이를 놓고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너무 너무 기뻐 울었습니다.
그날이 제 큰아이 종혁이가 태어난지 이틀만의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착한 작은누이, 얼마전 큰딸아이가 폐가 약해,
밤새 펌프기를 사용하다 잘못해서 어린생명을 보낼뻔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랬던지. 작은누이의 그렁그렁한 눈이 생각납니다.
잘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전화해서 저를 항상 걱정하지만,
잘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큰딸 보영이가 튼튼하면 좋겠습니다.
착하게 살면 언젠가는 주님이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이, 그 진실이,
나의 작은 누이에게는 반드시 적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휴~ 일요일 저녁 두서없는 回想의 고리가,
작은누이, 야반도주, 김창완을 거쳐 몸약한 조카 보영이에게 까지 미치는군요.
종혁이 보다 10일 먼저 난 보영이, 작은누이를 쏙 빼닮아 가슴이 찡한 보영이,
부디 별탈없이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냥 이쯤에서 글을 접을렵니다.....
....누이가 계신분들은 소중한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십시오. (다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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