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쓴건 아닌데 컴퓨터 구석에 예전부터 있었던 자료입니다.
다시 읽어봐도 명작입니다.
그리 길지 않으니 읽어 보세요^^
제 목 : [단편] 어느 환상불감증 환자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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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H다.
웃어본 지, 울어본 지도 꽤 되었다.
삶은 마른 나무껍데기같고, 내가 걸어온 길은 희미하기만 하다.
아이를 싫어하고 작은 동물도 길러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싫어한다.
산타를 싫어한다.
내 이름은 H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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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
"당신은 병에 걸리셨군요"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남겨둔 어느날...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내 앞에 처음듣는 목소리가
나를 향하고 있단 걸...난 몇 걸음이나 지나서야 겨우 알아챘다.
"꽤 심각한데..."
장난스럽게 들릴 소지가 다분한 그 한마디가 나를 강제로 멈춰세웠다.
"...."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고개를 드는 것으로 예의를 차렸다.
덕분에 의도하지 않게 그를, 아니 그녀를 훑어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갈색 부츠에 그와 비슷한 계통의 스커트 위로 입은 코트를 지나
유난히 긴 목의 하얀선과 웨이브진 채 짙은 베이지로 염색된
가는 머리카락을 정점으로 내 시선은 정확히 그녀의 눈에 꽃혔다.
아주 작지만...갑자기 공기가 따뜻해 진 것 같은 느낌을 감추기 위해
나는 내 몸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변화란 감정을 알아채기에 가장 쉬운 것이므로...
"의사...?"
"글쎄요"
배시시 웃으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해대는 그녀를 잠시라도
제지시키기 위해서 나는 애써 할 말을 지어냈다.
"병명이..."
"병명이...그 다음은요?"
"...."
"항상 그렇게 말을 끝맺지 않아요?"
"...."
초면치고는 뻔뻔한 질문에 나는 곤혹스러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나를 그녀가 다시 붙잡았다.
"이러면 병에 해롭다는 걸 말해야 하나....
오늘 시간 있죠? 제가 진단해 드리죠"
"별로..."
"물론 무료로 해 드리죠"
내 마음과 달리 발걸음이...어느 새 그녀를 쫒고 있었다.
....이런 정떨어지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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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
한 남자가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파 깊숙이 몸을 뉘인 채 졸고 있다.
피곤한 듯 보인다.
그 남자의 한 손에는 금방 막 읽던, 넘겨야 할 페이지를 많이 남겨둔 새것같은
동화책 한 권이 들려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그 손이 툭하고 옆 테이블을 건드리자 뭔가 종이가 한 장
팔랑거리며 떨어진다.
종이의 상단에 '처방전'이라 휘갈겨 놓은 여성이 쓴 듯한 글씨체가 있고,
그 아래에는 '동화책 읽기'라는 말이 있다.
누가 보면 어린아이가 장난해 놓은 것 같은 그 종이쪽지의 가장 아래쪽엔
웃는 얼굴의 낙서와 함께 낙서같은 삐뚤빼뚤한 글자가 또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상불감증에 걸린 내 첫번째 환자에게...-
팔랑...
종이는 커튼을 미처 통과하지 못하고 웅웅거리다 겨우 빠져나온 연한 미풍과
함께 놀다가 잠든다.
날씨가 춥다.
환상불감증에 걸렸다는 H씨도 춥다.
겨울의 마법...
그날 밤은 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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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5
"별을 그려 보세요"
"무슨...?"
"하늘에 떠 있는 별 말이에요. 어서요"
서걱서걱, 연한 연필심이 자국을 남기고 지나간 하얀 종이에는 자로 그린 듯한
뾰족한 다섯 귀퉁이의 별이 그려져 있다.
내가 별을 언제부터 그릴 수 있게 되었는 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 점에서 시작해 다섯개의 직선을 이어 시작점에서 끝맺는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 별을 내가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꽤 오래걸렸던 기억이
언듯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연필을 놓자 그녀가 얼른 연필을 쥐곤 내 별 옆에 무언가를 하나 그려녛는다.
불가사리...
울퉁불퉁한 원형에 가까운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쯤 되겠다.
그녀가 연필을 놓고 꽤나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 별이에요"
나는 왜...그녀가 부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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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꿈뻑꿈뻑
아이라곤 접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주위에 아이들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아이들을 싫어하니까...
그런데 내 앞에서 눈이 꿈뻑꿈뻑하고 있는 이 꼬마는...어쩐지 아이같아 보인다.
"누구...?"
"제 친구요"
더벅머리...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저분한 머리를 쑥쓰럽게 긁적이던 작은 손이 내게
내밀어진 순간 나는 조금 당황했다.
씨익 웃는다.
얼떨결에 손을 마주 잡아 흔들어 주고 나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오늘 처방은 '아이와의 대화'에요"
병실이랄 것도 없는 방에 그 꼬마와 둘만 휑하니 남겨놓고 간 그녀의 행적을
궁금해 할 여유도 없이 그녀석이 곧바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나 파르페 사 줘"
-나는...여전히 아이들이 싫다.
입에 묻은 쵸코를 아직까지 열심히 핥아대고 있는 꼬마의 손을 억지로 붙들고
간신히 나는 아담한 카페에서 벗어났다.
"저기"
나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아이의 잰걸음이 그렇게 싫지는 않다.
놀이터에 도착하자 겨우 내 옷을 쥐고있던 손을 놓고 달려가 미끄럼틀에 오른다.
조금은 귀엽기도 하다.
"아저씨도 와"
-나는...그럼에도 아이들이 좋아질 것 같진 않다.
아이가 나를 앉혀놓은 그네가 삐걱이는 소리가 어쩐지 거슬린다.
쇠가 끼긱거리는 소리는 내가 무거워서인지 아니면...내가 싫어서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라는 나답지 않은 망상 때문에...
"아저씨는 산타할아버지한테 무슨 선물 받고 싶어?"
문득 물어오는 목소리는 아이였다.
"아무것도..."
"왜?"
"싫으니까..."
"왜?"
"...."
"나는 사슴을 받고싶다. 갈색 사슴"
"그런 건 받을 수 없어"
"아니야 받을 수 있어 사슴은 설탕만 먹으니까 내가 기를 수도 있어"
"그래도 안 줄 걸"
"그럼 그거 대신으로 흰색 강아지도 좋아"
"강아지는 더러워"
"아냐 깨끗해"
"그리고 빨리 죽어 너보다 훨씬 일찍..."
"...."
금새 시무룩해 지는 아이를 달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게...사실이니까
강아지는 빨리 죽어
그게 사실이야
나는 그렇게 말한다.
나는 어른이니까...
-나는...이제 아이들이 싫진 않다.
해가 저물었고 그녀가 나타났다.
꼬마가 자주 가는 놀이터였는 지 그녀가 금방 찾아왔다.
있던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했다.
아이가 주춤거리다 처음처럼 손을 내민다.
나는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금방 손을 잡아 주었다.
성큼성큼 걷는가 싶더니 그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한다.
저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던 아이가 내게 소리쳤다.
"아저씨, 잘가!"
오늘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강아지를 찾아볼까 한다.
사슴을 닮은, 흰색털을 가진 꼬마로...
-나는...어쩌면 아이들이 좋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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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
"무슨 생각 하세요?"
무슨 생각을...하고 있었더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종종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그런 경우에 나는 항상 텅 빈 상태에 이른다.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잡생각 때문에 고생한다는 얘길 들을 때 마다,
나는 그런 쪽으로 나가는 데도 별 지장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곤 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기 때문에 나는
조금은 신경써서 어린시절을 더듬어 봤다.
어릴 때, 나는 지나치게 말많은 녀석이었다.
이맘때쯤이면 추위에 양 볼을 빨갛게 해서 다녔고, 장난도 더럽게 많이 친
데다가 웃을 땐 멈추지 않아서 고생한 적도 많았고, 더구나 그 때의 난,
굉장한 울보였다.
벽에 낙서하는 걸 잘했고, 싸움질은 못 해서 약골이었지 아마...
비위가 약해서 친구들이 귀뚜라미 잡아 괴롭힐 때 옆에서
게워낸 적도 많고, 그리고...
더 이상 하다간 바닥까지 드러날 것 같아 나는 그만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절대..."
할 생각이란 분수처럼 넘쳐나서 마음은 항상 윤기있고, 머리는 항상
가득차 있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는 게 새삼스러울 건 없는 일이다.
"쿡"
그래도 조금은 우습다.
예전의 나는...
"내 앞에서 웃는 거 처음인 거 알아요?"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녀가 잠에서 깨듯이 말했다.
내가...잘 웃지 않는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이전의 어느누구도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진 않았으니까...
"가끔은 그런생각도 해 보세요"
"....?"
"말도 안 되는 생각. 비 오는 날 감상에 젖어 보기도 하고, 봄날에
받을 사람 없는 꽃을 사 보기도 하고, 무지개를 보고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느껴
보기도 하고, 수호령이 있다고 치고 허공에다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그리고...산타를 믿어요 앞으론 조금만 더 '인간'처럼 살아요"
인간다운 생각을 해 보라...
어렵지 않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원래부터 그런 조금은 말이 안 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이름이 뭡니까?"
내가 그녀의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걸 난 왜 몰랐을까....
마음이 비어있어서 였을까...
"J에요. 여태 안 물어봐서 섭섭했는데, 지금에야 물어보네요"
'그녀의 이름이 뭐지?'
그게 내가 처음으로 한 '인간다운' 생각이란 걸...그녀는 아마도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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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치료비 명목으로 내게 도와달라는 말만 하고 그녀가 끌고 온 곳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곳이었다.
공원...
그것도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의 공원...
"저게 좋겠네"
"도대체..."
"쉿"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나에게 주의를 주는 그녀의 차림새는 온통 검은색
의 옷에 선글라스, 렌턴으로 이루어진, 전체적으로 보면 흡사 도둑이라도 연상시킬
만한 그런 차림이어서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고만고만한, 어린아이의 키만한 활엽수의 줄기를 붙잡고 그녀가 만족스러운 듯
묘한 웃음을 지었다.
"크리스마스가 이틀 남았는데 트리라도 있어야죠"
"?"
"잠깐만 빌려가요"
비어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져온 검은 가방 안에서 그녀가 톱을 꺼냈다.
교과서가 떠오르고, 경찰서가 떠오르고, 유치장이 떠오를만큼 난 모범생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톱을 받아 쥐었다.
쓱석쓱석
어디선가 캐롤송이 들려온다.
뮤직박스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련하다.
이름모를 레코드점, 혹은 꼬마의 흥얼거림, 아니라면 정말로 오르골 소리던지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들려오던 그 소리는 더 커지지도, 더 작아지지도 않고
들려왔다.
나무를 베다 잠시 허리를 펴고 그녀를 힐끗 보았다.
즐거움으로 인한 허밍.
그녀의 입이 달싹이고 있었다.
내가 여태껏 멀리라고 생각했던 캐롤송의 그 일정한 리듬에 맞춰서...
"다 됐어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다 되었다는 눈빛을 보내고 나무를 어깨에 들러메었다.
아무리 그래도...도둑질이란 건 처음이다.
아주 잠시의 시차였다.
어느샌가 안면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닌,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겨지는
렌턴의 빛이 닿아 부서졌다.
"누구여?"
공원지기다.
그녀와 나는 고개를 한번 마주 끄덕이곤 그것을 신호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를 메고 뛰는 내가 느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녀가 계속 무언가를 던질 때
마다 공원지기가 곧잘 넘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여유있게 준비해 왔던
트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 서라"
헐떡이며 달려오는 공원지기를 기분좋게 제치고 우리는 신나게 질주했다.
도둑질...
그런데 이상하게 범죄라는 생각이 들기보다...기분좋은 간지러움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아마도 오랜만에 맛보는 스릴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 감히
생각해 본다.
그 날 집에 가는 길에 그녀에게서 들었던 캐롤송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내 입이 멋대로 흥얼거리곤 있었으나, 그날만은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집에 갈때까지 나를 쫒아왔다.
이름모를 레코드점, 혹은 꼬마의 흥얼거림, 아니라면 정말로 오르골 소리같던
그녀의 허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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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어요?"
"아뇨"
"가족들, 혹은 친구들도?"
"좋다고 느껴본 적은 있지만 사랑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병이 거의 나았지만, 완치되려면 한번쯤은 해 봐요
그거...굉장한 환상을 심어주는 거라서요
아무래도 세상의 모든 병은 '사랑'보다 더한 약은 없겠지만
이 병은 더 그래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와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고, 그래서 내 껍질 안은
여전히 덜 익어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사랑하거나 사랑받기에 나는 너무...
너무 웃자라 버렸다.
이른바 시기를 놓친 불량품 내지는 재고품 같은 것이다.
내가 바보같은 일들로 푸른 시절을 놓쳤듯이...
"나는 어쩌면...영원히 완치되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것이 의사아닌 의사인,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그런데...다 나았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녀가 잠시 멈추었다.
그 순간의 정지는 뭔가를 발각당했을 때의 당황이나 뜨끔함과는 달리 그저
순수하게 내 말을 되새기기 위함인 것 같아서 나는 그나마 안심했다.
의사란 환자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는 법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죠, 눈에 무언가가 나타나게 되면 알 수 있어요"
"무엇말입니까?"
"당신이 지켜왔던 메마름의 시체들을 마치 승리자처럼 움켜 쥔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요.....좀 더 짧게 말하자면,"
그녀는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난 뒤에 큰 소리로 외쳤다.
눈이 순간 반짝이는가 했다.
"'환상'이라는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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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
크리스마스 이브...
난 꿈을 꾸고 있었다.
6마리의 사슴들이 이끄는 썰매를 타고 온 산타가 내게 말을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적어도 그런 말쯤은 해줄 것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꼬마야"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산타의 모습이 얼핏 보니 날 원망하는 것도 같고 조금은
슬퍼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나는 조금 미쳐버린 것만 같다.
꿈에서 깨었는데 그가 그대로 있다.
그는 어릴 때 꿈꿨던 것보다 더 야위었다.
나는 어렸을 때 한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지금 꿈에서 깬 나의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는 그는
겉모습만은 분명한 산타였다.
그가 나를 돌아보고 웃는다.
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깼구나"
나는 아마도 기절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던 모양이다.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그는 두렵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그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있을 것만 같다.
무슨말이든 해야겠다.
"웬일이십니까?"
진정으로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는 말없이 웃으면서 내 손을 자신의 수염에 갖다대었다.
"만져지는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환상이라 믿었던 것이 실체가 되어 나타난 데 대한 묘한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이윽고 그에게서 아주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건 내가 어디선가 느낀 것과 같은 느낌이어서 나는 아련히 향수에 젖었다.
내 주위에서 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마법...
"치유되었네"
치유?
나는 그때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J를 아십니까?"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느꼈지만 내 병아닌 병을 공유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혹시 산타가 그녀의 부탁으로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산타가 웃었다.
대답은 그걸로 만족했다.
산타가 사라진 걸 눈치챘고 내 눈이 창문으로 향했을 때 안타깝게도 나는 사슴과
썰매를 볼 수는 없었다.
그게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는 지, 아니면 역시 모두가 꿈이었는 지 알지
못한 채로 난 곧 잠에 빠졌다.
지금은 산타가 싫지는 않다.
예전에 나는, 그를 그리워하다가 미워하게 되버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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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아침 일찍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선물을 줄까 했다.
그래서 내 손에는 지금 뭔가가 들려있다.
꽃집 아가씨가 이야기해 줬는데, 이름을 잊어버린 하얀 꽃이다.
문을 몇 번 두드리다가 여느때처럼 열린 문을 열고 그냥 들어갔다.
문을 열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불러보다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던 방으로 향했다.
누가 보라는 듯이 파티준비가 되어 있었다.
테이블의 크리스마스 만찬과 와인과 촛불...
그리고...그녀대신 놓여있는 노란 메모지를 나는 떨리는 눈으로 읽었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글씨체로 써 있는 '처방전'이라는 글씨 아래로 꼭꼭 눌러쓴
볼펜의 흔적이 보인다.
'사슴을 보내주세요'
그랬다.
그녀는 크리스마스와 함께 온 사슴이었나 보다.
썰매를 끌기 위해 이제는 돌아가야만 하는...
어느샌가 눈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것은 금방 떨어져 버렸으니까...
톡...
눈물을 흘리는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눈에서 무언가 나타나면 다 치유된 것일 거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눈물이 그녀가 말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다 나았다는 것은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다 치유되었다고 말하기에...나는 꽤나 아팠기 때문에...
그건 내게있어 마지막 처방전이 되었다.
-하아...정말이지 지독한 크리스마스다.
이후로...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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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얼마나 지났는 지, 그 일이 제대로 잊혀졌는 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그저 겁먹은
아이처럼 하루하루를 대책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내게 조금이라도 달라진 게 있다면, 공상이 늘었다는 것 뿐이다.
정말로 어느날인가는 그녀의 집이 있던 그 길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그 집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수없이 보았지만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숱한 마법처럼 그녀의 집도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집터까지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곳은 공사장이 되어 있었다.
인부에게 물어보니 병원이 들어설 것이라고 했다.
곧...
나는 그곳이 갖고 싶어졌다.
"당신은 병에 걸리셨군요"
그가 뒤를 돌아다 본다.
그는 예전의 나처럼 사막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른의 눈...
입속에 전에 없는 텁텁함과 메마름을 느끼곤 난 곧 입술을 축였다.
"꽤 심각한데..."
내가 많이 능청스러워 졌다는 걸 난 인정한다.
아마도 나는 더 많이 능청스러워 져야 하겠지
내 앞에 선 그에게 별을 그려줘야 할 지도 모르고, 어디서 온 건지 모를
꼬마아이와 대화를 시켜야 할 지도 모른다.
난 그에게 산타를 데려다 주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환상처럼 사라져 버리진
않을테다
"병...이라뇨?"
그는 의아해 하는 눈초리다.
의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모르겠습니까? 전 알겠는데요"
난 자연스럽게 그를 내 병원으로, 아니 예전 그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이제 말할 차례인가...
"당신이 걸린...환상불감증 말입니다
제가 치료해 드리죠"
당황함에 우뚝 멈춰선 그에게 나는 이어서 말했다.
"물론 무료입니다"
그의 발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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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처럼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언젠가 오르골 소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캐롤만큼이나 따뜻해서 하마터면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착각할 뻔 했다.
그 주인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 환상을 불러 왔나요?
그리고 그 환상이 아직껏 머물러 있는가요?
별을 그려보세요,
아이와 대화해 보세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세요,
사랑을 해 보세요,
그리고...누군가에게 환상이 되어 보세요"
그 목소리는 다 나으면 꽤나 아프다는 걸 이야기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다 나았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죠?"
환자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나는 치료중이었던가 보다.
"그건 말이죠, 눈에 무언가가 나타나게 되면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니요?"
"메마름을 벗어난 마음으로 부터의 자유"
나는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난 뒤에 큰 소리로 외쳤다.
눈이 순간 가슴이 욱씬하는 걸 느꼈다.
"'환상'이라는 것이요"
환상같은 지난 크리스마스의 일주일...
현실에서의 환상은...그렇게 아픈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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