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심리학의 어떤 계보 안에서 읽힐 때 그 가치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더 많은 객관화를 통해 이 책을 더 잘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라고 본다.
예컨대 에리히 프롬과 프로이트간의 어떤 대립구도로 이 책의 내용을 본다면, 두 학자 모두 유년기의 분리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는 점은 같으나 그 지향하는 바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저서에서 당대의 실존주의가 부추길 수도 있는 인간소외와 허망함의 문제를 비판하는데, 에리히 프롬의 그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나치정부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 생존자 중 한 명이었고, 에리히 프롬 역시 독일 출생 유대인으로서 탄압을 피해 망명했다고 한다(프로이트도 유대인으로서 망명했으나 이미 노년기에 다다른 후였다).
두 학자간의 유사성을 어떤 고도의 의미화를 통해 허망함을 이겨내려는 의지로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어떤’이라는 단어를 벌써 세 번이나 썼다(계속 쓰게 될 것이다). 나는 에리히 프롬이 지향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섣불리 요약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 앞서 말했듯이 심리학을 깊게 연구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라고 본다. 결국 인상비평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높다. 간단한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개인적인 오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 단, 이미 많은 학술연구를 통해 검증되어있을 어떤 부분은 억측하지 않(으려고 애써보)겠다. 그건 내 지적 한계를 무시한 채 너무 멀리 돌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오독을 시작해 볼작시면..
일단 이 책의 초반부에서 연애를 시장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썸, 교제, 있어보인다, 짜쳐보인다, 연애, 살롱, 파티.. 상징자본의 거래의 장을 뜻하는 단어들이다. 세레나데를 부르는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단 카드를 긁어서 멋진 옷을 사 입는 예선과정이 필요한 것이며, 예선에 탈락하면 본선은 넋놓고 구경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술주정꾼이 저지르는, 대상에 대한 스토킹을 순애보로 포장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이 있다. 오히려 ‘나는 대체로 어떤 상징자본(억양, 어투 또는 사투리, 문체, 제스처, 옷입는 방법, 걸음걸이, 피부탄력성, 뒷목근육의 유무, 더 야한 쪽으로 가면 얘기하기 어려워지는 어떤 것들 등등)에 끌리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앞서 말했듯 (내 현재 학력으론 불가능한) 학문적 심층연구보다는, 외부자료를 통해 다각도로 비춰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몸이 된다. 모성애에서는 한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중략) 사랑하는 어머니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시금석은 분리를 견디어 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76), (에리히프롬,1956/황문수,문예출판사,2000_2판) - 이하생략
유년기의 분리에 대한 부분에서 에리히 프롬은 현명한 모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같은 문제에 대해 프로이트나 라캉 등은,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억압된 리비도(성욕)를 되찾거나 사회화를 통해 지배하려는 과정, 이드(욕망)-에고(자아)-수퍼에고(초자아)의 흐름으로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어머니는 이 사회적 남근들이 순환하는 과정의 응원자이자 투사자로 머무르다 폐경기에 이르러 노이로제에 시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단순무식하게 요약한 짧은 문장들에 담겼을 어떤 오류의 가능성을 전문연구자들이 제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다. 나도 내가 무슨 얘기하는지 잘 모르니 빽 소리날 정도의 살인태클을 걸지는 않기를 바랄 뿐.
오히려 사회적인 의미로 풀이하자면, (어떤 학자 또는 학풍의 견해를 따르건) 이러한 부분들이 현재 국내 아동복지법상으로 아동을 ‘18세 미만’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한 사회적 합의의 원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들이다. 어떤 동물이 성체가 되고 나서도 유아기의 모습을 일정부분 유지하는 것을 두고 ‘유태보존’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모든 동물들 중 그 범위와 구성기간이 가장 넓고 길다. 이 필연적인 분리의 시기에, 한 인간의 아주 많은 부분들이 사실상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아동들에 대한 보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최근 몇 년사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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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월>(앨런파커,1982) 중 Vera / Bring the Boys Back Home (원곡: Pink Floyd의 1979 동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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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한 사람을 동정함으로써, 인간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p.72)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나는 동정심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보는 쪽이다. 그러나 동정심의 영역에서도, 민감한 부분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만한 세심한 기술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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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 대해 민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완전하고 건강한 인간의 기능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p.154)
“인간은 사물에 대한 사랑을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중략) 사랑이 행복과 관련있게 되면 그것은 즉각 부르주아적으로 굳어져버린 그 무엇으로 변질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행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균형의 결핍상태를 의미한다. 행복한 사랑 - 폭력의 매카니즘이 감춰진, 나선형 틀에 함께 틀어박힌 나사와 같은 - 에는 가벼운 산들바람도 있을 수 없으며, 따뜻한 바람도 없고, 뜨거운 바람도 있을 수 없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감독)
"(중략) 이것은 부부가 흔히 서로 느끼고 있는 변태적인 매력 - 이 부부는 잠자리에 들었거나 서로 증오와 분노를 발산시킬 때에만 친밀하다 - 을 설명해 줄 것이다.“ (p.78)
마찬가지다. 갈망이라는 원초적 결핍이 어디까지 통제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답 역시 내게는 없다. ‘완전하고 건강한 인간의 기능상‘에 가벼운 산들바람이나 뜨거운 바람이 깃들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고, 구속력을 폭력의 매카니즘이 아니라 그저 성숙한 사랑의 조건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이 글 후반부에 첨부할 영화 <베니스에서죽다>의 대화장면이나 마지막 질문에서도 다뤄질 것들과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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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된 물품, 다시 말하면 사장된 물품이 노동력이나 인간의 힘이나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로 자본주의의 기본구조이다.“ (p.116)
그나저나 또 영화 얘기를 꺼내들고 있다. 영화를 사랑해서? 이른바 씨네필리아(좋게 말하면 영화애호, 나쁘게 말하면 영화광증)라고 불리는 특정현상 또는 집단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인데, 이 현상이 일정단계를 넘어서면 인본주의보다는 허무주의나 예술지상주의에 가까운 형태로 변질될 요소가 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시체를 사고파는 데 혈안이 되어버린다는 자조적 토로를 나만 하는 것은 아닐 테다. 물론, 나는 이 역시 선택사항이라고 본다. 예술사의 관점에서는 인본주의가 꼭 철금석에 갇힌 진리인 것도 아니다. 다만 개개인을 위한 사랑의 기술Artof Loving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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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한 사람에게 유일한 현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현실뿐이며 자신의 공포와 욕망의 실재뿐이다.“ (p.156)
"그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는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p.86)
이 책에서 내가 얻은 긍정적 핵심들이다. 이 고립 또는 실존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고도의 의미화를 통한 탈피의 노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이 세심한 사랑의 노력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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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삶에 부여하는 의미 이외에는 삶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한, 전적으로 외롭다.“ (p.100)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p.158)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p.173)
결국 필자의 이론적 기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억측해 보자면, 이 책에서 고도의 의미화를 통해 에리히 프롬이 제시하고 있는 사랑의 기술의 핵심은 ‘존중’이 아닐까 싶다. 동양의 역지사지나, 서양의 ‘I understand you'와 일맥상통한다. 재미없다고? 원래 고도의 기술 끝에는 단순성이 남지 않던가.
물론 몇 차례 당부하듯, 필자의 개인적 해석을 심리학적 계보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나는 전문가들을 존중한다.
게다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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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니스에서죽다>(루키노비스콘티,1971)중에서 주인공 구스타프와 친구 알프레드와의 대화장면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오직 감각을 완전하게 지배하게 될 때만 성취할 수 있어. 지혜, 진실, 인간의 존엄성을...
알프레드
지혜? 인간의 존엄성?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어? 천재성은 신이 주는 선물이야. 아니, 신이 주는 재앙이지. 타고난 재능의 사악하고 병적인 불꽃!
구스타프
난 예술의 악마적인 힘은 믿지 않아!
알프레드
틀렸어. 악은 필수야. 악은 천재의 양식이야!
가사도우미
차 가져왔습니다
구스타프
고맙소. 차 마시겠나?
알프레드
그래, 줘.
구스타프
우유 넣고 싶으면 넣어.
알프레드
고마워.
구스타프
이봐, 알프레드. 예술은 가장 고귀한 교육적 자원이야. 예술가는 모범적이어야 돼. 조화와 힘의 본보기여야 돼. 모호해서는 안 돼.
알프레드
하지만 예술은 모호한 거야. 그리고 모든 예술 중에서도 음악이 가장 모호하지. 과학으로 빚어진 모호함이라구. 잠깐 이 화음을 들어봐, 그리고 이것도. 원하는 대로 어떻게든 해석할 수 있어. 자네보다 먼저 존재해 온 수학적인 조화로 이루어진 모든 화음들! 예측 불가능하고
끝없이 많지. 이중적 의미의 천국이야! 누구보다도 자네가 그 안에서 풀밭의 송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있는 거야. 들리지 않아? 모르겠어?
구스타프
그만해!
알프레드
전부 자네 곡이야! 자네 음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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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진 않겠다. 이미 영화제목에 나와 있..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중 4악장 아다지에토의 선율이 화면과 아름답고 반복적인 조화를 이루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 이 영상은 영화와는 상관없는 공연실황이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고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2004년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지휘 모습이 담겨있다(그는 이때 이미 항암투병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4악장은 45분께부터
이 곡과 관련해서도, 곡 자체가 말러가 알마 신틀러, 후일 알마 말러가 되는 19세 연하의 여성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는 설이 유명한데 (로맨틱한 사연들이 추가된 덕에,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편이다), 이 곡을 작곡한 시기에 말러가 알마를 만나게 되고 전반적으로도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이 시기 이후 구스타프 말러는 인생의 여러 시련을 겪게 되고, 그중에는 부인 알마의 외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또한 곡의 해석이 작곡가의 인생사를 꼭 고려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교향곡 5번 전체를 들어보면, 4악장이 매우 아름답기는 하나, 1악장과 2악장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어떤 거친 면모, 절제된 박력 안에 깃든 불안과 긴장, 죽음 앞의 격렬한 의지가 3악장의 모호성을 지나 4악장에 들어서 사라져버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지막 5악장은 4악장의 주요 멜로디를 변주하며 어떤 환희에 찬 피날레를 장식한다. 기나긴 겨울의 추위에서 벗어나 마침내 봄을 맞아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꽃향기에 취한 퇴행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찬가인가.
이와 비슷한 예는 적지 않다. 조지프 캠벨의 <천의얼굴을가진영웅>에는 (매우 오래 전에 읽었기 때문에, 내가 임의로 각색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악령에 씌인 높다란 탑을 정복하려는 한 영웅과 각 층마다 그를 기다리는 마귀들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수많은 난관들을 이겨낸 이 영웅이 마침내 꼭대기 층에 당도하자 거기엔 장미꽃잎이 깔린 침대가 놓여있고 저 멀리서 한 처녀가 희미하게 미소짓는 모습이 보인다. 영웅은 피아식별 따위는 잊어버리고 투구와 갑옷과 창과 방패를 침대맡에 벗어던지며 뇌까린다. 내 이곳에서 쉬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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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위의 장면에만 한정했을 때, 두 학자간 관점 사이의 논쟁을 연출자가 어떻게 그려내는가 하는 것 역시, 해석 나름이다.
평생을 이성적 노력을 통해 정신성을 구현하는 데 바쳤던 노학자가 ‘푸른 안개’처럼 다가온 마성의 미 앞에 무너지고 마는 ,어떤 마지막 애끓음처럼 떠오르는 옛이야기의 단초로서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고, 이 두 부르주아 모두를 다소 비웃는 도입부로 볼 수도 있다.
이 대화장면의 시작부분에서 주인공은 먼 산을 바라본다. 그가 돌아본 실내는 어두워 보인다. 그 안에서 두 음악가가 쪼개진 장면들에서 반응하며 논쟁한다. 가사도우미의 등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 두 사람은 한 장면으로 연결되어 그 안에 함께 속해있다. 차 마실 때는 그저 몸으로 이루어진 인간일 뿐이며, 그마저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두 인물을 번갈아가며 줌인하는 카메라워크는 거의 동일하다. 즉 부르주아적 기반에서 출발한 이 두 논점 자체가 시작부터 글러먹은 도긴개긴이며,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만개하는 어떤 젊음 앞에 필연적으로 스러져가며 이 이론적 노력들의 허무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어떤 가능성들의 모음일 뿐일까?
<사랑의기술>의 영어 원제는 Art of Loving이다. <손자병법>의 영미판 제목은 Art of War이다. 다시 한 번 단순무식하게 비유하자면, 어떤 전략가가 <손자병법>을 몇 차례 읽고 나서 전쟁에 나섰다가 졌다. 그 후 관련서적까지 찾아보고 일종의 오답노트까지 작성한 후 전쟁에 나섰다가 또 졌다. 그 노력 자체를 비난할 수 있을까? (전쟁 자체가 나쁜 것이라거나 군수공장이 환경문제를 일으켰다거나 세금낭비이니 그에게 다시 전략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 합리적인, 비판을 하게 되면.. 이 글 못 끝내니 일단 그렇다고 치자..) 마찬가지다. ASKY라고 해서, 또는 노력해 봤자 감각에 굴복된다고 해서 이 책을 지레 멀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첫머리에서 밝혔듯 예민한 객관화를 통해 이 책을 더 세심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핵심적 가치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국 더 공부할 일이다.
단, 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수능금지곡처럼) 귓바퀴를 맴돌던 어떤 노래 한 곡은 신청하고 끝내야 할 것 같다. 결국 고백하자면, 나는 여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부류 쪽에 가깝다. 그러나 난립하는 이론들로 보아 아직 단정할 수는 없는 논제이니, 종이들에 담긴 이 고풍스런 균형추를 외면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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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 사랑할 수 없어 (작사 김현식, 작곡 장기호, 편곡 송홍섭 / <김현식4>,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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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올해들어 본 인상깊었던 영화 중 한 편인 <사랑의시대>(토마스빈터베르그,2016)에 기반한 질문입니다. 작품 자체가 이 딜레마에 기반하므로 스포일러까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보를 원치 않는 분들은 건너뛰셔도 좋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의 공동체를 실험할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고 칩시다. 배우자가 유산으로 넘겨받은 대저택에서 여러 명의 친구들, 새로운 세입자들과 함께 생활하기로 한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에서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 또는 실험해 보려고 합니다. 각자에게 대저택 소유권의 일정 배분을 추진하여 모두에게 발언권이 있고, 중요한 문제를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이 이상향을 꾸려가는 나날들을 통해 당신은 지고의 행복감을 느낍니다. 대학때 꼬뮌꼬뮌하며 배운 공동체이론이 눈 앞에서 실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우자가 당신에게 외도 사실을 밝힙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가 새로운 파트너(불륜상대라고 얘기할 만한)를 이 공동체의 새 세입자로 추천했다는 점입니다. 당신이라면 이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