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도 인정한다. 지난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전기 대비 2.9%로 미국의 4배나 되는 '서프라이즈' 성장세를 기록했지만 고용시장 등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밑바닥 경제는 여전히 꽁꽁 얼어 붙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최근 부쩍 '고용'을 강조하고 있다. 10.28 재보선 결과 한나라당이 수도권과 중부권에서 참패한 이유 중 하나도 이런 '밑바닥 경제' 상황을 반영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부터 '친서민 중도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국민들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월 6일 <경향신문>·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친서민정책들이 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응답자 82.3%가 '별 도움이 안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저조한 성적의 핵심은 '고용'이다. 9월 고용 동향에서 취업자가 7만1000명 늘었지만 공공부문에서 늘었을 뿐 민간 부문의 일자리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가 경제위기 대응책으로 실시하고 있는 희망근로, 청년인턴 등 공공부문 일자리 사업은 일시적인 저임의 일자리라는 점에서 '실업률'을 낮추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많은 실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되지는 못한다.
이처럼 '고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결국 정부가 제시하는 해법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친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청년들과 만난 자리에서 또 '눈높이'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청년실업을 해결하려면 정부·기업의 노력과 더불어 수도권과 대기업만 선호하는 청년들의 직업관도 바뀌어야 한다"며 '지방 취업'을 권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명박 정부 들어 수도권 규제 완화 정책으로 지방 기업의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고용'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중첩된 복합적인 문제다. 이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눈높이를 낮추라'는 식의 틀에 박힌 해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재 한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고용 문제에 대한 기획기사를 청년 실업자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기사로 시작하는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다. 20대 취업 준비생들이 밝힌 일상을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케이블 채널 <TVN>의 '롤러코스터 - 남녀탐구생활' 형식으로 각색해 보았다. 편집자.
<백수탐구생활 - 남자편>
남자가 잠에서 깨어나요. 아침 10시 반이에요.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어요. 조금 부지런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요. 먼저 즐겨찾기에 등록되어 있는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요. 채용공고가 새로 떴는지 살펴요.
마음에 들던 기업이 있네요. 모집 직군과 연봉을 확인해요. 근무지가 지방이에요. 바로 창을 닫아요. 연고도 없는 지방에서 돈 벌어봤자 뭐하나 싶어요. 지방은 나중에 돈 벌어서 느긋하게 살고 싶을 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새로 지원할 회사가 없는 것 같아요. 남자는 취업사이트의 창을 닫고 포털에 들어가 웹툰을 봐요. 스포츠 뉴스로 들어가 어젯밤 있었던 축구 경기 결과를 확인해요. 바르셀로나가 루빈 카잔에게 졌네요. 축구 커뮤니티에 접속해 대이변에 놀란 누리꾼들의 리플을 읽어요.
금세 점심때가 됐어요. 어제 먹고 남은 김치찌개를 데워 먹어요. 3달 전 엄마가 보내준 김치로 끓였어요. 너무 시어서 이젠 찌개로밖에 먹을 수가 없어요. 내일 점심은 카레, 모레는 다시 김치찌개에요. 계란 프라이를 대충 만들어 밥을 먹고 샤워를 해요. 오늘은 학교에서 취업 스터디가 있기 때문이에요.
학교로 가는 도중에 몇 주 전 지원한 회사의 서류 전형 결과가 발표됐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어요.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컴퓨터실에 들어가요. 몇 번째 서류 전형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요. '이런 우라질'. 또 떨어졌네요.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로그인해요. 형태소 단위로 글자를 확인해도 달라진 건 없어요. 옆 사람이 볼까 황급히 창을 끄고 자리를 떠나요.
떨어진 회사에 미련을 두면 안 돼요. 세상은 넓고 공채는 많아요.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하려는데 문자가 와요. 방금 떨어진 회사네요. 자기네와 함께할 기회가 없어서 유감이라는 확인사살이에요. 약 올리는 것 같지만 개별 통지를 해주는 회사가 성의는 있다고 생각해요. 전화기를 집어넣었는데 또 문자가 와요. '이런 젠장'. 중복문자네요. 약 올리는 게 맞네요.
취업 스터디 시간이에요. 세미나실은 이미 백수들로 북적여요. 요즘엔 카페에서 스터디를 하는 애들도 많지만 따라 하기엔 커피 값이 부담돼요. 마침 성실한 스터디원이 한 명 있어 미리 자리를 잡아놨네요. 앉자마자 서류 발표 이야기부터 나와요. 저만 떨어진 것 같아요. 얼굴이 약간 화끈거리지만 내색하면 더 창피할 것 같아요. 태연하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회사였어요'라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해요.
다른 스터디는 모의면접에 기업분석도 하고 지원 직군별로 프레젠테이션 연습도 하는데 우리 스터디는 지금도 토익 준비 중이에요. 2년 전에 900점을 넘겼을 땐 창창한 앞길이 열릴 것 같았어요. 세월은 빠르고 유효기간은 칼같이 적용돼요. 말소 한 달 전에 본 토익에서 100점이 떨어졌어요. 토익책 한 번 안보고 이 정도면 금방 900선을 복구할거라고 생각했어요. 모의 토익 문제집을 한 권 사서 풀고 다음 달에 다시 시험을 봤어요. 700점대로 떨어졌어요.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때 식은땀이 흐르던 기억이 생생해요.
용돈을 당겨 받아 토익학원에 다녔지만 여전히 700점대에요. 토익을 접겠다고 결심해요. 몰개성한 토익 900점보다는 실용영어가 뛰어난 800점대의 이미지로 승부하자고 생각해요. 토익 실력이 영어 실력은 아니라는 친구들의 위로가 마음에 와 닿아요.
▲ ⓒ뉴시스
스터디 중에 한 팀원에게 문자가 왔어요. 곧이어 옆에 있는 팀원의 전화기도 진동이 울려요. 문자를 본 아이들의 표정이 안도감에 쌓여요. 전에 접수마감에 쫓겨 허겁지겁 넣었던 ○○은행의 서류 전형 결과였어요. 내 휴대전화는 조용해요. 또 한 명의 전화기가 드르륵 울려요. 나도 모르게 고개가 꺾이고 어깨가 움츠러들어요. 당당히 웃자고 마음먹어도 팀원들 눈을 쳐다보기가 쉽지 않아요.
스터디를 마치니 저녁이 됐어요. 한잔하자는 이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학교 식당에 가요. 가장 싼 메뉴를 골라 10분 만에 밥을 먹어요. 사실 술이 당기지만 혼자 서류 떨어지고 웃고 있을 자신이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왠지 날 무시하는 것만 같아요.
컴퓨터실에 다시 가요. 내일 접수가 끝나는 한 보험사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요. 보험은 관심이 없지만 연봉이 4000만 원이 넘는다니 지나칠 수 없어요. USB 메모리에 저장해놓은 다른 자기소개서를 복사해 글자 수를 조정해요. 해당 기업을 칭송하는 부분에서는 긴장해야 해요. 혹시나 다른 기업 이름을 남기면 안돼요. 자소서 작성을 30분 만에 끝내요.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훑어보면 나무랄 데 없어요.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려고 도서관의 선반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전화가 와요. 백수 친구들이네요. 녀석들의 술 약속은 거절할 수 없어요. 수년 넘게 캠퍼스에서 동고동락한 친구들이에요. 이 중 한 녀석은 몇 달 전에 은행에 인턴으로 취업했어요. 업무 실적이 좋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약속이 있었어요. 은행은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생활은 안정되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가 컸어요. 하지만 그 약속을 했던 부사장이 전근 가면서 정규직 전환 얘기는 없어졌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원서나 더 넣는 게 나았어요.
또 다른 녀석은 공기업에 청년 인턴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전에 나왔어요. 하는 일도 없는데 시간만 보내는 게 아깝다네요. 요새는 청년 인턴 해봤자 경력도 인정받지 못해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술자리에서 하지 않아요. 축구 얘기, 야구 얘기를 하다가 걸 그룹 이야기를 꺼내요. 취업 이야긴 해봤자 마음만 아프기 때문이에요.
2차를 가고 싶은데 다들 지갑이 얇아요. 취업한 친구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요. 한두 녀석이 미끼를 물어요. 퇴근시간까지 '플스방'에 가기로 해요. 당구장에 가고 싶지만 지갑 사정이 마음에 걸려요. '위닝' 몇 판을 돌리니 친구가 왔어요. 술자리에서 여유 있게 카드로 결제하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어요.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아요. 나도 곧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구비까지 계산한 친구는 출근해야 한다며 먼저 택시를 타고 갔어요. 물주가 없어지니 흥이 떨어져 집으로 돌아와요.
집에 도착하니 같이 사는 큰형이 자고 있어요. 싱크대에 쌓아 놓은 그릇을 닦고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요.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건 형과 같이 했는데 지금은 제가 전담이에요. 딱히 불만은 없어요. 1년 전만 해도 형이랑 많이 다투고 했지만 형이 취업에 성공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가끔 주는 용돈 10만 원에 반항심이 눈 녹듯 사라져요.
잠들기 전엔 이런저런 상상을 해요. 대부분 취업에 관한 생각이에요. 영원히 백수 생활을 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토익이 조금 걱정이지만 이만한 학교에 성실한 성격이면 대기업에서 날 뽑아줄 거라고 확신해요. 고시를 해도 성공할 것 같았지만 젊은 나이에 인생을 '올인'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88만 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그건 내세울게 하나 없는 이들의 몫이라 생각해요. 적어도 100대 기업이나 은행에 취직하면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내 주변에 이런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수두룩해요.
몇 달 전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을 하며 잠을 뒤척이다 결국 일어났어요. 컴퓨터를 켜고 영화를 한 편 내려받아 문화생활을 즐기기로 해요. 다운로드가 다 끝날 때쯤 배가 고파져요. 맥주에 통닭이 당기네요. 결국 동네 닭집으로 향해요. 편의점에 들려서 맥주 두 병을 사요. 영화를 보며 통닭 한 마리와 맥주를 먹으니 배가 불러 잠이 와요. 컴퓨터를 끄고 다시 자리에 누우며 내일부터는 술을 끊고 운동이라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요새는 남자도 외모를 보고 뽑는 세상이라 여기서 더 배가 나오면 끝장이라고 되뇌다가 잠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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