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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씨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주민들은 며칠 째 모여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 수녀는 1962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6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두 수녀는 맨손으로 상처에 약을 발라줬습니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 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습니다.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을 받아 늘 감사했으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모든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말했습니다.
김 명호(56)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들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는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가며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숨어 어루만지는 손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품이 참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단호히 물리쳤습니다.
10여 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습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낡은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반 세기 가깝게 헌신해온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리라고 믿습니다.
" 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입니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렇게 40여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답니다.
누군가 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40여 년을 살았던 곳이었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간 고향 오스트리아는 도리어 낯선 땅이 되었지만,
작은 방 한 칸에 살면서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합니다.
그 분의 방문 앞에는 평생 마음에 담아두었던 한국말이 써 있답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늘 소록도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