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옵션 |
|
생명체는 죽지 않는 게 목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죽는 것보다 삶이 쉬우니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함, 같습니다.
그저 아무것도 안 하면 되니 죽는 게 자칫 쉬어 보일지 모르겠으나
당장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과 배고픔, 무료함을 견뎌야 하고 숨은 쉬어지는 거지, 참는 건 힘들죠.
행동 폭 안의 유한 자원을 소비하는 개체는 늘 경쟁에 놓여
최소한의 욕구를 해소하는 일조차 얻는 게 힘들 수 있지만
치열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죽지 않고 더 살고 싶은 건 왜죠?
모성애, 자애 등 호르몬이 밝혀지고 있는 숱한 사랑의 종류와
창조주의 명성으로 포장된 생명의 의무 탓인가요?
정말 우린 의무로 살아갑니까?
성 합목적성과 유전으로 맺은 뜨거운 핏줄은
그 유대 구성원의 사별, 파탄, 독립 등 사건성(mootness) 부재를 어렵게 받아들일 심리를 줄 뿐
죽음을 인정하기 힘든 건 생존이 경과하는 것과 별개고
이타심은 생물학적으로 생존의 근원을 설명하는 이유가 아닙니다.
처한 환경이 진짜 힘들면 스트레스로 체내외적인 장애가 오고 픽 죽는 겁니다.
계속 살아남는다는 건 그냥
죽는 것인즉슨 아무것도 안 하기보다 쉬운 일을 추구하는 습성의 반영이고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생존의 진실한 원동력입니다.
간단히 말해 생존이란
배가 고파지면 먹고 피곤하면 쉬고 배부르면 비우고
스트레스를 낮춰주는 자신만의 영역을 가꾸고 지키고
견디는 것보다 쉬운 일을 하게 되는 욕구죠.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건 그 행위가
위기감과 고통을 견디기보다 쉬워서고
태안 기름 유출 때 몇 가지 플랑크톤이 환경에 적응한 변형 징후를 보인 건
몇 천 년을 압축시킨 급속 진화에 비견되는 기능 발휘가
놀랍지만 당연하게도 기름 속에서 단지 아무것도 안 하기보다 쉬워서죠.
오류를 파훼하자면, 간단한 것과 쉬운 건 다릅니다.
다소 거창하게 우주가 나아가는 척도로 방향성을 대입하여 볼 때
생존은 복잡하지만 쉽게 이끌리고
죽음은 간단하지만, 썩 이끌리지 않죠
우린 세포가 늙고 손상되는 걸 알고 있으며
사색을 하고 사후에 올 미확인의 허전마저 환상통처럼 겪기 때문에
죽음이 더욱 두렵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견디지 않습니다.
근데 저는 이 글의 주관적인 견해마저 고려하여
죽기로 판단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축삭은 잿빛이었고, 닿는 건 바람과 모래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떠날 때까지 한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후로 말이죠.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낫질 않는 창백한 피부병을 앓고
저의 이승과 저승은 점점 뒤바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죽기보다 어려워져 가는
산다는 게 그렇습니다.
나는 슬픕니다.
신이시여, 이 슬픔이 제가 유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보다 슬퍼하는 게 더 쉽단 말입니다.
부디 거둬가 주세요...
그리고 주세요, 안식을. 하루빨리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