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정민.안성식 기자] "어리둥절하다. …시차 적응을 못하고 있다."(청와대 윤승용 홍보수석)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를 보니까 어제는 대통령답더라. 잘하더라."(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FTA 타결 리더십이 정치권의 애증(愛憎) 질서를 미묘하게 변모시켰다. 그를 혹독하게 비난했던 '어제의 적'들이 오늘은 노 대통령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을 경계선으로 형성됐던 보수와 진보의 큰 틀이 한.미 FTA와 만나면서 헝클어지고 있다.
노 대통령 탄핵안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조순형 민주당 의원은 3일 "노 대통령은 지지 세력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결단을 내렸다. 국익 앞에선 여야 없이 그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저격수'로 명성을 얻었던 전여옥 한나라당 최고위원도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을 도와주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도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 바 있다.
반면 노 대통령과 한솥밥을 먹던 정치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은 "국가의 자존을 훼손한 일이며, 중산층과 서민을 배신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천정배 의원(민생정치모임)은 "경제주권을 넘겨준 4.2 조공(朝貢) 협상"이라고 깎아내렸다.
노 대통령의 우군이었던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도 방송에서 "(FTA는) 아주 쓴 약이 될 것 같다. 노 대통령은 국내 협상을 굉장히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역설의 정치 상황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노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그를 지지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대와 혼란을 불러일으키며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 진영 일각에선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눈빛도 읽을 수 있다. 12월 대선 정국과 연결 짓는 이른바 '신종 괴담(怪談)'들도 나온다.
박근혜 전 대표를 미는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은 "임기 말 힘도 없고 준비할 기간조차 거의 없는 막바지에 FTA를 급속하게 밀어붙였다는 데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라며 "노 대통령은 보수 진영에 '트로이 목마'가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발판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진보 세력의 지지까지 받아낸 뒤 한순간에 자기가 미는 후보를 대선 정국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는 의심의 시나리오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미는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앞으로도 계속 오를 것 같다"며 "이는 이 전 시장의 높은 지지율을 위협하는 요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 3일 조사에서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332%(KBS.MBC)로 나타났다.
뉴라이트 전국연합 이석연 상임대표는 이 전 시장 주최 세미나에서 "FTA 타결로 노무현 정권의 실정이 상당 부분 만회되고, 남북 정상회담설 등으로 한나라당의 입지가 축소되는 추세"라며 "범여권의 정비에 따라 대선 판도의 틀이 바뀌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상처투성이인 채로 집안싸움에 이겼다고 환호한다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도박장에서 브리지 게임에 이겼다고 환호하는 꼴"이라고 덧붙였다.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조심스러워했다. 한 관계자는 "우호적 여론이 국회 비준을 할 때 노 대통령에게 힘이 될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변한 게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 아니냐"고 선을 그었다. 다른 참모는 "보수층의 때 아닌 지지가 거꾸로 진보 진영을 자극해 반대 수위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보수층들에 이용당하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우상호 의원은 "FTA에 찬성하는 보수층 사람들이 노 대통령을 칭찬한다고 해서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며 "노 대통령의 정치적 공간은 더 좁아졌다"고 분석했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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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추진력은 높이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