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왕조(Xia dynasty, 대략 기원전 2070 – 1600년)는 논란이 있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이다. 하 왕조의 근거는 죽서기년, 서경(書經), 사기(史記) 등의 기록과 하 왕조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이리두 문화, 허난성 옌스시) 유적과의 연관성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이다. 하 당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자료는 없다. 물론 아직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하나라의 연대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의해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로 추정한다. 하상주단대공정은 중국 고대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연표(年表)를 정리하기 위한 연대학(年代學) 연구 사업으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되었다. 1996년 5월 16일에 시작되어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20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하였고, 2000년 11월 10일,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의 연대(年代)를 확정(確定)해 공표(公表)하였다.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기원전 1세기에 펴낸 『사기』에서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연대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음을 천명한 바 있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도 중국의 최초 왕조들인 하나라와 상나라 전기, 즉 기원전 1300년 이전의 연대는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 대략적 틀만을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에 대한 기록은 훨씬 더 후대의 것이다. 하의 뒤를 이은 상 시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이라는 최고 등급의 자료가 있다. 그런데 은허의 갑골문 중에 하 왕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다.
상(商) 왕조가 실재했었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지만, 하 왕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나라의 실재성을 확실히 보장하는 고고학상의 발견이 없고 전설상의 왕조로 여겼지만 사기史記 등의 중국의 많은 고대 사서에 등장하고, 얼리터우 문화를 하나라의 유산이라고 여겨 실존했다고 보기도 한다. 탄소 14연대 측정법에 의해 허난성 옌스 시 얼리터우 촌의 얼리터우 유적이나 허난성 신미 시의 신자이 유적 등에 흔적이 있는 얼리터우 문화가 하나라의 연대와 거의 일치한다.
기원전 2000년대 초반은 신석기 문화인 룽산 문화(龍山文化)의 말기에 해당되는데, 기후 변화로 추측되는 원인으로 인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급격히 감소했으며, 룽산 문화 중심지의 대부분은 버려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청동기 문화인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의 중심지로 볼 수 있는 허난성河南省의 이뤄 분지로 인구와 사회적 복잡성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통합되고 정치적으로 집권화된 새로운 사회, 즉 국가의 출현을 의미한다. (외부 선진 문명의 전래 가능성은?)
얼리터우 유적의 상층(上層)에서는 궁전(宮殿)의 터를 포함해 고대 도시(都市)의 유적(遺蹟)이 발굴되어 초기 왕조국가(王朝國家)의 성립을 보여준다.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랜 궁전(宮殿) 건축 유적이며 하(夏) 왕조나 상(商) 왕조 초기(初期)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얼리터우 문화는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 고대 국가의 형성 과정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하(夏)의 존재와 문화를 밝히는 데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사마천의 『사기(史記)』「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왕(禹王)은 기원전 2070년 왕조를 개국하여,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여하려고 하였으나, 제후는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