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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readers_28485
    작성자 : predator7
    추천 : 1
    조회수 : 579
    IP : 59.6.***.20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17/05/24 16:18:50
    http://todayhumor.com/?readers_28485 모바일
    자작 판타지 소설 한 번 평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써보다가 조X라에 처음으로 연재를 해봤는데 필력이 부족한건지 재미가 없는건지 관심을 크게 못 받았습니다ㅠ
    친구들 몇 명 빼면 제대로 평가받지를 못했는데 한 번 읽어주시고 간단히 평만 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프롤로그만 간략히 올려보겠습니다.


    00001 프롤로그  =========================================================================


    "외벽이 무너졌다!"

    "목숨을 걸고 궁전을 사수해라!"

    쉴 틈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대포알과 마법들에 땅바닥이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모든 마족의 고향이라고 불리던 길로스 제국의 수도, 카디아는 처절한 고성과 비명으로 가득차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파하려는 자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으려 하는 자. 마치 두 마리의 맹수처럼 두 진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무수히 많은 창과 방패가 부딪치고 갑옷과 갑옷들이 으스러졌다. 상인들과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카디아의 거리는 양 쪽이 흘린 피로 마치 열대우림의 늪처럼 질척거렸다.

    "죽음 이후에도 내 모든 것을 길로스에!"

    마족들이 비장하게 소리쳤다. 수 천 명의 외침이 곧 카디아 전체에 울려퍼졌다.

    "죽음 이후에도 내 모든 것을 길로스에!"

    "죽음 이후에도 내 모든 것을 길로스에!"

    그들 모두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수도성의 외벽이 무너졌고 그들을 구원하러 와줄 지원군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 남은 것은 오직 파멸 뿐이었지만 그들 모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에 질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카디아 근위대의 수준은 이 정도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곳에 서있는 자가 나였다면 저정도의 투지를 불태울 수 있었을까?

    다행히도 승자의 자리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였다. 나는 전령에게 말했다.

    "마도부대를 투입해라."

    "예, 페하!"

    전령이 앞으로 뛰어나가는걸 확인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던 하인들이 순식간에 다가와 준비해 놓은 갑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수 십개의 크고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갑옷을 모두 장착하자 마치 오우거가 된 것처럼 몸이 커졌다. 나는 하인에게 투구를 받아든 후 천천히 머리에 뒤집어 썼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 전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성벽을 사수해라!"

    인간군과 마족군. 양 군의 지휘관들은 각자 칼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수 십 만의 인간 병사들이 창과 방패를 앞세우며 부서진 성벽을 향해 뛰어들었고 이에 맞서 황금빛 갑옷을 입은 카디아 근위대 수 천 명이 성벽 안쪽에서 화살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카디아 근위대는 후퇴와 반격을 거듭하며 성벽이 무너지고 난 이 후에도 무려 4시간 이상을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 폭격의 압도적인 파괴력에 근위대의 진형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폭렬 술식을 위주로 전개해라!"

    "놈들의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원 돌격!"

    승리를 확신한 인간 지휘관들이 칼을 휘두르며 고함치자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죽음도 불사한 돌격에 순식간에 근위대의 방어진은 무너졌다. 제아무리 대륙 최고의 정예병이라고는 해도 열 배 이상의 수적 차이는 이겨낼 수 없었다.

    그 후에 남은 것은 흩어진 잔존병들을 사냥하는 잔혹한 학살극이었다.

    나는 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뒤에서 당황한 친위대의 외침이 들렸지만 난 계속해서 달릴 뿐이였다.

    "폐하!"

    "페하!"

    나를 본 병사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폐하!"

    심지어 몇몇 병사들은 내 쪽을 향해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나는 병사들에게 있어서 군신(軍神) 그 자체였다. 궁전에서는 왕관을 놓고 피를 말리는 암투극을 벌였고 전장에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일선의 병사들과 함께 괴물들과 맞서싸웠다. 전장이야말로 나의 집이요, 내 영혼의 안식처였다.

    이제 곧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나는 대검을 치켜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아레스다!"

    "모두 저쪽에 화력을 집중해라!"

    내 모습을 발견한 마족 지휘관들이 소리쳤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수 십개의 마법주문들이 나를 향해 쇄도했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공중으로 치솟은 불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지상으로 곤두박질 치며 내 갑옷에 부딪쳤다. 강철도 한순간에 녹여버릴만큼 강력한 마법주문이였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수 백 명의 신관들이 축복을 내려준 갑옷은 그 어떤 마법 주문도 가볍게 무력화시켰다.

    나는 대검을 양 손으로 꽉 부여잡고 눈 앞의 적을 향해 휘둘렀다.

    "으아악!"

    "괴...괴물이다!"

    그것은 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철 덩어리에 가까웠다. 육중한 반동과 함께 적 병사의 몸이 두 동강 나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반토막난 몸통에서 내장과 핏물이 쏟아져나오며 땅바닥을 붉게 적셨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한 모습에 마족과 인간 병사들 모두 뒤로 주춤했다. 

    "당황하지 말아라! 적은 한 명이다! 저녀석만 죽이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

    마족 지휘관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내가 내지른 대검은 일직선으로 날라가 그대로 지휘관의 몸통을 뚫고 땅에 박혔다.

    "우아아아!"

    수 십 명의 마족 병사들이 광기어린 함성을 내지르며 나를 향해 일제히 돌진했다. 날카로운 창날들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검을 교차하는 육탄전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 비록 검은 내 손에 더이상 없었지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였다.

    "후우..."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정신을 집중하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 내 몸을 뚫을 것만 같던 창날들이 갑옷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30초.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나는 내 몸을 겨눈 창들을 옆으로 밀어붙이고 적들을 향해 뛰어갔다. 천천히 공포로 물들어가는 적들의 얼굴은 마치 악마라도 본 것만 같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앞에 있던 적 병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치는 듯한 촉감과 함께 그대로 적의 두개골이 산산조각났다. 뇌수와 뼈조각들이 투구에 튀면서 시야를 막았지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였다. 어차피 사방이 적진이였다. 휘두르면 맞는다.

    나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인영들을 향해 미친듯이 주먹질을 했다. 

    적들의 배가 뚫리고 턱이 박살났다. 있는 힘껏 창을 휘두르던 몇몇 병사들의 팔은 그대로 뽑혀나가 진흙탕 위를 굴렀다.

    "하아..."

    내가 다시 한 번 숨을 내뱉을 때 이미 내 주변에 남은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죽이 된 시체들뿐이었다.

    나는 병사들의 함성을 배경음악 삼아 왕궁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들어갔다.

    "와아아아!"

    수 만 명의 병사들이 나를 에워싸며 왕궁 안으로 돌진했다. 마치 거대한 파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였다.

    그 날 전투에서 살아남은 적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왕궁이 점령되고 곧이어 고위 마족들이 거리로 끌려나와 처형당했다. 기다란 창에 꽂힌 그들의 머리통이 카디아 곳곳에 세워졌다.

    거리에는 자비를 애원하는 마족들의 끊임없는 비명소리로 가득차 흡사 지옥도를 연상시켰다. 

    "폐하께 승리의 축복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와아아!"

    잠시 후 수 만 명의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 속에서 익숙한 얼굴의 부하 장군들과 사제들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최후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궁전 안에는 곳곳에 아직 치우지 못한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위압감이 들 정도로 거대한 홀의 양 옆에는 지난 6년 동안 나와 함께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온 동료들 수 십 명이 도열해 있었다.

    마치 오크 한 마리를 보는 것 같은 거대한 체형의 장군부터 갑옷을 입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여사제까지 그들 모두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의 곁을 지켜준 소중한 전우들이였다.

    드디어 끝난건가.

    마족들의 국가이자 인류의 적이였던 길로스 제국은 오늘로써 멸망했다. 마족과 인류는 지난 몇 천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서로 대립하며 싸워왔다.

    하지만 그것은 싸움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마족들의 침공이 대부분이었으며 인간들은 매번 공격을 막아내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인명과 자원들이 낭비되고 희생되었다.

    하지만 난 지금 이 순간 평범한 한 인간으로써 마족들의 왕, 코른의 앞에 서있었다. 

    약 6년에 걸친 인류와 마족 간의 대전쟁 속에서 나는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인류 연합군을 지휘하며 사선을 넘어왔고 수 십 번에 걸친 승리와 무수히 많은 희생들을 통해 마침내 이 기나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난 피를 흩뿌리며 홀의 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코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엘프라는 생각이 드지 않을 만큼 크고 거대한 몸을 지닌 그는 수 십 명의 아군 병사들에 의해 사지가 구속되어 있었다.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군, 코른."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스릉

    서늘한 손잡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칼 끝 쪽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에 고여있는 피웅덩이에 떨어지며 차가운 물소리를 냈다.

    "넌 네놈이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세계의 균형을 깨트린 대가는 네놈이 직접 치르게 될 것이다."

    "언제든지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지."

    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짧게 대답했다.

    "빨리 죽여라!"

    그는 굴욕적이라는 듯 고함치며 몸을 앞뒤로 뒤흔들었다. 그가 한 번 팔다리를 움직일때마다 그를 구속하고 있던 병사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소원대로."

    나는 양손으로 검을 쥐어잡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던 칼날이 정확히 그의 목을 잘랐다. 주인을 잃은 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 프레스 제국의 황제, 아레스는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치며 아드레날린을 온 몸으로 퍼부었다.

    드디어 나의 순간이 왔다. 

    "12신들의 영광으로 마련된 이 자리에서 짐은 한데 뭉친 왕국들과 자유도시들의 부름에 답하고. 지난 몇 천 년간 비열한 마족들에게 빼앗겼던 제국의 국호를 받아들여 우리 인류에 대한 숭고한 의무를 다할 것을 선언한다!"

    "와아아!"

    "황제폐하 만세!"

    홀은 순식간에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장군들 중에서는 심지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여럿 보였다. 아직 이 정도로 감동하면 곤란하지.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일개 병졸들부터 고위 장군들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수 백개의 눈동자들이 흔들림 없이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검을 쥔 오른손을 허공을 향해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신들께 선택받은 오직 우리 인류만이 이 땅의 정당한 주인으로써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인류 제국에 영원한 영광을!"

    "우와아아아!"

    귀가 터져나갈 정도의 함성이 마족의 제도(帝都) 위에 울려 퍼졌다. 마족들의 시체가 시내를 뒤덮었고 함성이 퍼져나가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처형된 마족들의 머리가 쇠꼬챙이에 찔린 채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나는 인류 역사 속에서 유일무이하게 마족의 땅을 정복한 대왕이었고 수 천년의 혼돈에 종지부를 찍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다.


    『최종 퀘스트 길로스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마족들을 무찌르고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했습니다.』

    『히든 엔딩 - 인류 제국』

    『엔딩 후 플레이를 계속하시겠습니까?』

    적어도 게임 안에서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눈 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후우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로그오프 버튼을 눌렀다. 




    00002  또다른 전쟁  =========================================================================


    게임을 끄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기분은 바로 지독할 정도로 강렬한 갈증이었다.

    이번에는 몇 시간을 플레이 한 걸까? 폐인을 방불케하는 불규칙한 생활에 시간감각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게임 속 플레이 시간을 나타내는 상태창에는 9999+시간이라고 짤막하게 나와있을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몇 년은 늙은 것만 같았다. 

    "하아..."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려 했지만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구멍 아래에서부터 입 속까지 모래가 가득 차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일단 캡슐에서 나가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손을 올려서 캡슐의 정중앙에 있는 정지버튼을 눌렀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캡슐의 문이 열리면서 늦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거의 9일 동안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게임에만 빠져살았다는걸 부모님들이 아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적어도 팔다리가 몇 개는 날라갈거다.

    몇 년 전 최초의 전뇌(前腦)게임이 개발된 후 매일매일을 캡슐 속에서 보내는 폐인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였다.  
     
    힘겹게 손을 들어 테이블에 놓여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화면을 켜자 30건이 넘는 부재 중 전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대부분은 예상했던대로 부모님한테서 온 것이였지만 친구들한테서 온 메세지도 몇 개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잘 지내냐는 수준의 안부 문자가 다였다. 뭐 나중에 천천히 답장해도 되겠지.

    나는 휴대폰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캡슐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캬아 두 시간이라, 주인님 이번에도 신기록 경신인데요!"

    바닥에 발을 떼기도 전에 발랄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방에 퍼졌다.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포비. 내가 독립해서 자취방을 얻고 가장 먼저 샀던 개인형 고급 인공지능 비서였다.

    맨 처음에 포비를 샀을 때만 해도 처음 느껴보는 여친 비슷한 기분에 매일같이 함께 영화를 보고 수다를 떨었었지만 내가 최신 전뇌(前腦)게임인 라그니움에 빠져들고 나서는 몇 일 동안 얼굴 한 번 잠깐 보는게 고작이였다.

    '현실에서는 두 시간 밖에 안 지난건가.'

    전뇌(前腦)게임은 플레이어를 가수면 상태로 유도한 후 뇌 신경망에 직접적으로 전파를 쏘는 일종의 최면 장치였다.

    특정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전파를 통해 플레이어는 갖가지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원리적으로는 꿈을 꾸는 것과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시간 게임을 플레이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히잉"

    팔다리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내 몸이 아닌 오래된 인형의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양 손을 있는 힘껏 쥐었다 펴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뇌(前腦)게임으로 인한 일시적인 인지 기능저하였다.

    '평소에는 몇 초면 사라졌었는데.'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전신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게임 속의 몸에 비해 현실의 몸은 너무나 무겁고 뻣뻣했다.

    병원에 가야되는걸까 걱정하며 방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170cm정도 되보이는 키의 여자아이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주인님~ 하루종일 게임만 하시지 마시고 저랑도 좀 놀아달라고요."

    포비가 과장스럽게 팔을 양 옆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폈다. 가녀린 팔목과 기다란 검은 머리는 맨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거실과 방들의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홀로그램 투사기 덕분에 그녀는 집 안이라면 어디든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물론 주인인 내가 전원을 끄거나 일반적인 인공지능 수준으로 기능을 제한할 수는 있었지만 시끄러운 알람시계 하나라도 옆에 있는게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가끔은 나가서 친구라도 만나는게 어때요 주인님? 매일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옆집 사람들이 경찰에 사망신고라도 할 지 모른다고요?"

    포비가 여전히 내 앞을 막은채 장난스럽게 말했다.

    "귀찮아."

    나는 손을 내저으며 내뱉듯이 말했다. 친구들이랑 만나봤자 서로 자기자랑만 늘어놓는게 다였다. 그마저도 나는 자랑할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나 저번주부터 매일매일 1분도 안 쉬고 게임만 했다!'

    굳이 자랑하자면 이 정도일까나.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집에서 나가지 않으니 결국 하는건 게임뿐이였고 그렇게 끊임없는 악순환은 계속 됐다. 방 구석에는 읽다 만 판타지 책들과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고 집안 곳곳에 먼지가 잔뜩 쌓여있어서 흡사 버려진 폐가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리 제가 매력적이고 예쁘지만 가끔은 나가셔서..."

    "닥쳐."

    나는 포비의 말을 빠르게 끊으며 무거운 몸을 억지로 앞으로 움직였다. 삐그덕거리며 관절들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포비의 몸을 통과해서 지나가자 지지직거리며 홀로그램의 잔영이 거칠게 흔들렸다.

    "꺄아아악 변태야!"

    난 포비의 살짝 과장된 듯한 비명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 한 병을 꺼내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와 텅 빈 위를 채웠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었던게 언제였을까? 이틀 전? 삼일 전? 아니면 일주일도 전인가?

    전뇌게임 속에서 푸아그라, 캐비어, 샥스핀 같이 온갖 고급음식들만을 먹다보니 현실의 딱딱한 편의점 도시락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삼각 김밥 서너개와 컵라면 몇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섭취였다.

    센서가 작동했는지 거실의 한 가운데 있는 3D 홀로그램 티비가 위잉-하는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켜졌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뉴스 아나운서의 모습이 나타났다. 커튼이 쳐져 있어서 방은 빛 한줄기 없이 완전히 어두웠다. 아나운서의 얼굴만이 어두운 거실의 한가운데에서 선명히 빛났다.

    "MZ의 신작 게임인 라그니움이 출시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5000만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

    최초의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50년이 지난 지금 98 퍼센트의 인류는 무직인 상태였다. 화장실 청소부터 치킨을 튀기는 것까지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이 기계들을 관리하는 역할마저도 인공지능들이 담당하면서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전 국민들에게 매달 넉넉한 수준의 생활금을 제공했고 덕분에 굳이 일하지 않아도 행복한 문화 생활을 누리며 생활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유일한 문제라고 하자면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쉬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일하지 못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점이였다. 할 일이 없어진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뇌게임이나 예술, 음악, 영화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에 몰입했다.

    그 중에서도 최첨단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한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전뇌게임들이 가장 큰 인기를 누렸고 나또한 별다른 생각없이 하루하루 게임으로 세월을 보내는 수 천 만의 게이머들 중 한 명이였다.

    "포비야 나 술 좀 줘라."

    난 텅 빈 오렌지 쥬스 통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지며 포비에게 말했다.

    "기껏 게임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다는게 술이나 퍼마시는거에요? 우선 제대로된 식사라도..."

    "밥은 저번주에 먹었잖아."

    "하아..정말...차라리 컵라면 같은거라도 좀 드시라고요."

    아쉽게도 지금의 나에게 허기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좋게 취하고 싶다는 갈망만이 머릿속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포비의 짧은 한숨과 함께 냉장고에서 술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냉장고 밖으로 튀어나온 술병을 재빨리 집어들고 왠지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내 몸무게에 맞춰서 푹신푹신하게 들어가는 소파의 부드러움에 감탄하며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클리어한 라그니움의 데이터에 있는 지도를 펼쳐봐."

    "플레이어 아레스의 라그니움의 세이브 파일을 로딩합니다."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뉴스 방송이 꺼지고 거실 한 가운데에 거대한 지도가 나타났다.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최신 전뇌게임 라그니움. 플레이어는 게임 속 인간 캐릭터들 중 한 명으로 시작해 인류를 마족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적이였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현실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자유도인데 실제로 플레이어는 어새신으로 시작해 마족의 왕을 암살할 수도 있었고 평범한 병사로 시작해서 전과를 세워 장군이 된 후 군대를 이끌어 마족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다.

    오직 전뇌게임이기에 가능한 게임 플레이였다. 기존의 콘솔게임, VR게임들은 수 백 명의 레벨 디자이너들과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일일이 게임 속 세계와 캐릭터들을 설계해야했지만 플레이어의 잠재의식을 활용한 전뇌게임에는 그러한 과정이 불필요했다.

    단순히 '아름다움, 붉은 머리, 쾌활한 성격'와 같이 간략한 키워드만을 입력하면 플레이어의 무의식 속에서 한 명의 캐릭터가 탄생했다. 모두가 같은 게임을 플레이했지만 게임의 플레이방식, 등장 캐릭터들은 개개인들의 상상력을 통해 생성됐다. 게임 개발자로서는 전체적인 틀만 잡아준다면 나머지는 플레이어들의 무의식적인 상상 속에서 게임이 진행됐다.

    나는 보통 몰락한 귀족이나 일개 장군으로 시작해 왕위를 찬탈하고 왕국을 이끌어 대전쟁을 통해 마족을 물리치는 플레이 방식을 선호했다. 물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마족 어새신을 고용해 왕을 암살하고 곧이어 왕위 계승자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여버리는 것과 같이 비열한 방식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재미있게 게임을 클리어한 적은 처음이였다.

    난 술 마개를 따고 그대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차가우면서도 화끈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갑자기 뱃속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빈 속에 마셔서 그런걸까. 나는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더 크게 들이켰다. 게임 안에서나 현실에서나 술 맛은 똑같았지만 현실과 달리 게임에서는 아무리 마셔도 취할 수가 없었다. 기분 좋은 취기가 온 몸을 천천히 뒤덮기 시작했다.

    '인류 제국'

    인류와 마족으로 나뉘어져 있던 두 개의 커다란 대륙은 이제 하나의 이름 아래 통일되어 있었다. 비록 한낱 게임에 불과했지만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었다. 라그니움의 캐치 프래이즈는 바로 '나만의 경험'이였다. 보통 엔딩과 그 엔딩에 다다르는 과정이 이미 정해져 있는 기존의 게임들과 달리 라그니움에서는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이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천재적으로 설계된 게임 속 수 만개의 다양한 상황들이 뒤섞이면서 매순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했던 플레이를 그대로 다시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내가 봤던 캐릭터들, 궁전들, 무기들의 모습은 모두 내가 무의식 속에서 창조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카디아 궁전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창을 허공으로 휘두르며 환호성 지르는 병사들, 길거리에서 무자비하게 처형당하는 마족 포로들, 궁전에서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던 나의 모습을 생각하자 다시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야, 이런 플레이도 가능했어요? 진짜 대단하네."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나는 상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포비가 언제 왔는지 내 옆에서 서서 지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포비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응 그래봤자 겜 폐인."

    지금 당장 플러그를 뽑아버릴까 순간 고민했지만 고작 그걸 위해 몸을 일으키기에는 소파가 너무 편안했다.

    술기운이 올라오며 몸이 따뜻해지고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주인님, 잘거면 이불이라도 덮고..."

    난 포비의 잔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나는 전장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두 눈을 감고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전장이라기보다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를 보는 것만 같은 광경이였다.

    나는 언제부터 이곳에 서있었던걸까. 나는 누구였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산송장처럼 반복적으로 숨을 들이키고 내쉴 뿐이었다.

    짧고 긴 시간이 지나고 난 이내 눈을 떳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곤죽이 되어있는 시체들과 땅바닥을 뒤덮고 있는 내장들이 눈에 보였다.

    시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는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있었고 주변은 음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희누런 구더기들이 꿈틀거리며 갑옷 안 속으로 파고들었고 까마귀들은 시체들 위를 날라다니며 아직 남아있는 눈알들을 파먹었다.

    그 순간 나의 바로 앞에 뭔가 커다란 것이 떨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사체였다.

    사내는 자신보다 훨씬 기다란 장창을 품에 움켜잡은 채 나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흐리멍텅한 두 눈동자는 아무런 말 없이 고요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투구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에는 시뻘건 핏덩어리들이 엉겨붙어 원래의 색깔을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장창의 끝에 뭍어있던 피가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지며 시체를 적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통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창과 칼, 갑옷과 시체들이 한데 뭉쳐 여러개의 커다란 언덕들을 이뤘다. 







    둔탁한 충격음들이 언덕에 메아리 치며 울려퍼졌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시체들이 마치 폭우가 내리듯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인간들뿐만이 아니였다.

    오우거처럼 보이는 거인들의 시체부터 미노타우로스, 엘프, 심지어는 오크들의 초록색 시체들까지.

    핏물에 젖은 시체들이 핏방울들과 함께 떨어져 내리며 거대한 언덕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는 그 광경을 잠시 멍때리며 쳐다보다 이내 정면에 있는 언덕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깔려있던 시체들의 머리통이 으스러졌고 내장들이 터져나갔다.

    인간들의 갈비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왔고 오크들의 검푸른 뇌수가 땅에 뿜어졌다. 사방으로 핏물이 튀기는게 마치 비가 잔뜩 내리고 난 뒤의 진흙탕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였다.

    나는 빠르게 발을 움직이며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올라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언덕은 두 손을 쓰지 않으면 오르기 힘들 정도로 가팔라졌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언덕을 올랐다.

    찌그러진 갑옷들과 구멍 뚫린 투구들을 발판 삼아 위로 올라갈수록 언덕은 점점 가팔라졌다.

    언덕의 정상은 내가 방금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높이 올라가 이미 내 시야에서 저 멀리 벗어나 있었다.

    "하아...하아..."

    부지런히 움직이던 다리가 조금씩 느려지고 숨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다리에 무언가 걸린 듯한 느낌에 나는 그대로 잠시 멈춰섰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쳐다보자 무언가 기다란 것이 내 다리에 매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시체들이였다.

    수 십 구의 시체들이 마치 하나의 끈처럼 연결되 내 다리에 매달려있었다.

    내가 한 발짝 한 발짝씩 위로 올라갈수록 언덕에 쌓여있던 다른 시체들이 엉겨붙으면서 그 줄은 점차 길어졌고 커져갔다.

    시체들 중에는 여자, 어린아이, 심지어는 노인들까지도 있었다.

    어떤 시체는 갑옷을 입고있었고 또다른 시체는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다.

    어떤 시체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또다른 시체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시체들의 얼굴들은 모두 날 향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얼굴에는 눈동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텅 빈 구멍만이 남아있었다.

    "살...줘..."

    "어...머니...."

    입술들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억..울해......"

    "오직...영...광스런...죽...음..."

    "죽음....이후에도...."

    "...죽기...싫어...."

    수 십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뒤섞이면서 내 귀 속으로 들어왔다. 그 목소리들은 메아리처럼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지며 일분일초가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계속해서 팔다리를 움직이며 언덕 위를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무게에 난 제자리에 그대로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파리 날개짓 소리처럼 앵앵거리며 귀 속에서 울리던 말소리들은 점차 하나의 말로 통일됐다. 수 십 명의 목소리가 일제히 말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덤덤하고 차가운 어조였다.

    "무엇을......"

    "위해서........."

    그 순간 난 다리가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내 다리에서 떨어져 나간 시체들은 허무하리만큼 순식간에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쳤다.

    나는 다시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언덕은 아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속도로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나의 커다란 산으로 바뀌었다.

    아니, 산이 아니였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입이였다.

    모든 것을 뒤삼키며 으스러뜨리는 거대한 입.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

    눈을 다시 떳을 때 나는 이미 허공에 붕 뜬 채 아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입을 커다랗게 벌린채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순간 한 줄기의 빛이 내 눈 앞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환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난 잠에서 깨어났다.



    00003  갈망  =========================================================================================

    "새로운 ...... 습니다."

    "새로운 이메...했습니다."

    "새로운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거슬리는 기계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마치 망치로 뒷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숙취에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었다.

    "포비, 빨리 알림음 꺼!"

    "새로운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아, 시발 좀 끄라고!"

    분노에 찬 내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알림음에 나는 결국 얼굴을 찌푸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신경질적인 주먹질은 아쉽게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인님, MZ라는 곳에서 이메일이 와있는데요?"

    포비가 졸립다는 듯이 양 손으로 눈을 비비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뭐?!"

    MZ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신이 말짱해졌다. MZ는 라그니움을 창조해낸 개발자의 닉네임이였다. MZ가 한 명인지 아니면 집단인지는 불명이였지만 세계 최고의 전뇌게임 개발자로 알려져있었다.

    판타지부터 시작해서 현대밀리터리, SF까지 다양한 장르들의 게임들을 개발했지만 정작 MZ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말 그대로 전무했다.

    회사의 설립자나 규모, 위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자사의 게임에 대한 홍보조차 전혀 하지 않는 특유의 미스테리함은 오히려 팬들이 더 열광하는 부분이였다. 

    실제로 MZ 팬카페에 접속해 보면 게시글들 중 절반은 MZ의 정체가 뭘까 추측하는 글들이였다. 물론 그런 게시글들 중 대부분은 MZ는 외계인이라느니 전뇌게임을 통해 국민을 세뇌시키려는 정부의 계획이라고 말하는 허무맹랑한 주장들이였지만 그런 헛소리들이 설득력을 가질만큼 MZ는 베일에 감춰진 회사였다.

    그런 MZ에서 플레이어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얘기는 그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차게 머리를 때려봤지만 괜한 볼만 얼얼해질 뿐이었다.

    "스팸일 수도 있어요."

    포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메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MZ에서 온 이메일을 열람해 봐."

    "이메일을 열람합니다."

    짧은 로딩 후 이메일이 열리자 난 바로 발신자부터 살폈다.

    [email protected].

    MZ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온 이메일이였다.

    이건 진짜다.

    난 그 어느 때보다 흥분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공에 있는 스크롤을 내리며 이메일을 읽었다.




    0004 어디로의 탈출인가---------------------------------------------------------


    『플레이어 -아레스- 님께.』

     ─라그니움 히든 엔딩 '인류 제국'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클리어의 보수로 플레이어께는 라그니움2의 베타 테스트 참여 권한이 주어집니다.

       참가할 마음이 있으시다면 동의 버튼을 눌러주세요.

                           [동의]


    라그니움 후속작이라고!? 모든 사고와 생각이 정지한다는게 바로 이런 느낌일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크롤을 더 내려봤지만 이메일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였다. 어떻게 해야되는거지? 스팸인가?

    머릿속에 수십개의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이게 만약 스팸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을 터였다. 나는 재빨리 화면을 캡쳐한 후에 라그니움 팬카페에 게시글을 올렸다.

    게시글의 제목은 'MZ에서 온 이메일인데 어떻게 생각함?'이였다.

    한국에서만 500만이 넘는 플레이어 숫자를 지닌 인기 게임답게 1초도 채 되지 않아 수 십개의 댓글들이 달렸다.

    아니, 이 사람들은 하루종일 앉아서 게시판 새로고침만 누르고 있는건가.

    -ㅋㅋㅋㅋ딱봐도 주작이네
    -MZ에서 유저한테 이메일도 보냄?!?! 왜 나한테는 안 보내냐ㅅㅂ
    -주작이여 날아올라라~
    -관종 제발 꺼져라
    -조작할거면 제대로 만들던가 퀄리티 존나 낮네
    -딱봐도 스팸 아님?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나를 향한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욕설과 비웃음들이 난무했다.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댓글들은 그나마 친절한 편이였다.

    순간 욱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일일이 대답하는 댓글들을 달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유저들의 비아냥거림은 점점 더 심해질뿐이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덜덜 떨며 스크롤을 계속 내렸다. 

    -그럼 내가 본 엔딩은 노멀 엔딩이냐???

    -라그니움에 히든 엔딩이 어디있음?ㅄㅋㅋㅋ

    빠른 속도로 댓글들을 읽어내려가던 시선이 두 댓글에서 멈춰섰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플레이어의 자유를 강조하는 라그니움에는 노멀 엔딩, 히든 엔딩, 진엔딩 이런 구분이 없었다.

    아니 모든 전뇌 게임에는 엔딩의 구별이 따로 없었다.

    게임 개발사들은 세계관의 설정, 캐릭터 구성만을 맡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플레이어 각자의 몫이였다. 개개인이 본 엔딩이 곧 진엔딩이였으며 히든 엔딩이였다. 나는 재빨리 이메일로 접속해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스팸 메일인가."

    글 자체도 그 유명한 MZ에서 보낸 이메일이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허접했다. MZ에서 보낸 이메일이 고작 세 줄밖에 안된다니 누가봐도 수상하겠지.

    '동의 버튼만 누르면 라그니움 후속편을 미리 플레이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달콤한 말이 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아마 동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온갖 바이러스가 내 컴퓨터 하드에 쏟아져내릴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속았다는 분노심보다도 고작 이 정도 스팸 메일에 흥분했던 나 자신에 대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주인님 아까부터 좀 이상하신데요?"

    포비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렸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인공지능인 포비가 봐도 참 한심하겠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한다는게 인터넷에서 초딩들과 벌이는 키보드배틀이라니. 내가 봐도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전형적인 게임폐인의 모습이였다.

    흥분이 가라앉자 잠시 잊고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나는 소파에 다시 앉으며 포비에게 말했다.

    "아침밥이나 해줄래?"

    "네, 알겠습니다!"

    여느때와 같은 포비의 활기찬 대답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올렸던 게시판의 삭제버튼을 눌렀다.

    자극적인 제목 덕분인지 내 게시글에 달려있는 댓글들의 숫자는 어느덧 200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게시글을 삭제하고 이메일을 휴지통에 넣으려던 순간 나는 잠시 멈춰섰다. 스팸 메일이라고 결론 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삭제할 수는 없었다.

    만약 스팸 메일이라면 어떻게 내가 사용하고 있는 라그니움의 닉네임부터 시작해서 내가 클리어 한 엔딩까지 알고있는 걸까?

    설마 내 캡슐이 해킹당한건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하지만 난 이내 머릿속에서 그 의심을 지울 수 밖에 없었다. 

    뇌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전뇌게임 전용 캡슐이 악의적인 목적을 지닌 해커에게 해킹당할 경우 사용자가 미쳐버리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존재했기 때문에 모든 전뇌 캡슐들에는 인터넷 접속이 금지됐으며 정부기관의 엄격한 심사를 받은 게임팩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캡슐 안에 접속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닉네임과 게임정보는 어떻게 얻은걸까?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곰곰히 생각해봐도 좀처럼 명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턱에 손을 괴고 진지하게 생각하던 그 때 포비의 장난스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특제 오므라이스 대령이요~"

    포비는 마치 자기가 진짜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오므라이스를 향해 손짓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말했다.

    "먹음직스런 쌀밥에 식감을 자극하는 노란색 계란까지 정말 완벽하구나. 포비, 네가 없었으면 난 어떻게 살았을까~"

    "풉, 닥쳐라 좀"

    혼자 음식을 대령하고 혼자 칭찬하는 포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건 결국에는 밥뿐이다. 게다가 오므라이스 세트는 만 오천원이나 하는 고급음식이였다. 컵라면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이니 음식에 돈을 거의 쓰지 않는 나에게 있어서는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배를 쥐어짜는 듯한 허기에 난 숙취도 잊고 게걸스럽게 볶음밥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계란의 부드러움과 밥알의 쫀득쫀득함이 뒤섞이며 환상의 조화를 이뤄냈다.

    "우웨에엑, 좀 천천히 좀 먹어요. 그러다가 숨 넘어가겠네."

    포비의 말에 나는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더 크게 퍼서 입 안에 쑤셔넣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휴...내가 말을 말지..."

    그런 내 모습을 본 포비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모를 성취감을 느끼며 입 속에 남아있는 밥알들을 음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그릇 가득히 담겨져있던 오므라이스는 완전히 사라졌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나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러져있는 배를 어루만지며 사색에 젖었다. 순간 숟가락에 묻어있는 빨간색의 케챱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무슨 느낌이지?'

    뭔가 익숙하면서도 끔찍하리만큼 불쾌한 기억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더러운 안경을 쓴 채로 짙은 안개를 쳐다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느껴졌고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꿈이였던거지."

    어떻게든 기억해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내던 그 순간 익숙한 기계음이 거실에 울렸다.

    "새로운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이메일을 열람해 봐."

    나는 오므라이스 그릇 옆에 놓여있던 차를 집어들며 말했다. 전뇌게임에서 먹는 만찬들도 좋았지만 역시 현실에서의 포만감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였다. 나는 차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이메일을 열람합니다."

    잠깐의 로딩 시간이 지나고 이메일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플레이어 -아레스- 님께.』

    첫 줄을 읽는 순간 난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콜록, 콜록"

    난 사래걸린 사람처럼 연신 기침을 해대며 스크롤을 내렸다. 이메일의 발신자는 아까 전의 이메일과 동일한 [email protected]이였다.

    '베타 테스트의 참여 기한은 오늘까지입니다. 라그니움2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메일의 맨 아래에는 한 사내의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다.

    청록색 군복을 차려입고 궁전의 홀에 서있는 사내.

    그것은 라그니움에서 플레이했던 내 캐릭터의 모습이였다. 상당히 미화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분명히 내 캐릭터, 아레스의 모습이였다.

    하지만 단순히 캡쳐한 장면이 아닌 완전히 새롭게 그린 듯한 그림은 마치 한 장의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보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게 뭐지?'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내가 방금 전까지 플레이 했던 황제의 모습이였다. 하지만 캡슐에는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난 내 플레이 데이터를 인터넷에 공유한 적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MZ에서 내 플레이 데이터를 얻은거지? 게다가 전뇌기술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게임 데이터에서 이미지를 추출하는 기술은 내가 알기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인간의 두뇌는 미지의 영역이였다.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
    다시 봐도 내 게임 속 내 모습 그 자체였다.

    "하..."

    가만히 그림을 감상하던 나는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정도 수준까지 되면 나같은 게임 폐인 한 명을 속이기 위한 스팸 메일이라고 의심하기에는 너무 노력이 대단했다.

    순간 이메일을 캡쳐해서 다시 카페에 올려볼까 생각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청소 로봇이 내 쪽으로 다가와 접시들을 느릿느릿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맨 처음에 MZ에서 왔던 이메일 창을 다시 열었다.


    『플레이어 -아레스- 님께.』

     ─라그니움 히든 엔딩 '인류 제국'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클리어의 보수로 플레이어께는 라그니움2의 베타 테스트 참여 권한이 주어집니다.

       참가할 마음이 있으시다면 동의 버튼을 눌러주세요.

                           [동의]


    그리고 난 잠시 동의 버튼을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응시하다 이내 오른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 띠링하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새로운 메세지가 나타났다.

    '라그니움2 베타 테스트에 참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그니움1을 실행해 주세요.'

    메세지를 본 순간 나는 바로 소파에서 일어섰다. 라그니움은 수 십개의 성공한 전뇌게임들을 만든 MZ의 작품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는 평을 가진 세기의 명작이였다.

    그런 게임의 후속작을 미리 플레이해볼 수 있다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하던 게임폐인이라고 놀리던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대감을 느끼며 나는 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거대한 캡슐은 좁디좁은 내 방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며 그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캡슐의 가운데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눌렀다.

    푸시식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캡슐의 뚜껑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뚜껑이 채 다 올라가기도 전에 나는 캡슐 안으로 내 몸을 있는 힘껏 쑤셔박았다. 눈 앞에 뜬 게임 선택창에는 라그니움 한 개뿐이였다.

    『지난번 게임을 계속하시겠습니까?』

    화면에 떠오른 질문에 난 빛보다 빠른 속도로 클릭하고 아무렇게나 캡슐의 뚜껑을 닫았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 몸을 뒤덮었다.

    『게임을 로딩합니다...』

    눈 앞에 수 백가지의 색깔들이 펼쳐졌다. 캡슐 안은 노란빛, 하얀빛, 붉은빛으로 반짝거리며 빛났다.

    양 옆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고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심장이 점점 느리게 뜨기 시작하면서 캡슐과의 동기화가 시작됐다.

    수 백가지의 색깔들이 마치 물감들처럼 섞여 돌아가더니 이내 칠흑색으로 변했다.

    어둠은 서서히 내게 다가와 내 몸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카매졌다. 



     *  *  *


    "빨리 빨리 움직여!"

    "살고싶으면 빨리 뛰쳐나오는게 좋을거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고함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으으윽..."

    숙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두통이 내 신경을 뒤흔들었다. 내 몸은 마치 구름이라도 타고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양 옆으로 기우뚱거리며 흔들렸다.

    시간이 지날 수록 온 몸에서 점점 더 세차게 울리는 고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눈을 떳지만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 주변을 둘러싼 새카만 어둠만이 보일 뿐이였다.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바로 코를 찌르는 악취였다. 사방에서 풍겨져나오는 상상을 초월한 악취가 콧구멍을 타고 올라와 뇌를 후벼찔렀다.

    "우엑!..커억..."

    나는 쓰려져있던 상태 그대로 속을 게워냈다. 바닥에 쏟아지는 내 구토물이 보이자 그대로 신물이 다시 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나는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입을 움켜잡았다.

    "시발...시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두 팔을 이용해 바닥에서 일어났지만 제대로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생각만이 내 머리를 채웠다.

    나는 입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침을 닦을 새도 없이 질질 흘리며 앞을 향해 움직였다. 한 마리의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오른발을 앞으로 움직인 순간 발에 무언가 미끄러운게 밟히면서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봐 자네, 걸을 수 있겠어?"

    쓰러져 있는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나자신의 신음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물 속에서 죽어가는 문어가 이런 느낌일까. 나는 사방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발악했다.

    "내가 오른팔을 잡을테니깐 자네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마치 반 쯤 고장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 내 양 팔을 잡고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시발, 꺼져!"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내자신이 듣기에도 너무나 미약하고 처량했다. 하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건 사양이었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낸다고 하던가. 나는 젖먹던 힘까지 모두 쥐어짜내며 양 팔을 사방으로 흔들어댔다.

    퍽-

    짧은 충격과 함께 순간 세상이 그대로 멈춰섰다. 눈 앞이 새하얘지고 온 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나는 한 마리의 문어처럼 바닥에서 흐느적거렸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내 양 팔을 잡고 질질 끌고가고 있었다.

    힘겹게 다시 눈을 뜨자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처형대처럼 생긴 거대한 나무 쪼가리와 그 위에 박혀있는 도끼였다.

    도끼날에 묻어있는 누구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태양빛에 선명히 빛났다.

    "제기랄...."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0005 답없는 메아리---------------------------------------------------------



    "죽은거 아니여?"

    "아직 숨은 붙어있어."

    "죽은거 같은디."

    "아니라니깐."

    흐릿한 의식 너머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50대 중년아저씨 같은 중후한 목소리와 마치 어린아이 같이 가벼운 목소리였다.

    계속된 충격에 뒷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더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간격으로 기절했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면서 지금 내가 깨어있는건지 아니면 여전히 꿈을 꾸고있는 건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건가? 몸을 살짝 움직이자 그런 내 생각을 부정하듯 차갑고 딱딱한 바닥의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흩어지려 하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또 기절하는건 사양이었다.

    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된 거지? 눈을 감은 채로 차분히 기억을 더듬자 기억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건 MZ에서 온 이메일을 받고 베타테스트에 참가신청을 한 뒤 캡슐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지금 나는 전뇌게임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마치 꿈의 한 장면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나는 지금 라그니움을 플레이하고 있는건가? 아니면 라그니움 2편의 베타테스트?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봐도 스타트 메뉴는 커녕 선택창 비스무리하게 생긴 것도 본 기억이 없었다.

    똑- 똑-

    순간 얼굴 위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뭔지 모를 액체가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인가? 아니면 피?

    "윽.."

    난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최대한 억눌렀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은 1분도 멈추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현실과 전뇌게임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물론 현실과 전뇌게임 사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차이점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그것은 단연 통각의 정도였다.

    전뇌게임에서도 현실과 동일한 고통을 느끼도록 설정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했지만 그러한 행위는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됐다.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고통은 플레이어의 정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심할 경우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기절 및 쇼크사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캡슐을 해킹해 설정을 조작할 수는 있었지만 기술적으로 너무 복잡해 왠만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대부분의 전뇌게임들에서는 칼에 깊게 베이고 총탄을 맞더라도 살짝 간지러운 느낌을 받는게 고작이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고통은 현실에서도 겪기 힘든 수준이였다.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나고 처음으로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였다.

    바늘 수 십개가 온 몸 구석구석을 궤뚫고 있는 것만 같았고 팔다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이봐, 정신이 드나?"

    아까 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유추해봤을 때 중년의 남성이였다.

    나에게 적대적인 존재인가? 계속 기절해있는 척을 해야하나? 아니면 일어나서 저항해야 하는건가? 저항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여기서 죽으며 메뉴창으로 가는건가?

    가끔 그런 게임들이 있었다. 일부러 플레이어를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던져놓고 죽은 다음부터 본 게임을 시작하는 변태적인 게임들 말이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해봤다. 확실히 지금의 상황은 이상했다. 이 정도의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은 전뇌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게임 개발 도중의 버그나 오류겠지.

    실제로 캡슐에 이상이 생겨 목숨을 잃거나 미쳐버리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엄연히 존재했다.

    개같은 개발자들 같으니라고.

    지금 내가 겪고있는 통증으로 생각해봤을 때 지금 이 상태에서 더 큰 상처를 입었다가는 고작 기절로는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상황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다. 

    차디찬 캡슐 속에서 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게임 폐인을 자부하는 나로서도 전력으로 거부하고 싶은 결말이였다.

    우선은 게임을 정지해야 된다.

    플레이 중에 메뉴창을 여는 방법은 게임마다 달랐지만 로그아웃하는 방법은 모두 똑같았다. 아무리 게임에 심한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한 줄만 외치면 캡슐을 끌 수 있었다. 

    "플레이어 아레스 로그아웃!"

    나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있는 힘껏 외쳤다.

    "시발, 갑자기 뭐야!?"

    게임 상태창 대신 아까 전의 걸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갑작스런 나의 외침에 꽤나 당황한 듯한 어조였다.

    설마....설마....설마 .....설마....

    "플레이어!!! 아레스!!! 로그아웃!!!"

    나는 절박한 마음에 한 마디씩 끊어서 더 크게 소리질렀다.

    "저 새끼 드디어 미친거 아니야?"

    "이봐, 정신차려!"

    누군가 내 몸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쪽팔림과 당혹스러움에 차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우선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해보자.

    로그아웃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로그아웃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로그아웃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좆됐다.


    지금 나는 어딘지 모를 차가운 돌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한테 끌려왔고 그 과정에서 적어도 몇 대는 얻어맞았다. 하지만 저들은 아직 날 죽이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기억들을 조합해 유추해 봤을 때 이곳은 평범한 감옥이거나 변태들이 벌이는 난교파티장, 서비스가 최악인 호텔, 적어도 이 셋 중에 하나였다.


    제발 후자였으면.

    나는 간절히 애원하며 두 눈을 부릅 떳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코 앞에서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슈렉같이 생긴 초록색의 커다란 얼굴이였다.

    "으읍...."

    예상치 못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려던 찰나 우악스런 손바닥이 재빨리 내 입을 막았다.

    그 손의 주인은 회색 죄수복을 입은 오크였다.

    오크가 다른 한쪽 손을 자신의 입술에 갖다대며 중얼거렸다.

    "미안혀이. 간수들이 시끄러운걸 싫어해서 말이여. 힘들어도 조금만 참게."

    군데군데 흉터가 나있는 흉측한 생김새와 다르게 오크의 입에서는 구수한 사투리가 나왔다.

    그리고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냄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개똥과 말똥, 소똥, 돼지똥을 모두 모아서 섞은 다음에 푹 끓이면 이런 냄새가 날까?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과 동시에 한없이 혼미해졌다. 

    "얼굴은 멀쩡한 녀석이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리 된건지, 쯧쯧."

    어지러워하는 나의 표정을 보며 그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 무슨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계속 소리를 질러대더군. 괜찮나?"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를 멍하게 쳐다봤다. 사람말을 하는 오크라니. 라그니움을 여태까지 몇 천 시간은 넘게 플레이했지만 이보다 더 신기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걸로 부족해서 사투리까지 쓰다니.

    몇 년 동안 키우던 강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잔하러 나가자고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참신한 설정인데.'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는 욕 없는 욕을 다하던 게임 개발자들을 향해 칭찬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게임에서의 오크는 당연히 죽여야 할 몬스터에 불과했다. 라그니움에서도 오크라는 생명체는 싸우지 않으면 그저 시끄러운 소리를 지르는 것이 다였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우어어어어어어!' 정도일까나.

    근데 막상 이렇게 사람처럼 평범하게 내게 말을 걸고있는 오크의 모습을 보니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움이 느껴졌다.

    내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오크를 쳐다보자 누군가 옆에서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렸다.

    "너 하나 옮기자고 우리까지 다 죽을 뻔한건 아냐?"

    갑작스레 들리는 굵직한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짧은 키의 임프가 보였다. 붉은 색의 피부에 뾰족한 귀, 납작한 코까지. 정말 임프인건가?

    "됐어, 거기까지만 혀."

    오크가 그만하라는 듯이 커다란 오른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임프는 여전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 거렸다. 턱에 덥수룩하게 달려있는 갈색 수염은 짧은 키에 비해 어찌나 기다란지 허리춤에 닿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역시 회색의 거무직직한 죄수복을 입고있었다.

    "아무리 타노스 광산에 들어오는게 싫어도 그렇게 너처럼 발악을 하는 새끼는 처음 봤다."

    타노스 광산이라고?

    타노스 광산은 라그니움 대륙에서 가장 큰 마석 생산지대였다. 아마 전 대륙 마석 공급량의 70퍼센트 이상을 담당한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런 자잘한 것들까지 알고 있냐고? 왜냐하면 타노스 광산은 라그니움에서 전쟁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였다.나같은 라그니움 폐인이 그런 것을 모를리 만무했다.

    근데 내가 지금 그 타노스 광산에 있다고?

    나는 그에게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켁, 켁,하고 염소 울음소리를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크가 그런 나를 보고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말했다.

    "일단은 좀 더 쉬는게 나을거여. 당장 내일부터 갱도에 들어가야할테니."

    오크의 말에 임프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우린 이제 좆됐다."

    "그나저나 자네 다크 엘프치고는 피부가 좀 허연 것 같은데 혹시 혼혈인가?"

    오크가 나를 쳐다보며 생뚱맞게 말했다.

    엘프? 혼혈?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바라봤다. 거무죽죽한 색깔의 거친 살갗. 누가봐도 마족의 피부였다.

    혹시 이게 내 손인가?

    캐릭터 생성창을 봤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아니, 여태까지 그 어떤 상태창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내 남은 체력을 알려주는 체력칸이나 마나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진짜 게임을 하고있는건가?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잠시 두 손을 쳐다보다 이내 머리를 감방의 벽에 기대며 생각했다.

    진짜 좆됐다.




     *  *  *  *  *  *  *  *  *  *  *  *  *


    -타노스 지역 총독실-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탈주를 시도한 죄수들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까지도 처형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린힐은 이제 막 12살이 된 앳된 소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돌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오크 새끼다, 그린힐. 자식이 아니라 새끼야."

    그린힐의 아버지이자 타노스 광산의 총책임자인 롬든 총독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생에서 뛰어놀던 개를 길들이는데 자그마치 몇 천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오크들도 마찬가지야. 반항성 높은 놈들이 반항성 높은 자식을 낳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이곳의 총독으로서 불안의 씨앗을 미리 잘라내는 것은 이 애비가 가진 의무다."

    "하지만..."

    그린힐은 아버지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오크에 대한 개념은 그로써는 이해할 수조차 할 수 없는 부분이였다.

    수 십 명의 죄없는 오크 아이들을 학살하는 것이 썩은 가지를 치는 것과 똑같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는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슬슬 교양수업을 받으러 갈 시간 아니더냐. 어서 가거라."

    "아직..."

    "난 네가 그런 약해빠진 소리나 하라고 이런 변방에서 수 백 마르크를 써가며 너를 교육시키는게 아니다, 그린힐! 너에게는 장차 우리 가문을 이어나가야하는 의무가 있단 사실을 항상 명심하거라."

    "알겠습니다."

    그린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총독실의 문을 열고 나오며 그는 다짐했다.

    자신이 가문의 가주가 되면 결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소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발걸음을 옮겼다.




    0006 감옥---------------------------------------------------------------------------------------------------------------------------------------------------------


    카앙-

    카앙-


    곡괭이를 힘차게 내려칠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 소리가 갱도에 울려퍼졌다. 이제 슬슬 휴식시간이 됐을 텐데.

    나는 다시 천천히 팔을 올렸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작업을 멈추고 호루라기 소리가 또한번 들리면 다시 열심히 돌을 내려칠 뿐이였다.

    슬슬 배고파 견디기 힘들 때가 되면 잔뜩 쪼그라든 빵이 한 덩어리씩 나왔고 운 좋으면 간수들 몰래 두 덩어리도 먹을 수 있었다.

    간수들이 빵을 배급할 때 몰래 뒤에서 빵 몇 개 더 집어먹는 것이 요즘 내 삶의 유일한 낙이였다.

    배급으로 나오는 빵을 통해 허기는 겨우 채울 수 있었지만 마치 흙 덩어리를 씹는 것만 같은 식감은 몇 번을 먹어도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마 진짜 흙으로 만들겠지.

    언젠가 한 번 티비 다큐에서 진흙으로 만든 쿠키를 먹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모습을 본 적 있었다.

    적어도 그 쿠키는 이곳 빵보다 먹음직스럽게 생겼었다.

    나는 이런저런 잡생각을 계속하며 곡괭이를 휘둘렀다.

    아흔둘

    아흔셋

    아흔넷

    백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던가. 미동도 하지않던 돌덩어리가 이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노동자의 보람이라는게 바로 이런걸까.

    나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등으로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하지만 떨어진 돌덩어리를 집어들자 곧장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이 몰려왔다.

    한 눈에 봐도 마력의 순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5등급 정도의 싸구려 마석이였다.

    물론 순도가 낮은 마석이라도 여러 개가 모이면 상당한 마력을 낼 수 있었지만 아무리 많이 모은다 하더라도 순수한 1,2등급의 마석이 지닌 힘과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몇 십분 동안 죽어라 이쪽만 캣는데 겨우 이따위 쓰레기가 나오다니.

    "하아..."

    오른손에 들려있는 돌덩어리를 쳐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던 그 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쪽 라인은 오늘 왜 이렇게 작업이 더디어! 쉬기 싫은가 보지?"

    간수들이였다. 광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갱도는 무척이나 불안정했고 천장이 무너지면서 수 십명이 한꺼분에 매몰되는 일도 몇 일 동안 비일비재했다.

    물론 매몰된 자들을 구출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 옆에 새로운 갱도를 뚫고 새로운 죄수들을 집어넣을 뿐이였다.

    따라서 간수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갱도의 바깥 쪽에 서서 안쪽으로 하루종일 시끄럽게 고함만 쳐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덕에 적어도 갱도 안에서는 채찍 맞을 일이 없었다. 

    물론 하루에 할당된 생산량을 채우지 못한다면 잠자는 시간조차 포기해야 했지만 말이다. 

    내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눈을 뜨고 몇 일이 지난걸까?

    가상의 게임 속에 갇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영화와 만화의 주인공들이 겪는 흔하디 흔한 설정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뇌게임을 구동하는 캡슐에는 홍채인식, 목소리인식, 암호입력까지 총 삼중의 로그인 과정으로 부족해 다섯 종류가 넘는 안전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외부에서의 해킹을 우려해 인터넷 접속도 차단되어 있었다.

    그 어떤 조작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완전한 오프라인 전용 머신이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은 도대체 뭘까? 나는 적어도 지난 몇 일을 이 곳 갱도에서 하릴없이 광석을 캐며 보냈다.

    그동안 취침시간이 다섯번 정도 있었으니 최소 5일에서 6일은 지났을 터였다. 게임에서의 하루는 현실에서 한 시간 정도였으니 게임을 실행하고 다섯 시간 정도는 지난 것이었다.

    포비나 이웃들이 이상함을 느끼기에는 아직 짧은 시간이였다. 이론적으로는 산소만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면 캡슐 안에서 무한히 있을 수 있었다.

     물론 캡슐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안전장치가 300시간이 넘어가기 전에 자동으로 게임을 종료시키지만 아직 그럴려면 게임 상으로 295일이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멍 때리지 말고 빨리 작업해. 이러다가 우리 라인이 본보기로 처형당할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내 등을 세차게 두들기며 말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임프인 르메레였다.

    몇 일 같이 살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까칠했던 첫 인상과 다르게 그는 외외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물론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캐나 했더니 고작 5등급짜리 마석이였냐? 너도 참 답이 없다."

    "제발 좀 닥쳐주세요."

    입은 거침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음은 착하겠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부글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르메르는 자신이 도적들에게 무기를 팔았다는 이유로 이곳에 끌려왔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무기를 도적들에게 팔았다기보다는 강제로 빼앗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지만 실적에 눈이 먼 재판관에게 그런 자잘한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려도 아가 나름 열심히 캔건디 너무 그러지 말어."

    조장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르메르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오크인 그는 내가 속해있는 이 곳 5번 갱도의 조장이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자신을 이 곳 광산의 토박이라고 소개한 그는 탁월한 실력을 지닌 광부였다.

    "그냥 조장이라고 부르면 되잖혀."

    이름을 물을 때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멋쩍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내가 그와 친해지고 나서 가장 크게 놀랐던 점은 그가 오크치고는 별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오크들은 싸움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싸움은 삶, 그 자체였다.

    어린 오크들은 한 명이 기절하거나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 하루일과였고 오크 성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조장을 제외한 이곳 갱도의 다른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말싸움에도 오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사고로 죽은 오크의 숫자보다 격렬한 싸움 도중에 죽는 오크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구먼."

    그가 내 손에 있는 돌덩어리를 슬며시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이 사람들이 진짜.

    "농땡이는 안 치니 뭐라 말은 않겄지만 다음부터는 좀 더 큰 걸 노려보라고."

    "네네, 알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있는 힘껏 곡괭이를 쥐어잡았다. 다른 광석 하나를 캐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처음에 일어났을 때 몸에 나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엘프 특유의 치유력 덕분인지 몇 일 동안 거의 나았지만 부실한 영양 공급과 억소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의 노동량에 몸상태는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나으리, 저는 아직 일할 수 있습니다!"

    드워프 한 명이 간수들에 의해 갱도 밖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병에 걸리거나 기력이 다해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된 자들은 저렇게 모두 간수들에게 끌려갔다.

    치료를 위해서라고 간수들은 말했지만 저렇게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당장 내일 갱도가 무너져 흙더미에 깔려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고 운좋게 이곳에서 몇 년 버틴다 하더라도 몸 성히 이 곳을 빠져나가기는 요원했다.

    게다가 게임 속에서 너무 오랜 시간동안 머물렀다가는 현실에 있는 내 몸에 뭔가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벌써 생긴 것 같고.'

    그냥 지금 사방에 널려있는 돌덩어리들 중 적당한걸 하나 골라 머리를 있는힘껏 내리치면 게임의 메뉴창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통각 시스템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것이 확실한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 통증을 받으면 그대로 쇼크사할 수도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의 곡괭이질 동안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타노스 광산에는 세 겹의 성벽으로....'

    '여태까지 본 경비병의 숫자는 대략...'

    '필요한 마석의 수는...'

    '모든 것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한 가지 생각 뒤에 또다른 생각이 맞물리면서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계획이 구성됐다. 몇 시간 후 휴식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자 난 르메르와 조장에게 살짝 고개짓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우리의 셋 사이의 신호였다.

    갱도 구석에 세 명 모두 모이자 나는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한 달."

    "?"

    "?"

    갑자기 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의 르메르와 조장을 쳐다보며 나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지금부터 한 달 안에 우리는 이 곳에서 빠져나갑니다."







    0007 실패의 방정식--------------------------------------------------------------------




    타노스 광산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채나 다름없었다. 

    라그니움의 세계관 속에서 타노스 광산의 순도 높은 마석들은 단 몇 개만으로도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만큼 강력한 전략적 자원이였고 광산의 소유권을 두고 지난 수 세기 동안 끊임없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내가 라그니움을 플레이할 때 이 광산의 주인은 탈로스라는 이름의 오크와 그가 이끌던 마족 군벌집단이였다.

    탈로스는 노예출신의 한낱 도적왕에 불과했으나 독창적인 전술과 용병술로 그 당시 광산을 점령하고 있던 왕국 수비대를 물리쳤다. 

    광산을 손에 넣은 그는 상당한 양의 보수로 주변 고블린 부족들을 유혹해 광산에서 일하게 했고 막강한 재력을 이용해 광산 주변에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무식한 오랑캐 무리로 여겼던 탈로스가 점차 힘을 불려가자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진 길로스 제국은 오크인 그에게 변방의 수호자라는 고위 직책을 내려주고 세금을 일정 부분 면제해주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보였다.

    하지만 탈로스는 변방의 수호자라는 직책이 무색할 정도로 마치 황제처럼 타노스 광산과 그 인근 마을들 위에 군림했으며 돈을 위해서라면 마족뿐만이 아닌 인간들과 엘프들에게도 마석을 판매했다.

    또한 그는 종족이 오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탁월한 외교술로 전 대륙의 마석 공급량을 배후에서 교묘히 조절하며 유일한 마석 판매자로써의 입지를 다졌다.

    수 만 마리의 고블린들이 365일 하루도 쉴 틈 없이 고품질의 마석들을 쏟아냈고 풍부한 재원을 바탕으로 구성된 그의 군세는 한 때 마족왕 직속의 카디아 근위대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위세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유성에서 대량의 마력을 채취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대륙 곳곳에서 새로운 마석 광산들이 발견됨에 따라 탈로스는 점차 대륙 유일의 마석 공급자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끝내 그가 자랑하던 용병집단에서 대규모 내전이 일어나면서 패망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세운 광산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궁전과 각종 수비시설들을 세워진지 수 백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웅장한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당시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 설치됐던 성벽과 수 십개의 감시탑들은 이제 거꾸로 안쪽에 있는 우리들의 탈출을 봉쇄하고 있었다.

    광산은 총 세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꺼운 성벽들 사이로는 거대한 숲 지대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포위되더라도 자체적으로 식량 및 식수 공급이 가능했다.  

    따라서 광산을 점령하는 유일한 방법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점해 적이 재정비할 틈을 주지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무식한 방법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내가 그렇게 이곳을 점령했었고.

    "수 백명이 첫번째 성벽도 통과 못하고 죽었어. 게다가 너나 나면 몰라도 코끼리만한 조장이 어떻게 한 번도 안 걸리고 저 높다란 성벽을 건너냐."

    르메르가 습관적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수비를 목적으로 세워진 성벽이였기 때문에 가장 안 쪽에 있는 세 번째 성벽의 높이가 가장 높았다. 게다가 그뿐만 아니라 수 백명의 경비병들이 성벽 위에서 24시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성벽과 광산 안쪽을 감시하고 있었다.

    "차라리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는게 낫겄는디."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조장의 말에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땅굴을 파는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요. 다른 죄수들이나 간수들이 눈치챌 가능성이 큽니다."

    그뿐만 아니라 땅굴을 파는데는 상당한 인력이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탈출 인원은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였다. 계획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어날수록 작전이 발각되거나 누설될 가능성 또한 그에 비례해 높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일 동안 같이 지내본 결과 르메르와 조장은 믿을만한 사람들이었고 내 계획에 필수적이였기 때문에 나는 우선 그들을 내 탈출계획에 포함시켰다.

    르메르는 순하디 순한 시골 출신의 임프였고 조장은 그냥 어디를 가도 있을법한 동네 아저씨 포지션의 오크였다. 물론 조장은 갱도에서 태어나 자란만큼 몇몇 동료들을 계획에 참가시키고 싶어했지만 나의 격렬한 반대에 결국 무산됐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거여?"

    내 대답에 조장이 무안하다는 듯이 뒷목을 긁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대답했다.  

    "폭동을 일으킬겁니다."

    "폭동?!"

    예상치 못한 대답이였다는 듯이 르메르가 되물었다.

    "네, 그것도 타노스 광산의 모든 경비병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큰 폭동을 일으킬겁니다."

    "우리 세 명으로 어떻게 큰 폭동을 일으킨다는거여?"

    이번에는 조장이 물었다. 비꼬는 것이 아닌 진짜 궁금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저는 우리 세 명이서 폭동을 일으킬거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만."

    "그러면? 우리말고 몇 명 더있는거여?"

    "갱도가 총 60개 정도 있고 한 갱도에 백 명씩 있으니 대략 6천 명이네요."

    한 마디로 광산에 있는 죄수들 전부였다. 르메르가 내 말을 듣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갱도에 있는 사람들이랑은 만날 수도 없는데 어떻게 같이 폭동을 일으키겠다는거야."

    내가 생각할 때 탈옥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최대한 들키지 않게 몰래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성대한 난장판을 벌이고 감옥을 산산조각내는 거였다.

    그 중에서 내가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타노스 광산의 수비시설은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이곳을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에 수렴했다.

    게다가 시간을 질질 끌면 끌수록 걸릴 확률은 더 높아졌다. 오히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부분을 과감하게 한 번에 후벼파는게 훨씬 더 합리적인 선택이였다.

    "미리 입을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적절한 상황만 갖춰진다면 말이죠."

    나는 잠시 심호흡 한 뒤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어느날 갑자기 감옥문이 열리고 네 개의 성문이 모두 활짝 열리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다들 먼저 빠져나갈려고 난리를 치겠지."

    르메르가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성문을 연다는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들 중 하나를 주웠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눈으로 한 번 보는게 더 빠를 때가 있었다.

    마력이 거의 없어 창고로 가져가지도 않은 마석이였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이들에게 보여줘던 되는 것일까? 지난 몇 일 동안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고작 몇 일로 한 사람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내 계획이 들통나면 그 때는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광산에서 빠져나가면 그만이였다.

    난 천천히 심호흡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 짓도 안한지 오래됐지만 아직 선명히 기억났다.

    "Ibi fuerit lightr"

    내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돌이 환하게 빛났다.

    마력을 불태워 빛을 밝히는 초보자 수준의 마법이였다.

    잠시 아무런 말 없이 마석을 쳐다보던 둘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동시에 소리쳤다.



    "마법?!"






     *  *  *  *  *  *  *  *  *  *  *  *  *





    "그 후에 발표된 아레스 초대 황제폐하의 칙령으로 마족들의 마력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모든 마족의 마법사들은 처형당했습니다."

    "하아.."

    계속해서 이어지는 선생의 말에 그린힐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불공평했다. 물론 마족들은 몇 백년 동안 인간들의 국가를 침공하고 약탈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똑같은 운명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마족과 인간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한걸까? 소년은 기지개를 피며 생각했다.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조롱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이 백년 후에 벌어진 마법사의 반역으로 마법의 사용과 교육이 일체 금지되면서...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선생이 그린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역사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도련님."

    드디어 끝났다. 소년은 속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수업실의 문이 열리며 커다란 안경을 쓴 중년의 여성이 들어왔다.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였다.

    "교양수업 시간입니다, 도련님."

    아, 제발.











    0008 시작의 시작--------------------------------------------------------------------





    "아니, 그런데 말이여, 그 새끼가 멋도 모르고 이 몸한테..."

    "조장, 헛소리 좀 그만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르메르와 조장 사이에서 난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Non erit explodere."

    이것이 우리 셋의 하루일과였다. 르메르와 조장 둘이 시끄럽게 떠들며 다른 죄수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사이, 난 최대한 빠르게 주문을 마저 끝낸다. 이런 하루가 벌써 몇 십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수백개의 마석들에 주입한 주문은 마석 내부에 있는 마력을 폭파시키는 일종의 폭렬 주문이었다. 주문이 주입된 마석이 순간 붉게 빛나더니 이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둘에게 작업이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하, 오늘은 그 정도로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요."

    말한 나자신이 들어도 심각하게 어색한 교과서 읽는 수준의 연기였다. 수많은 전뇌게임들을 플레이하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황들을 겪어봤지만 아직도 거짓말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무기없이 오우거 수 십마리랑 쌈박질해서 이기는게 내가 연기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겠지.'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 르메르가 레버를 당기며 내게 오른쪽 눈을 찡긋했다. 윙크를 얼마나 세게 하는지 내가 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알았어, 이거 카트만 보내고."

    잠시 후 마석이 가득 실린 카트가 덜컹거리며 레일을 따라 갱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카트의 맨 위에는 내가 방금전까지 들고있던 돌멩이가 올려져있었다.

    카트가 저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한 우리 셋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일주일 동안 같은 작업을 수 십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몇 일만 더 있으면 이  갱도에서 나갈 수 있다. 

    나는 기분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갱도 밖으로 나가는 르메르와 조장을 따라나갔다.

    "원래 마법이란게 이렇게 금방 되는거여?"

    조장이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차라리 그냥 말하는게 덜 수상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다행히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요. 내가 대단한거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쉬웠으면 내가 마법사로만 플레이했겠지.

    나는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얼얼해진 손바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38번.

    난 라그니움을 정확히 38번 클리어했다. 플레이 도중에 게임오버한 적은 그보다 몇 십배는 많았다.

    한때는 암살자 길드를 손아귀에 넣어 뒷세계의 큰형님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고 시장 잡부로 시작해 전 대륙을 아우르는 모험 상인 조합을 창설한 적도 있었다. 

    마법사로 플레이한 횟수는 5번 정도? 상인이나 의사같이 마이너한 클래스보다는 확실히 플레이 횟수가 더 많은 편이였다.

    다섯번 정도 플레이하면서 느낀거지만 나는 마법사 클래스랑 나름 잘 맞았다. 

    마법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상대방을 압도하는 마력? 아니면 메테오 같은 강력한 마법스킬? 내게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 영창에 소요되는 시간의 단축과 마력 사용의 효율화가 모법적인 답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핵폭탄의 위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실전에서는 평범한 파이어볼보다 못한 것이었다.

    메테오 같은 최상위 마법은 한 번 사용하는데 어마어마한 수준의 마력을 소비했고 몇 십 만이 넘어가는 대군을 상대하는 것과 같이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중위권 마법들에 비해 비효율적이였다.

    겉보기만 멋있지 정작 실속은 떨어지는 그런 보여주기용 마법보다는 별로 화려하지 않아도 실전에서 도움이 되는 마법들을 손에 익히게 하는 것이 훨씬 유용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마법사들이 메테오 주문 하나를 가지고 죽어라 공부할 때 옆에서 파이어볼 빨리 쏘는 연습을 했다. 그 때는 라그니움 팬카페를 돌아다니며 수 백개에 달하는 모든 마법 주문들을 외우고 또 외우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원래 플레이어는 일일이 주문을 영창할 필요 없이 스킬창에서 마법을 선택해 바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난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뭔 뜻인지도 모르는 마법주문들을 죄다 외운 둘째가라면 서러울 폐인 중의 폐인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덕을 톡톡이 보고 있었다.

    "Sanitatem"

    양 손에 정신을 집중하고 치료주문을 외우자 하얀 빛이 손을 휘감았다. 최하위급 마법이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몇 초가 지나자 얼얼하던 손바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졌다.

    뎅-

    뎅-

    하루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광산에 울려퍼졌다. 해가 천천히 지며 주홍 빛깔의 햇살이 광산을 비췄다. 나와 르메르, 그리고 조장. 이렇게 우리 셋은 배정된 작업량을 겨우 마치고 감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한테 폭탄 하나만 있어도 여기를 다 날려버렸을텐데."

    르메르가 자그마한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종족적인 특성일까. 임프는 대게 폭탄이나 폭죽같이 펑펑 터지는걸 좋아한다고 알려져있었다. 따라서 임프들 중 대다수는 불을 다루는 대장장이나 폭탄 제조를 생업으로 삼았다. 르메르가 혼자 씩씩거리더니 이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아직도 자기 이름 하나 기억 못하는거야?"

    "글쎄요.."

    이 캐릭터 설정을 내가 직접 한게 아닌 이상 내 캐릭터가 어쩌다 여기 타노스 광산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이 몸에 대해 아는건 종족이 다크엘프라는 것과 다른 평범한 다크엘프들보다 마나 양이 조금 더 많다는 것? 그 정도가 다였다. 몇 살인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나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서 이름도 없이 사는건 역시 좀 이상했다.

    '그냥 현실 이름을 말해줄까?'

    괜히 있어보이는 이름을 지으려하는 것보다 그냥 원래 이름을 말해주는게 훨씬 편할 것 같았다.

    "김현진은 어때요?"

    "기임혀온~ 뭐라고?"

    조장이 혀를 굴려가며 되물었다.

    "하아....됐어요."

    나는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한국식 이름은 판타지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발음이 어려울 것 같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수 천 마리의 오크, 드워프, 엘프, 고블린들이 갱도에서 나와 자신들의 감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맨 처음에 나는 어째서 마족을 이런 갱도 작업에 강제로 투입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장 마법 숙련도가 떨어진다는 오크 주술사조차도 기본적인 폭렬 마법은 다룰 줄 알았다.

    그리고 마석은 그 자체가 인화성이 매우 높은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높은 보수를 주며 고용하기는 커녕 채찍을 휘두르며 노역을 시킨다?

    마력을 제대로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광산이 통째로 날라갈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마석을 생산하는 광산에서는 보통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지능이 떨어지고 체내에 마력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고블린들을 고용하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이였다.

    하지만 지금 이 광산에는 늑대인간이나 오우거 같이 일 년에 한 두번 볼까말까한 희귀한 마족들까지 죄다 끌려와 마석 채취에 강제로 동원되고 있었다.

    근데 왜 한 번도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걸까? 나는 몇 일 후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자가 이제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플레이했던 라그니움의 세계였다. 내가 아레스로 게임을 클리어하고 인류제국을 건국한 시점으로부터 최소 몇 백 년은 흘러있었고 현재 대부분의 마족들은 이 광산의 죄수들처럼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있었다.

    재물의 소유 및 이동의 자유는 엄격히 금지됐고 그들의 목숨은 이제 영주들의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르메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변방에 위치해 제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도시가 몇 개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심지어 그곳들에서조차도 마족들은 여전히 하위 계층이였다.

    그들의 과거는 모두 불태워졌고 온갖 마법의 정수가 담겨있는 마도서 또한 파괴되거나 제국에 약탈당했다. 인간 마법사들은 전쟁을 통해 새롭게 얻은 마법기술과 마도서들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고 이전에 없었던 마법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마법으로 농사를 하고 건물을 지었으며 사람과 거의 동일한 모습의 인형을 만들어냈다. 점차 오만해진 몇몇 고위 마법사들은 추종자들을 규합해 자신들을 인간계에 내려온 새로운 신이라고 말하며 역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이 배신해 황제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렸고 이들은 반역을 일으키기도 전에 모두 체포돼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 후로 제국에서는 종족에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마법이 금지됐다. 사회 전체에 퍼져있던 마법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지만 제국사 최초의 반역으로 인해 마법을 향한 제국의 증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법의 명맥이 거의 끊긴 상태였다.

    수 천 마리의 마족들을 이렇게 마석이 넘쳐나는 광산에 아무렇게나 넣어놨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마법을 사용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했다.

    나에게 있어서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이제 마법을 사용할줄 아는 몇 안되는 능력자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째서 제국에서는 총독까지 파견해가며 마석을 채취하는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일주일 남았네."

    감방이 점점 가까워지자 르메르가 내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딱딱한 어조에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키가 작은 임프라 그런지 역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얼굴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르메르와 눈을 맞췄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괜한 긴장도 풀어줄겸 장난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설마 긴장되는거에요?"

    "다..당연히 긴장되지! 너야 죽어도 그리워해줄 사람 한 명 없겠지만 내겐 딸린 처자식만 해도 셋이 넘는다고."

    르메르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왜 너같은 놈한테도 짝이 있는데 나한테는 짝이 없는거여."

    조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크한테도 수컷 암컷이라는 구별이 있었나?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에는 뭔가 좀 그랬다.

    우리는 서로 티격 태격거리며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  *  *  *  *  *  *  *  *  *




    "그가 왔다."


    수 십 년만에 내려온 계시는 단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 한 마디에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누군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라니 혹시 예언서에 적혀있는 복수하는 자를 의미하는건가?"

    "예언서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네."

    "어디서 함부로 신성한 예언서를 모독하는건가!"

    "내 말이 틀렸는가!"

    조용하던 회의실은 순식간에 고성과 함성으로 가득 찼다.

    "지금 제국의 재정상황은 다들 아시다시피 최악의 상황입니다. 지금 농민들을 징병했다가는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가만히 앉아서 놈들이 오기를 기다리란 말인가!"

    고성이 오가던 그 때 아무 말 없이 테이블의 정중앙에 앉아있던 한 사내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지며 흥분에 찬 숨소리만이 들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다들 숨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시 전쟁에 나설 때가 왔다는 것이다."







    0009 결전의 날-------------------------------------------------------------------



    "이 자가 확실한가?"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정자로서 네가 가진 의무를 잊지말도록."

    여자가 다시 한 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쳐다봤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광활한 라그니움 대륙이 마치 지도의 한부분처럼 펼쳐져 있었다. 



     *  *  *  *  *  *  *  *  *  *  *  *  *




    "너 그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여?"

    "조장 제발 소리 좀 낮춰요."

    르메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갱도 구석에는 우리 세 명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같은 갱도에서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남정네 셋이서 갱도 구석에서 매일 '이상한 짓'을 한다고 소문이 나있었고 그 덕에 이쪽은 우리만의 아지트나 다름없었다.

    "이 곳을 빠져나가면 어떻게 할건데요?"

    나는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있는 조장에게 물었다. 조장이 그렇게 화난 모습을 보는건 이 곳에서 깨어나고 처음 있는 일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조장의 오크 얼굴을 여전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야 북부에 있는 자유도시로 도망쳐야지."

    "거기까지 어떻게 갈건데요? 맨 발로 걸어서?"

    "그건..."

    내 다그침에 조장은 우물쭈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우리는 죄수의 몸이였고 가진거라고는 초라한 죄수복과 몸뚱아리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타노스 광산 주변은 사막지대나 다름없었고 여기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치더라도 우리는 추적대와 허기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다. 여기서 내가 제안한 것은 바로 총독실을 터는 것이였다.

    타노스 광산에서 빠져나가는 것 자체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수 천 명의 마족들이 캐낸 마석들은 매일 오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카트에 실려 밖으로 운송됐다.

    마석들이 전부 어디에 저장되는지 간수들이 말해줄리 없었지만 광산의 가운데쪽으로 이어진 수 십개의 레일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마석을 저장해두는 창고가 한 곳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였다.

    앞서 말했듯이 마석은 기본적으로 화약이 가득 담겨있는 주머니와 같았다. 그리고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르메르와 조장, 이 두 명과 함께 준비한 것은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과정이였다.

    창고로 가는 수 백개의 마석들을 하나씩 붙잡고 일일이 주문을 불어넣을 필요는 없었다. 아주 작은 돌멩이 몇 개만 폭파시키는데 성공해도 연쇄작용으로 주변에 있는 마석들을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었다. 마석은 그 특징상 인화성이 매우 높았다.

    그 때 생기는 혼란을 틈타 죄수들을 해방시키고 재빠르게 광산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내가 세운 계획이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혼란을 틈타서 총독실에 잠입하는데만 성공한다면 그 안에 있을 총독의 재산도 두둑히 챙길 수 있었다. 아무런 돈 없이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가는데 성공하더라도 굶어죽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탈출한 죄수인게 들통나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가기 전에 최대한 챙길 수 있는건 챙겨야 했다. 물론 반쯤은 미친 계획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르메르와 조장은 완전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마석이라도 팔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갱도 구석에 굴러다니는 마석 조각들을 보며 생각했다.

    라그니움에서 마력이 작용하는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보통 다른 판타지 게임에서는 플레이어 개인의 마력이 마법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스탯으로 작용했지만 라그니움에서는 그와 정반대였다.

    이 곳에서 모든 마력의 원천은 바로 마석이였다. 담배에 불 한 번 붙이는 것조차도 마석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마력이라 함은 곧 생명력 그 자체. 길가에서 자라고 있는 한 송이의 꽃조차도 그 속에는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석의 힘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체내에 내재되어 있는 마력을 이용해야 했다.

    마석의 도움 없이도 상처치료 같은 하위계 순환마법은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체내에 있는 마력은 마석과 비교하면 한줌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행위는 자신의 생명력을 빠르게 소모하는 자살행위였다.

    마력을 물로 비교하자면 웅덩이, 즉 마석에 고여있는 물을 끌어낸 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바꾸는 것이 바로 마법사가 가진 역할이였다.

    "그닝께 내 말은 네가 어떻게 혼자 총독실에...."

    "이봐, 거기 안쪽에서 뭐하는거야? 빨리 나오지 못해!"

    "아..알겠습니다!"

    갑자기 들리는 간수의 외침에 조장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이게 좋은 생각인 것 같지는 않지만 널 한 번 믿어볼게, 검둥이."

    르메르가 내 다리에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게임의 캐릭터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진지한 그의 표정에 내 들뜬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카트는 모두 준비됐어, 신호만 보내."

    "알겠습니다."

    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갱도를 나오자 환한 햇살에 순간 눈을 제대로 뜬 수 없었다.

    "곧 있으면 처형식이 열린다!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간수들이 갱도와 감방들을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처형식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타노스 광산 유일의 이벤트였다. 도망치려다 잡힌 죄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공개적으로 광장 한가운데서 처형당했다.

    수 천 명의 마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집행관의 도끼날이 빛을 내며 머리를 베었고 어린아이, 노인 구별할 것 없이 최소 수 십의 마족들이 매번 목숨을 잃었다.

    모든 마족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성벽 위로 수 백 명의 경비병들이 우리 쪽을 응시하고 있었고 집행대 쪽에도 수 십 명의 경비병들이 보였다.

    꿀꺽-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긴장감에 나는 침을 삼켰다. 몇 주 동안 기다려왔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니 불안해 죽을 것만 같았다. 혹시 폭발력이 부족한건 아닌가. 중간에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들이 머리를 뒤덮었다.

    "이 죄수들은 감히 제국에서 주어진 신성한 의무를 더럽히고 탈주를 감행해 죄질이 무척이나 나쁘며...."

    경비대장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이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선처를!"

    수 십명의 마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자비를 울부짖었지만 말을 끝낸 경비대장은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집행관에게 처형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광장에 모여있는 수 천 명의 마족들은 집행관이 도끼를 집어드는 모습을 아무런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광장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지금이다.'

    하늘로 치켜든 도끼날이 마족 어린아이의 머리를 박살내기 직전 난 재빨리 주문을 속삭였다.

    "futurum veniet."

    처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작은 미풍이 몸을 간지럽혔을 뿐이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 미풍이 단순한 충격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콰콰콰쾅!-

    수 백개의 폭죽이 눈 앞에서 터지는 것만 같은 굉음이 광산을 뒤덮었다. 마석저장창고는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폭발의 충격은 광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집행관의 뚱뚱한 몸이 폭발의 충격에 기울며 그가 휘두르던 거대한 도끼가 옆에 서있던 애꿏은 경비병의 몸을 갈랐다. 순식간에 두 동강 난 몸은 처형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쿠쿠쿠쿵-

    창고에 들어있던 으스러진 마석 덩어리와 파편들이 폭발의 영향으로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날라왔다. 하지만 광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갑작스런 혼란에 당황해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나는 혼란을 틈타 재빨리 내 옆에 서있던 다른 오크 뒤로 몸을 숨겼다. 크고 작은 파편들이 떨어지며 군중을 덮쳤다. 

    "으아아악."

    "내 다리!"

    파편조각 몇 개가 오크의 몸을 관통해 내 몸에 부딪쳤지만 다행히 깊숙이 박히지는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어깨에 살짝 박혀있는 파편을 빼냈다.

    광장은 순식간에 마족들과 경비병들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고블린들은 꽥꽥거리며 사방으로 도망쳤고 오크들과 오우거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자기 앞에 있는 마족들을 때려눕혔다. 평소와 같이 진행되던 처형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난장판 속에서 한 오크가 뛰쳐나와 집행대 쪽으로 달려나갔다. 조장이였다.

    "으아아!"

    그가 함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휘두르자 당황하며 서있던 집행관의 머리가 그대로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그것을 신호로 수 천 명의 마족들을 자신의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을 향해 일제히 돌진했다. 조장의 주먹질은 곧이어 펼쳐질 광기의 서막이였다. 

    평소에 경비들과 간수들에게 쌓여있던 분노가 일순간에 터져나가면서 폭동은 산불처럼 빠르게 마족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상황을 얼마나 유지시킬 수 있느냐였다. 아직 폭발하지 않은 마석이 몇 개 남아있었는지 작은 폭발음이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몇몇은 혼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였다. 나는 커다란 오우거의 머리를 받침대 삼아 점프해 허공을 날랐다. 몇 명의 머리를 더 밟으며 점프하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방금전까지 있었던 5번 갱도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나는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게 갱도 속으로 들어갔다. 미로같이 복잡한 갱도 속에서 몇 번이나 헤맨 후 나는 마침내 미리 준비해둔 카트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나와 르메르 그리고 조장까지, 우리 세 명이 지난 몇 주에 걸쳐 갱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세 개의 카트에는 강력한 마석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각각 북문, 서문, 동문을 부수는데 사용할 목적이였다.

    나는 마석들에 새겨져있는 주문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맨 뒤에 있는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끄으으응-"

    팔이 끊어질 것만 같은 통증이였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카트를 밀었다. 카트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더니 뭔가에 걸렸는지 그대로 멈춰섰다.

    "으아아아 제발!"

    그 때 갑자기 꿈쩍도 하지 않던 카트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을 돌아보자 어느새 조장과 르메르가 카트를 함께 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나는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한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미안혀, 워낙 덩치 큰 놈들이 많아가지고."

    "나도 마찬가지야!"

    셋이 함께 밀자 카트 세 개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카트들에 점차 가속도가 붙으며 빨리 움직이기 시작하자 난 맨 앞에 있는 카트를 향해 뛰어가며 뒤에 있는 둘에게 소리쳤다.

    "저먼저 가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분 안에는 각자 맡은 성문까지 가야되요!"

    "알겠어!"

    혼란을 최대화할뿐만 아니라 추적대를 효과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세 개의 성문을 모두 한꺼분에 폭파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

    이제부터는 각자 제시간안에 성문에 도달하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거기 누구냐!"

    그 때 카트 소리를 듣고 온 경비병 둘이 갱도의 입구로 접근했다.

    나는 대답대신 카트 맨 위에 있던 마석 두 개를 그들을 향해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CREPITUS!"

    둘을 향해 날라가던 마석들이 공중에서 환한 불빛과 함께 폭발했다. 터져나간 경비병들의 내장과 핏물이 갱도 곳곳에 널부러졌다.

    이제 시작이다.

     








    혼란 ----------------------------------------------------------------------------





    "으아아아!"



    난 젖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내며 카트를 앞으로 밀었다. 카트가 덜컹거릴 때마다 마석이 몇 개씩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충격에 몸이 양 옆으로 크게 흔들렸다.

    도중에 카트를 눈치챈 경비병들이 몇 번 접근했지만 카트에 한가득 실려있는 마석들을 이용해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대부분의 경비병들은 광장에서 벌어진 혼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역시 부족한 내 근력으로는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제기랄, 벌써 약속한 10분이 넘은 것 같은데. 다급한 마음에 난 왼손에 마석을 집어들고 바람 마법까지 사용하며 카트를 밀었다. 

    콰쾅-

    쾅-

    처음 폭발이 일어나고 몇 십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작은 폭발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패닉에 빠진 수 천 명의 마족들은 경비병들을 짓밟으며 성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내 역할은 그런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것이였다.

    "저기 뭔가 다가온다!"

    "카트부터 멈춰!"

    "카트에 뭔가 실려있다!"

    성문이 눈 앞에 보이자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대로 카트에서 손을 뗏다. 성문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 몇 개가 내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경비병 수 십 명이 카트를 막기위해 접근했다. 아직 성문까지는 거리가 꽤 남아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있는 마석을 힘껏 움켜쥐고 마법주문을 영창했다.

    "meus ventus potentia!"

    중위계에 속하는 나름 강력한 마법 주문이였다. 마석이 순간 반짝이더니 투명하고 동그랗게 생긴 물체가 카트 쪽을 향해 날라갔다. 주변의 공기를 응집해 만든 일종의 공기 폭탄이었다.
     
    "praemium!"

    펑-

    내가 타이밍 맞춰 외치자 공기 주머니가 카트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화약은 아닌만큼 살상력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상당히 응집되어 있었는지 저지력은 상당했다. 카트를 막기위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던 경비병 수 십 명은 공중으로 날라가며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트는 레일 위를 붕 뜨더니 성문 쪽을 향해 날라갔다. 카트가 날라가던 속도 그대로 성문에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소리를 냈다. 

    쾅-

    묵직한 충격음에도 불구하고 성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트가 충격으로 튕겨져 나가며 카트 안에 들어있던 마석들이 성문에 근처에 우르르 쏟아져내렸다. 5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속으로 시간을 세고 있었지만 지금은 몇 분이 흘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르메르, 조장, 도착했을거라고 믿을게.'

    임프와 오크인 두 명은 나보다 훨씬 힘이 좋았다. 이미 도착한지 꽤 됐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엎드린 후 재빨리 폭렬주문을 외쳤다.

    "miserere a Deo!"

    성문 앞에 널부러져있는 마석 수 십개가 순식간에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조금씩 진동하던 마석들은 방금 전의 공기폭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콰아앙!-

    "으아악!"

    "모두 도망쳐!"

    양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폭발의 충격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손과 다리가 겁에 질린 강아지마냥 나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렸다. 겨우 고개를 올려 성문 쪽을 바라보자 생각보다 강력했던 폭발의 위력을 볼 수 있었다. 성문은 반대쪽으로 날라갔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성문 근처의 성벽들도 반쯤 무너져있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고개를 올려 동문과 서문을 살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성문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는 검은 연기 두 개가 보였다. 

    "성문이 열렸다!"

    "와아아!"

    커다란 소리에 이쪽을 쳐다본 마족들은 성문이 부서진걸 확인하자 먹이를 발견한 늑대떼처럼 달려왔다. 이러다 재수없으면 깔려죽겠는데.

    "성문이 뚫렸다!"

    "당장 총독실에 전령을 보내!"

    갑작스런 폭발에 당황한 경비병들이 아래를 향해 활을 쏘아댔다. 순식간에 수 십명의 마족들이 쓰려졌지만 단 한 명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문 앞에 몰리는 마족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면서 하나의 거대한 파도로 변했다.

    난 미친듯이 그 파도의 반대쪽을 향해 뚫고 뛰어나갔다. 저 멀리 바깥쪽에서 익숙한 두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르메르와 조장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르메르는 인파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옆에 있는 조장은 커다란 덩치 덕분에 저 멀리서도 바로 보였다.

    둘 다 어떻게 살아있구나. 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몇 주 동안 같이 동거동락해서 그런지 애정이 많이 가는 동료들이였다. 일을 벌이기 전에 각오는 했지만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살아남지 못했다면 꽤나 나자신을 자책했겠지.

    "이봐, 검둥이. 이쪽이야 이쪽!"

    사방에서 쏟아져내리는 화살과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난 오직 르메르와 조장의 목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수 십명을 밀치고 나서야 겨우 두 명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두 명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르메르는 칼에 베인듯한 크고 작은 상처가 몸에 나있었고 조장의 한 쪽 어깨에는 화살까지 박혀있었다.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여, 마석을 쓸 필요는 없으닝께."

    내가 치유 마법을 걸어주려 하자 조장이 손사래치며 말했다.

    "그럼 제가 아까 말했던 대로 아저씨랑 조장 둘 다 서문쪽에 있는 비밀 통로로 가세요. 멈추지 않고 계속 가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성벽 두 개를 다 지나갈 수 있을거에요."

    내 기억으로는 성벽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서문 바로 옆쪽에 있었다. 이곳의 이전 주인이었던 탈로스가 성을 공략할 때 만들었던 일종의 땅굴이였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땅굴이 온전히 남아있을지는 불확실했지만 적어도 맨 몸으로 두 개의 성벽을 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약 땅굴이 막혀있다면 성벽 사이에 있는 숲지대에서 최대한 오래동안 버티며 두 개의 성벽을 통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너는 진짜 괜찮겠어? 이 혼란 속에서도 총독실 쪽은 여전히 경비가 삼엄해."

    "나도 동감이여, 너무 위험해."

    르메르와 조장이 걱정된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다 생각해둔게 있으니깐요. 그런 말 할 시간에 두 분 다 빨리 움직이세요."

    나는 둘을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나는 확신없이는 목숨을 걸지 않았다.



    ----------------------------------------------------------------------------------------------------------------------------------



    잠시 후 나는 혼란스러운 지상에서 벗어나 하늘을 날고 있었다. 공중부양 주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소비했지만 발각될 걱정 없이 총독실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였다. 나는 양 손에 마석을 하나씩 들고 마력이 다 떨어질 때마다 주머니에서 새로운 마석을 꺼내들었다.

    지상에서는 수 백 명의 마족들과 경비병들이 총독실 앞쪽에서 대치 중이었다. 그동안 타노스 광산에서 동료들과 가족들을 잃은 수 백의 마족들이 복수를 울부짖으며 달려들었지만 창과 활로 무장한 경비병들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비병들이 이들을 막느라 정신없는 사이 나는 아무런 문제없이 총독실의 옥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우."

    나는 경비병들에게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주머니에서 마지막 마석을 꺼냈다. 총독은 아마 총독실의 맨 윗층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et erunt caelo."

    마력을 불어넣자 마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내 몸이 공중에 다시 붕 떳다. 공중부양 마법에서 마석은 에너지원인 동시에 일종의 조종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력을 조절하며 한 층 아래로 내려갔다.

    창문 너머로 커다란 책상 한 개와 그 뒤에 앉아있는 뚱뚱한 남성이 보였다. 그가 입고있는 화려한 제복을 봤을 때 총독이 거의 확실했다.

    나는 들고있던 마석을 창문으로 던지며 폭렬주문을 외쳤다.

    "CREPITUS!"

    폭렬 주문과 동시에 마석이 폭발하면서 공중부양 주문이 끊겼다. 난 온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아슬아슬했지만 한 발자국 차이로 겨우 총독실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왜..왠 놈이냐!"

    폭팔의 충격에 쓰러졌던 총독이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의 한 쪽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기다란 장검이 쥐어져있었다. 연기 속에서 내 모습을 본 그가 소리쳤다.

    "이런 더러운 마족 새끼들 같으니라고!"

    그가 뚱뚱한 체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내게 접근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몇 조각 남아있던 작은 마석파편들을 집었다. 나는 눈을 감고 파편을 던지며 외쳤다.

    "lumine solis!"

    강렬한 불빛이 방 안을 채웠다. 불빛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눈을 떳다. 총독은 갑작스런 불빛에 정신을 못 차리고 사방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디있어 이 개자식아!"

    나는 몸을 아래로 슬라이드하며 발로 그의 다리를 쳤다.

    "으악!"

    그가 다시 땅바닥으로 쓰러지며 단말마같은 비명소리를 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의 몸 위에 올라타서 양 손으로 목을 졸랐다.

    "으으윽..."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이 뒤집혔다. 하지만 난 오히려 몸무게를 실어 더 세게 그의 목을 졸랐다. 그러자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이 뒤로 접혀졌다. 목뼈가 완전히 부러진 것이었다.

    "하아..."

    난 힘겨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폭발로 인해 방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소리를 들은 경비병들이 언제 이곳으로 닥칠지 몰랐다. 어서빨리 금고를 찾아야한다.

    그 때 방 한 쪽에 널부러져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마석도 다 썼는데 이거라도 있는게 낫겠지. 나는 허리를 숙여 검을 집어들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던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누구냐?!"

    사람의 목소리에 나는 칼을 겨누고 문 쪽을 향해 내달렸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무의식적인 행동이였다.

    푹-

    "우으윽!"

    고기를 찌르는 듯한 묵직한 촉감과 함께 칼이 인영의 몸에 박혔다. 작디작은 신음소리가 정적을 깨며 복도에 울려퍼졌다.  

    "아우..어...우..."

    "아..."

    인영의 정체는 바로 작은 체형의 소년이였다. 기껏해야 14살 정도될 것 같은 어린아이였다. 내가 내지른 커다란 칼날은 정확히 그의 왼쪽 폐를 꿰뚫고 나와 반대쪽 벽에 박혀있었다.

    "아어...우.."

    소년이 내 쪽으로 손을 뻗으며 힘겹게 중얼거렸지만 폐에서 피가 역류하면서 핏덩어리만이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커다래진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그렁거렸다

    "이...이봐."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소년의 손을 맞잡았다.   

    "빠...빨리 회복마법을..."

    나는 흔들리는 손으로 미친듯이 주머니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마석은 총독실로 들어오는데 사용했다. 게다가 만약 마석이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리는 만무했다.

    그 순간 내 오른손을 잡고있던 소년의 팔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작은 몸이 마치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푹 꺼졌고 당혹감으로 가득찬 두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소년의 입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와 목을 적셨다.

    롬든 총독의 11살 된 아들인 그린힐은 그렇게 짧은 생을 차디찬 복도 위에서 마쳤다.

    "아..."


    뭔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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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24 20:55:44  222.97.***.75  짱정일  60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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