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액운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재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그런 날 말이다. 종국에 가서
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운수 더러운 날. 왜 액운이 끼였다고 표현하
는 그런 날 있지 않은가.
형순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일요일이었지만 남편은 아침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동호회 사람들과 등산을 갔을 테지만, 일
언반구도 없이 사라진 남편에 대해 형순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깨우지 않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
지만, 어제라도 자신에게 말했어야 했다.
이건 기본적인 예의 문제였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사랑니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치과치료를 받았어도 전혀 내색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형순이 카드 명세서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남편은 놀랄 정도로 무덤덤하게대답했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몸에 깊이 베인 습관이었다. 부부라면 소소한 것마저도 공유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형순에게 남편의 행동들은 짜증을 넘어서 스트레스로까지 다가왔다. 형순은 소파에 앉아서 티비도 켜
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생각하면 할수록 심각한 결론으로 치달았
다.
“엄마, 왜 그러고 앉아 있어”
딸 영미가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로 나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형순이 영미를 쳐다봤다. 입덧 한지가 엊그
제 같은데 어느새 아이의 가슴이 불룩하다. 잠옷을 입었지만 드러난 굴곡들로 인해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젖
먹이 꼬마는 없었다.
“배고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부추 전 먹고 싶어”
영미가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그 부추 전 이었다. 형순은 기분전환도 할 겸 외출을 하기로 결심했다.
영미의 손을 잡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빽빽하게 들어찬 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
런지 주차장 전체가 만원이었다. 차에 다가갈수록 형순의 가슴속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주차해 놓은 통로 쪽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발, 어떤 새끼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내부사람 짓 이예요, CCTV 화면에 안 잡히는 차들만 골랐어요”
“저기, 무슨 일이시죠?”
형순이 다가가자 욕설을 하던 남성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어떤 후레자식이 싹 다 긁고 갔어요”
일렬로 늘어선 차들에 하나같이 굵은 줄이 그여 있었다. 뒤 트렁크부터 범퍼까지 날카로운 뭔가가 모조리
훑고 지나간 상태였다.
“아...”
자신의 경차도 그 속에 포함된 것을 확인하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주차장을 빠져
나가자, 저만치 순찰차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범인을 찾아내서 변상을 받을 거라는 희망은 가지지 않
았다. 혼자였으면 못하는 욕이라도 내뱉었겠지만 영미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형순은 부동산에 잠깐 들른 다음에 마트로 갔다. 부동산에선 여전히 소식이 없었고, 마트의 물가는 삼일 전
에 비해서 또 올라 있었다. 오천 원이면 충분하리라 여겼던 부추와 홍합의 가격이 팔천 원 가까이 육박하
자 형순의 앙다문 입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삐져나왔다.
"아줌마, 계산 안 하실거예요?"
펑퍼짐한 몸매에 뿔테 안경을 걸친 점원이 신경질적으로 재촉했다.
"잠깐만요, 동전 좀 찾구요"
형순은 걸치고 있던 가디건까지 벗고서 동전을 찾았지만 애초에 존재여부가 불투명했던 동전은 쉽사리 발견
되지 않았다.
"거 좀 빨리빨리 합시다"
형순의 뒤로 어느새 서너명의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대체 지갑을 왜 안 가져 왔을까. 평소 충동
구매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돈만 들고 다니는 형순이었지만, 어느덧 그런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저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이다. 결국 포장된 비닐을 뜯어 내용물을 덜어내고 나서야
간신히 가격에 맞출 수 있었다.
"현금영수증 할게요"
"뭐라구요?"
"현금영수증 한다구요"
점원의 말투에서 묘한 불쾌감이 전해져왔다.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이런데 처음 와 보셨어요?"
형순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 하자 점원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거기 번호 누르세요"
"이봐요! 당신.."
"아 그냥 닥치고 빨리 좀 갑시다"
형순의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형순이 돌아보자 어느새 십여명으로 불어난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카츄 빵을 손에 든 꼬마얘 까지도 자신을 원망하듯 쳐다보자 맥이 탁 풀렸다.
'돼지 같은 년이...'
집으로 오는 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동산만 아니면 가지 않았을 곳이었다. 점원의 눈알을 세 번째로
뺐다가 끼웠을 때 형순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영미에게선 아까부터 싸늘한 침
묵만이 풍겨져 나왔다. 자신이 창피했을 것이다. 딸의 입장이 이해는 가면서도 못내 섭섭했다.
“쿵”
순간 육중한 충격에 형순의 고개가 속절없이 젖혀졌다. 놀란 영미의 눈동자가 형순을 향한다. 정말 오늘 무
슨 날인가보다. 형순이 재빨리 앞쪽을 쳐다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백미러에 궁시렁 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사내 하나가 비쳤다.
“아줌마 내려 봐요”
단정히 깎은 스포츠머리에 갈색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였다. 40대 초반인 형순 보다는 어려 보였지만, 그
리 차이가 날 터울은 아니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할게요, 아줌마가 사과하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험회사 부르면 되니
까요”
사내의 말에 형순의 뱃속에서 뜨끈한 뭔가가 울컥 솟구쳤다.
“그쪽이 제 차에 박았잖아요, 지금 누구더러 사과 하라는 거죠?”
감정이 격양된 듯 커다란 소리가 튀어 나왔다.
“제 말을 못 알아 들었군요, 전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사과를 요구하는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불현듯 사내의 전두엽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사과를 해야지 내가 왜 하냐구요!”
“아줌마, 시비 그만 거시고...”
“지금 누가 시비를 거는데요, 그쪽이야말로 헛소리 그만하시고 전화번호나 주시죠”
두 사람 근처로 어느새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대부분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고, 몇몇은 같은
동에 사는 이웃이기도 했다. 형순의 시선에 자주색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의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옆
집 사는 경주 엄마였다. 떨떠름한 느낌과 함께 눈앞의 사내에 대한 적개심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전화번호 줄게요..”
사내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실룩 거렸다.
“아줌마가 사과하면요”
“아저씨 정신 나갔어? 우리 엄마가 왜 사과를 해야 되는 건데? 아저씨가 멀쩡히 있는 우리 차에 냅다 들
이 박았잖아! 아저씨 치매야? 방금 전 일도 기억 안나나 보지?”
형순의 머릿속이 분노로 새하얗게 변해있는 사이 영미가 사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사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눈꺼풀이 반이나 덮여 내리자, 얇게 변한 눈 속에서 사나운 살기가 뿜어
져 나왔다.
“가만히 있어, 어른들 일에 나서는 거 아냐”
형순의 영미를 나무랐지만, 내심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서 영미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오면 겁낼 줄 알아요? 정신병원이나 가보...컥”
사내가 순식간에 영미의 목을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안무라도 추는 것처럼 그의 손이 재킷을 쓰다듬자 잭나
이프 한 자루가 어느새 손에 들려 있었다.
“아악! 영미야, 오 맙소사. 무슨 짓이야 미친놈아!”
“꺽...억..”
사내의 억센 손줄기에 영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영미가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을 쥐어뜯었지만, 그
것은 요지부동 이었다. 형순이 사내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팔에 매달렸다.
“철컥”
어느새 튀어나온 잭나이프의 칼날이 형순의 턱밑으로 파고들었다. 사내는 영미를 아무렇게나 밀어버리고선
남은 손으로 형순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악”
두피가죽이 생으로 뜯기는 듯한 고통에 형순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
들었다. 단순한 접촉사고로 생각했는데, 칼이 튀어 나오고 비명이 터지자 모두가 꼼짝도 않은 채 사내를 지
켜봤다.
“잘 들어, 예전 같았으면 면상에 그림이라도 하나 그려 줬을 거야”
목에 닿아 있는 칼날에서 차가움 이상의 한기가 느껴졌다. 머리채를 붙들린 형순의 눈에 잔기침을 해대는
영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사과는 필요 없어, 그렇다고 변상을 안 하겠다는 말은 아냐. 그냥 좆같은 년들 만났다고 넘길 테니
까 더 이상 엉겨 붙지마”
형순이 칼날을 피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기 아줌씨들!”
사내의 잭나이프가 하얗게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얼굴 모조리 외우고 있으니까, 혓바닥 함부로 놀리면...”
사내가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로로 긋는 시늉을 했다.
“장담하건대 편하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 기억력을 시험하고 싶다면 한 번 해봐”
사내가 형순을 놓자, 뽑혀나간 머리카락들이 꽃잎처럼 흘러 내렸다. 고통에 비해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형순은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멍하니 주워들었다. 사내가 떠나고 난 뒤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정확하게 떠오
르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테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주위에 있
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꿈속을 헤매는 듯이 몽롱했다.
형순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고 나서였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등산복 차림의 상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형순을 바라보자 그만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오전까지 가졌던
남편에 대한 원망은 봄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형순이 자신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자 상준은 당혹해 하
면서도 형순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한참을 울던 형순이 입을 열었다. 주차장사건부터 해서 마트, 그리고 칼로 협박하던 사내까지 남김없이 털
어 놓았다. 얘기를 듣는 도중에 남편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사내가 영미의 목을 조르던 부분에서
는 굵은 눈썹이 위아래로 크게 꿈틀거렸다.
"영미는 어딨어?"
"방에 있을 거야..."
남편이 벌떡 일어섰다. 영미의 방에 들어간 남편이 일분도 되지 않아 다시 거실로 나왔다.
“전화번호 받은 거 이리 줘봐”
남편도 영미의 목에 남겨진 손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뱀처럼 영미의 목을 휘감고 있
었다. 붉게 물든 손가락 하나하나에 사내의 더러운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근데 신고하면 죽여 버린다고...”
“영미 상태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뭐?”
“얼마나 악질적인 놈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넘어가면 안돼, 당신이나 나나 영미 부모 노릇 계속 하고 싶으
면 반드시 신고해야 돼”
“당신이 못 봐서 그래, 사람들 없었으면 진짜 찔렸을 수도 있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형순은 불안해하면서도 사내가 내던지고 간 명함을 건네주었다.
“천도 캐피탈... 상무 박용식?”
상준은 곧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준의 모습에 형순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형순
이 본 사내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애당초 신고 따위가 겁났다면 결코 칼을 꺼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화를 하는 상준을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충격에 빠져 있을 영미를 떠올리자 그마저도 쉽
지 않았다. 상준이 한참 만에 통화를 끝내고 형순에게 고개를 돌렸다.
“동호회에서 알게 된 형사가 하나 있는데, 전화해 보니까 걱정하지 말래”
“걱정하지 말라고?”
“응, 양아치 같은 놈들이 그냥 겁주는 거래.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일이 벌어지나봐”
‘정말 그랬으면 좋으련만’
상준은 형사의 말에 심히 안심하는 눈치였지만, 형순은 그렇지 못했다. 까닭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
라 왔다. 사내의 가늘게 희뜬 두 눈이 형순의 전신을 훑는 듯 했다.
다음날 형사가 초인종을 누른 시각은 점심도 먹지 않은 오전이었다. 남편은 출근했지만, 영미는 방문을 걸
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 할때 형사가 찾아 온 것이다. 형사는 건장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호남형 이었다. 자신을 한지욱으로 소개한 형사는 뜨거운 커피를 서너 모
금 만에 비워버리곤 수첩을 꺼내들었다.
“칼로 협박하고 따님의 목을 졸랐다 이거죠?”
“네”
“거기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협박하구요”
“네, 맞아요”
“전형적인 동네 건달입니다, 아주머니께서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진짜 프로들은 그런 식으로 겁
을 주진 않거든요”
“진짜 프로들요?”
“프로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냥 또라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앞뒤 안가리고 덤벼드는 무
식한 놈들 있잖습니까”
“정말 그럴까요?”
“네, 저만 믿으세요. 그냥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참 명함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여기 있어요! 명함”
형사는 명함을 잠시 훑어 본 뒤 형순에게 입을 열었다.
“따님은 학교에 갔죠?”
형순이 고개를 저었다.
“창피하다고 방에서 안 나오네요, 학교에 말해놓긴 했는데 걱정입니다”
“제가 잠시 따님을 봐도 될까요?”
“영미를요? 아, 잠시만요”
형순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영미의 방문이 삐그덕 열렸다. 폴라티로 목 전체를 꼼꼼히 감싼 영미가 쭈삣
쭈삣 거실로 나왔다.
형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삼일이나 지난 후였다. 손자국이 눈에 띄게 희미해지자 영미는 학교에 나
갔고, 형순의 마음도 안정을 되찾아 가던 중이었다.
“한지욱 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박용식이 때문에 말인데요”
“박용식요?”
“칼들고 협박하던 놈 말예요”
“아, 네...”
“약간 문제가 생겼습니다”
뜬금없는 형사의 말에 형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제라뇨?”
“이 놈이 오리발을 딱 내밀고 있어요, 자기는 죽어도 그런 적이 없답니다”
“말도 안 돼”
“번거로우시겠지만 목격자 진술이 필요해요, 이 놈 배짱이 두둑해서 웬만한 말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네
요”
“아...”
수화기를 든 형순의 팔이 파르르 떨려왔다.
“목격자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해야 합니다, 구경꾼이 많다고 하셨으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석방 된다면 조
금 위험할 수도 있어요”
형사가 이웃 나라 뉴스라도 전하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이죠?”
“왜 일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프로들 말이예요”
“괜찮을 거라면서요!”
가슴을 졸이며 형사의 말을 듣던 형순이 소리를 빽 질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괜찮습니다, 제 실수도 있는 데요 뭘”
형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명만 있으면 됩니다,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에 한명만 진술해 주면 최소 오년이상은 감옥에 쳐
넣을 수 있어요”
통화를 끝낸 형순이 습관적으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냥 풀려나게 하든
지 아니면 오년간 감옥살이를 시켜야 했다. 지금 풀려난다 하더라도 해코지를 안 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경
찰서를 나온 사내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숨어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사내는 형순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잭
나이프를 정성스레 닦고 있을 것이다.
문득 남편에게 말을 꺼낸 사실이 후회됐다. 애당초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사내와의 인연은 며칠 전으로 끝
났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감옥살이를 시킨 다음에 멀리 이사 가서 사는 것이
다. 때마침 집도 부동산에 내놓질 않았는가. 그곳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터였다. 우리나라의 수사제도가 그
렇게 허술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심이 서자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누구세요”
“저예요, 705호 영미엄마”
문이 열리고 곱슬곱슬한 파마머리의 여인 한명이 형순을 반겼다. 여인은 형순이 들어오자 며칠 전의 사건
을 냉큼 화젯거리로 올려놓았다.
“진짜 무슨 일 나는 줄 알았어,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구”
과일쟁반에 한과까지 한상 차려지자 형순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 놈은 잡혔어?”
“네, 지금 경찰서에 있어요”
“흥, 쌤통이다. 그런 놈은 아주 그냥 푹 썩게 해 버려야 돼”
형순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같은 동에 사는 명희엄마였다. 반상회 날이면 어김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분기
탱천해 하던 그녀였다. 관리비부터 시작해서 물탱크 청소문제, 입주자들의 조망권 문제에까지 불만을 터트
리던 그녀였다. 그녀의 당찬 성격에 형순의 가슴속까지도 시원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명희엄마가 썰어놓은 과일 조각을 먹는 틈을 타 형순이 말을 꺼냈다.
“응?”
“증거가 부족하대요, 목격자 진술이 필요하다고...”
증거가 부족한 것이 마치 자기 잘못인 냥 형순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그냥 봤던 사실만 그대로 얘기해 주시면 돼요”
명희엄마는 말없이 과일만 씹고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술 끝으로 형순의 신경이 집중됐다.
“나도...해주고 싶은데, 요즘 우리집 분위기가 좀 안 좋아”
그녀는 형순의 시선을 피한 채 손가락으로 바닥 장판을 쓱쓱 문질러댔다.
“명희아빠 건강도 좀 안 좋고, 영미엄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얘들이 셋이나 있잖아..."
형순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결론은 꺼림칙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까지는 분명 희망이 있었다.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집을 나섰을 때도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희망
을 버리진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사방이 불그스름해졌을 때 형순은 다섯 번째로 들렀던 현수네 집에서 나왔다. 지평
선 끄트머리에 샛노란 노을이 잉크처럼 번져 있었고, 아파트 단지 전체가 음울한 빛깔에 깔려 있는 초저녁
무렵이었다.
“띵동”
형순이 마지막으로 207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혼자살고 있는 이혼녀의 집이었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으
니 분명히 도와줄 거라고 믿으며 남겨둔 히든카드였다. 두 번째로 초인종을 눌렀을 때 현관문 아래로 새어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형순은 한번 더 눌러볼까 망설이다가 그냥 돌아섰다. 누가 전해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미 형순의 방문목적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방은 이제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고, 형순이 지나
갈 때마다 복도 등이 하나씩 켜질 뿐이었다.
집으로 오자 아무도 안온 듯 불이 꺼져 있었다. 열쇠를 꺼내 구멍에 꽂으려는 순간에 옆집의 문이 눈에 들
어왔다.
‘그래, 경주 엄마도 있었지’
자주색의 주름치마를 입고 있던 경주엄마가 떠올랐다. 퀭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녀가 떠오르자 형
순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차마 그녀에게는 부탁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혹시...’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형순은 정말로 내키지 않았지만 한 번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초인종의 감촉이
괴물의 눈알을 누르는 것처럼 소름이 돋아왔다.
“띵 동”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2. 기억
대략 십년 전쯤일 것이다. 영미가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니 아마 그쯤 되었을 것이다. 보다 나은
학군을 찾아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형순은 경주엄마를 처음 만났다. 새로 분양중인 아파트인지라 한창 이
삿짐센터의 차들로 북적거릴 때였다. 형순이 이사를 오던 날 공교롭게도 옆집 경주네도 이사를 왔다. 먼저
온 형순 탓에 두어시간이나 컨테이너차를 대기시켜야 했지만, 군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형순이 본 경주엄마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뽀얀 피부는 처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웠
고, 엄마를 쏙 빼닮은 경주도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아마도 경주와 영미가 친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동갑 터울에 새로 입학한 초등학교까지 똑같자, 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다녔다.
경주아빠는 평범한 회사원 이었는데 주말만 되면 엽총 한 자루를 들고서 이 산 저 산으로 돌아다니는 특이
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밀렵이 불법인 것도 모르는 형순의 가족에게 꿩이며 토끼 고기를 나눠주던 그가
떠올랐다. 제법 솜씨가 좋은 모양인지 멧돼지를 잡아오는 날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형순의 남편까지 나서
서 피에 절은 포대자루를 옮겨오곤 했었다.
다시 그 날로 돌아간다면 되돌릴 수 있을까. 형순은 가끔씩 그날을 떠올려 본다. 경주와 영미가 안방에서
놀고 있었고, 형순은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그야말로 평범한 날이었다. 별안간 찢어지는 폭발음에 형
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가자 바닥 곳곳이 불구덩이였다. 거칠게 찢겨 발겨진 스프레
이 통이 나뒹굴고 있었고, 아이들은 기절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영미야!”
형순이 재빨리 영미를 들쳐 업고 거실로 나왔다. 다리에 붙은 불을 자신의 겉옷을 벗어 대충 끈 뒤 다시금
안방으로 뛰어갔다. 경주가 불구덩이 속에 얼굴을 처박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경주를 일으키려던 찰나
막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한 도화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미가 좋아하던 세일러문도 보지 않은 채, 학교
숙제로 그린 가족그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당시의 형순은 불가사의한 힘에라도 이끌린 듯 도화지
를 집어 들었었다. 손바닥을 털어 도화지에 붙은 불을 끈 뒤 이빨로 그것을 물었다. 그러고 나서 경주를 안
고 거실로 나왔는데, 경주의 얼굴은 이미 처참하게 훼손된 후였다. 한쪽 눈꺼풀은 거진 타버려서 희멀건 동
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인중 쪽으로 뒤집혀 올라간 입술에서는 기괴한 수포들이 울룩불룩 솟아 있었
다.
충격을 받은 형순이 멍하게 있는 사이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폭발음을 듣고 들어 온 사람들이 안방에 붙
은 불을 끄고 119까지 불러 주었지만, 형순은 경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허겁지
겁 병원으로 달려 온 경주 엄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형순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신이 도화지를 줍지 않고 경주를 먼저 빼냈다면 괜찮을 수 있었을까. 수백
번 생각해 봐도 대답은 ‘아니오’였다. 2초도 안 되는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경주의 얼굴이 달라질 것 같
지는 않았다. 수포 한 두개쯤은 없앨 수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화상의 치료과정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형순도 잘 안다. 종아리에 난 손바닥만한 화상 치료에도 영미
는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댔었다. 하물며 경주는 오죽했을까. 둘은 같은 병원에 입원했고, 형순은 경주의
치료과정을 여과 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오랜 만이네요”
경주엄마의 건조한 음성에 형순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습한 공기와 함께 퀴퀴
한 냄새가 확 끼쳤다. 곰팡이 냄새에 옅은 지린내를 섞어 놓은 듯한 악취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거실로 올
라서자 기이한 광경들이 나타났다.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가구에 나일론 비닐들이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티비, 에어컨, 소파 할것 없이 모조
리 불투명한 비닐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전화기는 아예 코드가 뽑힌 채로 비닐에 둘둘 말려 있었다. 경계심
을 품고 형순이 주위를 살폈다. 전체적인 골격은 자신의 집과 비슷했지만 을씨년스러운 내부는 완전히 달랐
다.
형순이 어정쩡하게 서 있노라니 그녀가 앉을 것을 권했다. 바닥에 앉자 엉덩이를 통해 서늘한 기운이 전해
져 왔다. 그러고 보니 집안 전체가 싸늘했다. 형순의 머릿속에 비닐로 덮여 있을 보일러가 떠올랐다.
“대접할게 이것뿐이네요”
그녀가 오렌지 주스 한잔을 건네고는 형순의 맞은편에 앉았다.
“괜찮아요”
형순이 건네받은 오렌지 주스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근데 무슨 일로...”
그녀의 시선이 형순의 주스 잔으로 향한다.
“자주 찾아왔어야 했는데, 살다보니까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그녀가 침묵하자, 형순이 놓았던 잔을 슬그머니 다시 들어 올렸다.
"경주는 잘 있나요?”
억지로 주스를 한 모금 밀어 넣자 식도 입구에서부터 거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주스가 상하거나 하진 않
았겠지만, 부패한 우유를 마신 것처럼 기분이 메스꺼웠다.
“경주야, 나와 보거라. 영미아줌마 오셨다!”
그녀가 형순의 뒤쪽으로 고함을 치자 당황한 형순이 그녀를 말렸다.
“놔두세요, 자는가 봐요”
그녀가 아랑곳 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
“몇 년 만에 손님이 오셨는데, 계속 방구석에 숨어 있을 작정이냐”
형순이 한 번 더 말리려는 찰나에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경주의 방은 형순의 뒤편에 있었지만 정면에 매달
린 전신거울로 인해 모든 것이 비춰지고 있었다.
“스륵”
시커먼 뭔가가 방바닥을 쓸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머리카락인 것을 깨달았을 때 형순의 입은 저절
로 벌어졌다. 그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듯 시커먼 머리카락들이 허리와 다리를 지나 바닥까지 내려와 있
었다. 기다란 레이스 치마 역시 발끝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그것이 머리카락과 함께 바닥을 쓸자 기분 나
쁜 마찰음이 생겨났다. 발이 보이지 않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귀신같은 경주의 등장
에 형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녕...하세요”
경주의 입에서 철판 긁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두암 말기 환자가 성대에 기계를 연결해서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경주의 음성에 형순의 목덜미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별안간 이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맹
렬히 솟구쳤다.
“그...그래, 오랜만이구나..”
잠시 멈췄던 경주가 슬금슬금 걸어 형순을 지나쳤다. 제 엄마 옆에 선 그녀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헉’
경주의 얼굴에 형순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의료용 마스크를 쓴 상태였지만, 두 눈만은 오롯이
드러난 상태였다. 오른쪽 눈은 눈꺼풀부터 눈썹 중간까지 피부 가죽이 아예 사라진 상태였는데, 그 자리를
돌출된 안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말해 봐요”
경주엄마가 정적을 깨며 형순에게 말했다.
“다...다름이 아니구요, 목격자 진술을 부탁하려고 이렇게...”
“무슨 말이죠?”
형순이 경주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가서 말하면 되나요?”
“네?”
“그냥 본 대로 말하면 되냐구요”
“그...그래요..그냥 몇 마디 말만 하시면 끝납니다”
“그렇게 할게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형순이 허탈할 정도로 그녀는 쉽게 승낙했다.
“위험할 거 같아...”
조용하게 서 있던 경주의 입에서 다시금 쇳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녀는 딸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
은 채 물끄러미 형순을 바라봤다. 무심한 듯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형순은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경주는 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소독을 받았다. 검붉은 피딱지와 함께 싯누런 진물이 범벅이 된 붕대를
풀 때면 경주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었다. 소독이라고 해봐야 뭉개진 얼굴에 과산화수소를 붓는 것이
전부였지만, 장정 두 명이 달려들어야 할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소독약이 경주의 얼굴로 쏟아지면 새하얀 포말들이 끓는 것처럼 솟구쳤다. 고통이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경
주는 매번 경기를 일으켰다. 경주를 붙잡은 장정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때야 비로소 소독은
끝났는데, 어찌나 심하게 몸부림 쳤던지 경주의 환자복은 땀에 흠뻑 절어 있는 상태였다.
소독이 끝나면 간호사가 들고 있던 대바늘로 수포들을 터트렸다. 분화구처럼 부풀어 오른 수포들이 경주의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는데, 그것을 터트릴 때마다 역한 고름 찌꺼기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곤 했었다.
그녀는 그런 딸의 모습을 한 순간도 피하지 않고 함께 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새 붕대로 얼굴을 감쌀 때
면, 경주의 손을 잡고 안쓰러울 정도로 오들오들 떨어대는 것이었다. 그녀는 형순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저 꺼멓게 죽은 눈으로 형순을 바라볼 뿐이었다.
분사되는 스프레이에 불을 붙이고 놀다가 일어난 우발적 사고였다. 불씨하나가 주입구를 통해 통 안으로 들
어갔고, 압축된 가스가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 딸은 병신이 됐는데, 왜 영미는 무사한 거죠?”
경주아빠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을 때 형순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자신이 잘못한 것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해 겨울 경주아빠는 만취상태에서 도로를 건너다 덤프트럭에 깔렸다. 아파트 단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
는데, 목격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몸 전체가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펴져 있었다고 한다.
폭발 사고 후 영미는 병원에 있는 한 달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형순이 갖고 나온
그림 역시 제출 되지 못했다. 형순은 영미를 데리고 도망치듯 퇴원했고, 그 후 경주엄마와 경주를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일 년쯤 지나 경주도 퇴원했지만, 형순은 의식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그들을 피해 다녔
던 것이다.
“위험 할 것 같아”
경주가 재차 입을 열었을 때 형순이 대답을 했다.
“그렇지 않아, 모두 비밀로 하고 게다가...증인보호 프로그램도 있어”
형순이 시사 프로그램에서 들은 단어를 급한 대로 빌려 썼다. 경주가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 고요히 바라본
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떳떳하다는 표시로 경주의 허연 눈알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주었다.
형순이 신발을 신고 현관을 빠져 나갈 때 두 모녀가 나란히 서서 배웅을 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문을
닫으려는 순간에 경주가 빠르게 다가왔다.
“무슨 일 생기면 아줌마가 책임져야 합니다”
다음 날 형순은 경주엄마와 함께 경찰서로 출두했다. 이중유리로 이루어진 취재실안에서 형순을 협박하던
사내가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형사가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책
상으로 향했다.
“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구속까지 일사천리로 진행 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한형사는 경주엄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두 달이나 세 달쯤 후에 재판이 열릴 겁니다. 그때 두 번 정도만 더 법정에서 진술해 주시면 놈은 꼼짝없
이 교도소행 입니다”
“또 말해야 한다구요?”
그녀의 반문에 형순이 초조한 낯빛을 띄었다. 한형사가 형순을 한 번 슬쩍 쳐다보고는 그녀에게 또다시 넉
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간단합니다. 판사가 물어보는 대로 대답만 하면 끝납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져서 한 두 번 만에 끝내거든
요.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녀는 전혀 재밌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말없이 손가락만 꿈지럭거리고 있었는데, 지켜보던 형순도 덩달
아 침묵했다.
“알았어요”
경찰서를 나와 두 사람은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흉물스런 자국이 뒤 트렁크에 여전히 나 있었지만 형순
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데 집에 비닐들은 왜 씌워놓은 거예요?”
“사용하지도 않는 걸요, 돈도 없구요”
아뿔싸.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녀에겐 월급을 가져다주는 남편이 없다. 그녀도 별다른 직업이 없는 마
당에 당연히 돈이 부족할 것이다.
“여태껏 보험금 때문에 먹고 살았는데 이젠 그것도 거의 안 남았네요”
“아, 죄송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어디 식당이라도 나가야 되겠어요, 경주 그년이 지 아빠 닮아 고기를 좋아하거든요”
CCTV가 보이는 곳으로 골라서 주차를 마치자 둘은 차에서 내렸다. 같은 동에 사는 주민 두 명이 둘의 모습
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바로 옆에 살면서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
었다. 집에 오자 영미가 간식을 먹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와?”
“경주엄마랑 경찰서에”
“뭐? 누구랑 갔다고?”
영미는 입 안에 있던 과자 부스러기들을 마구 뱉어내며 되물었다.
“너도 가끔 경주한테 찾아가봐, 그래도 어릴 땐 친했잖니”
영미가 고개를 흔들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형순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영미가 다짜고짜 화를 냈다.
“엄마, 좀 치사한 거 아냐?”
“무슨 말이야?”
“이때까지 모른 척 하다가 필요해 지니까 찾아가고 말야”
“너, 말이 심하다”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봐! 엄마가 경주엄마라면 기분 안 나쁘겠어?”
영미의 말에 형순이 울컥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영미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야? 응? 다들 증언해주기 싫어하는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구”
“안 하면 되잖아! 누가 신고하래? 그냥 넘어 갔으면 아무 일 없잖아”
철썩. 형순이 영미의 뺨을 모질게 후려쳤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영미의 몸이 잔 경련으로 떨리기 시작했
다. 영미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형순이 넘어질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나쁜 년,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저녁에 퇴근한 상준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 물어 보았지만, 둘 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집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형순이 하루 종일 집안을 쓸고
닦자 새 집 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만족할만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저녁 무렵에 노부부 한 쌍이 방문
했는데, 시종일관 깐깐한 눈빛으로 집안을 살폈다. 형순과 상준이 열심히 입방정을 떨어댔지만, 별로 탐탁
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형순과 상준은 깨끗이 포기했다. 그들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둘의 예상과 달리, 다음 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노부부가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다. 새
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울적해 있던 형순이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머리가 허옇게 센 부동산 할
아버지한테 마구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에 영미와 상준이 돌아오자 미리 손질해 둔 소갈비를 구웠다. 영미는 여전히 뾰로퉁해 있었지만 아무
렴 어떠냐 싶었다. 상준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식사가 이루어졌다. 모두
의 밥공기가 거의 비워졌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세...”
형순이 현관문을 벌컥 열었을 때 문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
“경주...구나”
“우리 엄마 보셨어요?”
끼륵 거리는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니, 못 봤는데...엄마 아직 안 오셨니?”
경주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쓴 경주의 코 부위가 들썩거렸다. 비록 코가 있어야 할 부분
이 평평했지만 어림짐작으로 그곳이 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불에 녹아 버렸겠지만 후각은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경주가 갈비냄새에 반응을 보이자 형순이 마음을 먹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들어와, 같이 저녁먹자”
경주는 형순의 말에 선선히 따랐다. 경주가 거실을 지나 식탁 쪽으로 갔을 때 상준과 영미의 움직임이 일제
히 멈췄다.
“경주가 오랜만에 왔네, 당신도 알지? 옆집 사는 경주”
“그...그래 당연히 알지. 너 오랜만이다”
상준이 어색하게 웃자 경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영미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었는데, 상준이 툭툭 건
드리자 더듬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진...진짜 경주구나”
경주는 식탁대신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소파 전체로 퍼지자 거실 가득 그로테스
크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배가 고팠을 테지만 웬일인지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마 엄마가 걱정 됐기
때문이리라.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긴 침묵이 흘렀다. 습한 날씨에 분위기까지 고요하자 형순의 가슴속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따르르르릉”
적막을 깨고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형순이 흠칫 놀라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저 한 형사입니다”
“네, 잘 지내셨죠?”
잠시 동안 수화기에서 침묵이 흐른다.
“말씀 하세요”
형순은 상준을 바꿔 주려다가 묘한 기분이 들어 그만 두었다.
“이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참...”
그의 음성에 강한 껄끄러움이 묻어 나왔다.
“신명희씨 있잖습니까?”
“누구요?”
“진술 하러 같이 오신 분 말예요”
“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죠?”
또다시 침묵이다. 소파에 앉아 있던 경주가 고개를 들어 형순을 바라본다.
“죽었습니다”
3. 탈출
수화기를 든 형순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형순
을 움직이게 한 것은 경주의 시선이었다. 경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주시하자 형순이 억지로 입
을 열었다.
“어쩌다가요?”
“가슴에 칼을 찔렸어요, 천만다행으로 찌른 놈을 잡긴 했는데 아무래도 박용식이 똘마니 같습니다“
“...그렇군요”
형순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철저히 비밀로 했거든요.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없어요”
형순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것을 주민들 몇 명이 쳐다보고 있던 광경
이었다. 형순이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반나절도 되지 않아 아파트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
다. 진술을 부탁하기 위해 방문한 집만 해도 제법 되니 소문은 더 빨리 퍼졌을 수도 있다.
“네...”
형순의 무서울 정도로 덤덤한 대답에 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
“목격자가 있으니까 곧 자세한 정황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목격자. 목격자. 그놈의 목격자가 문제였다. 안전할거라고 장담하던 형사의 혓바닥을 다리미로 지져 버리
고 싶었다.
“혹시 가족 분들 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조회해 보니 따님이 한 분 있는 걸로 나오는데, 집으로는 아
무리 전화해 봐도 안 받더라구요”
“아뇨,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죄송한 부탁이지만 따님을 보시거든 제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직접 가야 되는 건데
갑자기 비상이 걸려서요”
그는 송구스럽다는 음성으로 형순에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그의 뒷말을 적당히 끊은 채 형순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누구야?”
상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관리실 아저씨야”
“응? 그 사람이 무슨 일로?”
“별거 아닌데, 도시가스 파이프 하나가 얼었나봐. 가스 잘 나오는지 물어보더라구”
“으...응”
형순이 눈짓을 보내자 상준이 어색하게 수긍을 해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형순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경주의 시선이 상준을 향했다가 다시금 형순을 향한다. 희멀건 안구가 또르륵 굴러가는 것을 보며
형순이 생각을 굳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주가 알게 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죽은 사실을 알면 경주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일 생기면 아줌마가 책임져야 합니다’
며칠 전 들었던 말이 다시금 귓전을 울렸다.
“경주야 일단 밥 먹자, 엄마 오늘 안 오실지도 몰라”
“......”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당분간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비밀요?”
“응,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일자리 구한다고 잠시 어디 가셨거든”
“일자리...?”
경주의 마스크가 불룩하게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두 눈 가득 의심의 눈
초리로 채워졌다.
“너...너도 알고 있었잖아. 느이 엄마 요즘 일자리 구한다고 하시는 거”
“맞아요, 근데...”
경주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형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는 사실까지 아줌마가 어떻게 알죠?”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상준과 영미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지켜만 보았다.
‘침착하자, 유형순! 이 아이는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어. 섣불리 대답했다간 금방 들통 날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오시거든 한 번 물어봐. 왜 나한테만 말했는지 말야”
형순이 입술은 다문 채 볼 근육만을 이용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경주가 돌아가자 상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경주 엄마가 죽었어”
“뭐?”
“정말이야?”
상준과 영미의 입에서 동시에 반응이 튀어 나왔다.
“아까 전화, 관리실 아저씨가 아니라 경찰서에서 걸려온 거였어”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왜 죽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살해 당했대...”
“자세히 좀 얘기해봐, 그러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살해를 당해?”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뭐?”
“당신이 그 빌어먹을 형사한테 신고했기 때문에 죽은 거라구”
“아...”
상준이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경주한테 말 안했어?”
“당신 같으면 그 상황에서 말이 나왔겠어?”
“그럼 어떡해, 어차피 경주도 알게 될 텐데”
“안전할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경주한테 말했었다구!”
버럭 고함을 지르던 형순이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아찔한 두통이 미간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할퀴고 지나갔
다. 형순의 말에 상준이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건데?”
영미가 형순에게 물었다.
“이사 갈거야. 경주에게는 며칠만 비밀로 하면 돼. 여기 계속 있다간 우리까지 위험해져”
“세상에...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아빠 무슨 말 좀 해봐!”
상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버리자 영미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쳤어, 다들 미쳤어”
다음 날 상준은 몸살을 핑계로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사실 결근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형순의 강경한 태
도에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둘은 오전에만 열 집 가까이 방문했다. 아파트든 빌라든 상관없었지만, 지금 사
는 곳과는 최대한 떨어진 곳이어야 했다.
상준의 회사야 어차피 중심가에 있었기 때문에 교통 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점심은 이동 중에 햄버거로 때
웠고,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망설이지 않고 빠져 나왔다. 아마도 집 주인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황당
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후에도 번번이 허탕을 쳤다. 상준이 관심을 보이는 곳은 더러 있었지만 형순이 마음
에 들어 하지 않았다.
늦은 저녁을 다시 햄버거로 때우고는 대방동으로 향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 집이 거의 마지막일 듯싶었
다. 신축한 지 삼년도 안 된 아파트였는데, 급매물로 올라온 것을 운 좋게 발견한 것이다.
집 주인은 사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 투자 개념으로 사둔 것을 좀처럼 값이 오르지 않자 내놓은 것이었다.
주인이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인테리어가 깔끔한 것이 형순의 마음에 들었
다. 베란다와 보일러실까지 돌고 온 상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순이 주인한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형순이 선금으로 오백만원을 내자 주인이 양도계약서를 작성해 주었다. 이제
중도금과 잔금만 치르면 계약서에는 자신들의 붉은색 인장이 찍힐 터였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도착했다. 지하주차장은 퇴근한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리저리 돌아봐도 빈자리
는 쉽게 발견 되지 않았다. 그렇게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을 때 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한형사, 그래 지금 나랑 있어. 왜?”
상준의 말에 형순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툭툭 건드렸다.
“뭐? 아, 잠깐만”
상준이 용케 알아듣고는 핸드폰의 스피커기능을 작동시켰다.
“....두 분이서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응, 볼일이 있어서 말야”
“사모님 좀 잠깐 바꿔 주시겠습니까?”
“저도 듣고 있어요, 말 하세요”
형순의 대답에 그가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그러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신명희씨 말인데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래도 부검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사인이 명확하지가 않아요. 흉부관통상으로 봤는데, 검의관 말
로는 아닐 수도 있답니다. 신명희씨 집에서는 계속 전화를 안 받구요”
“부검하는데 가족들 동의가 꼭 필요한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연고자 없는 사체의 경우에는 임의로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꺼림칙한 면이
있죠”
“그럼 일단 하세요. 제가 그 집으로 직접 찾아 가볼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날 밝는 대로 방문할 생각이거든요”
“아...네”
형순과 상준의 시선이 중간에서 얽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무슨 핑계를 대야 그가 찾아오는 걸 막을
수 있을까. 형순이 잠시 고민하느라 말이 없자 한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약간 걱정이 돼서 전화 드렸습니다”
“걱정이라니?”
상준의 반문에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전화해도 아무도 안 받길래 혹시나 했죠, 신명희씨처럼 무슨 일 생긴 건 아닐...”
“잠깐만요! 전화한 시각이 언제죠?”
“방금 전이요, 십 분도 안됐을 겁니다”
“오, 맙소사”
형순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오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형
순에게는 지독히도 느리게 보였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입술을 물어뜯으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 시간에 영미가 잠들었을 리는 없다. 늘 새벽까지 영화를 다
운 받아 보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일일까.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할 정도로 영미는 느긋한 성
격이 아니었다.
‘대체 왜 안 받은 거지? 피곤해서 일찍 잠든 걸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띵, 두둥”
그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형순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엘리베이터로 옮겨 놓자 상준이 칠층의 버튼을 눌
렀다. 칠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형순이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영미야!”
집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영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
“야 이 망할 기집애야, 집에 있으면서 전화는 대체 왜 안 받았어, 응?”
깊은 안도감이 지나간 후에는 억울한 감정이 찾아왔다.
“악, 아퍼! 왜 때리고 난리야”
형순이 팔뚝을 철썩 때리자 영미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게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것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형순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장실에 있었단 말야, 그럼 나보고 일보다 말고 전화 받으란 말야?”
형순은 밤새 뒤척거렸다. 내일 한형사가 찾아 올 것을 생각하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 정도
만 더 있었다면, 아니 하루만이라도 좋았다. 딱 하루만 늦게 온다면 그 사이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도의적인 비난은 받을지언정 법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혼자 남
겨질 경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뒤이어 떠오르는 그녀의 추악한 용모에 그런 생각은 슬그머니 사
라져 버렸다.
날이 밝자마자 형순이 침실을 빠져 나왔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뻑뻑한 눈알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그
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계획하나가 떠올랐고, 그것 외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우선 용역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인부 세 명과 용달차 한대를 요구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제가 말씀 드린 장소로 오셔서 대기하고 있어 주세요, 바로 작업할 수 있게요”
조금 특이한 요구였지만, 직원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승낙했다. 통화를 끝내고서 출근하려는 상준을 붙잡았
다.
“오늘 그 사람들한테 돈 받아서 입금 시킬 테니까 저녁에 영미 데리고 새 집으로 가 있어, 당신이 더 빨
리 마치잖아”
“벌써? 아직 가구도 안 옮겼잖아”
“옮길 거야, 맨바닥에서 자게 하진 않을 테니까 내 말대로 해”
상준이 미덥잖은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
“그냥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는게 어때?”
“당신이 말해 준다면 기꺼이 찬성 하겠어”
“아니다, 그냥 새 집으로 갈게”
상준과 영미가 나가고 나자 형순이 다시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CF에서 자주 들어 봤던 클래식 선율이 흘
러나오고 잠시 후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영미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아무도 없어요, 학교에 간 것 같은데 불러도 대답이 없네요”
“그래요? 이거 어쩐다...그래도 일단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따가 밤에 와보세요, 고등학생들 보충수업 여덟시 넘어서 끝나거든요. 지금 와봤자 헛걸음
만 할 텐데요 뭘”
“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찰칵. 한형사와의 통화를 마친 후에도 형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노부부에게서 오전까지 입금을 약속 받
고 나자 일이 술술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용도실에 처박혀 있던 박스들을 꺼내 귀중품부터 차근차근
챙겨 넣었다. 장식품이나 전시된 물건들은 가급적 피하고 서랍이나 장롱속에 있는 것들을 위주로 차곡차곡
담아 나갔다.
안방과 영미 방에 있는 옷들을 모조리 꺼내서 거실 중앙으로 모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어서 나중에는 박
스뿐만 아니라 보자기, 심지어는 담요까지 동원해 말아 넣었다. 고된 작업이 끝났을 때 시간은 어느새 정오
가 훌쩍 넘어 있었다. 문득 공복감이 밀려왔지만 이 상황에서 도저히 뭘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혹
시 그 사이에 경주라도 찾아온다면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용역센터 직원이 알려준 인부 한
명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705호로 올라오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 아셨죠?”
그들의 입장에서는 횡재한 날일 것이다. 기껏 잡담이나 나누면서 반나절을 때웠으니 말이다. 혹시나 싶어
현관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경주의 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금세라도 벌컥 문이 열리고 경주가 튀
어 나올 것만 같았다.
오 분쯤 지나자 인부 셋이 라텍스 장갑을 낀 채 나타났다. 형순이 재빨리 그들을 안으로 들인 다음 문을 닫
았다.
“여기 있는 짐들을 차에다 옮겨 주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
“아줌마! 아침도 못 먹었는데 밥 먹고 하죠, 자장면 세 그릇만 시켜 주세요. 기다린다고 배가 고프네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사내 하나가 능글맞게 말하자 남은 두 명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이거 다 옮기시면 자장면이 아니라 탕수육도 시켜 드릴 테니까, 우선 옮겨 주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용하게요, 시끄럽게 하시면 탕수육은커녕 자장면도 없습니다, 아셨죠? 끝
내신 다음에는 아까처럼 차에서 대기해주시구요”
형순이 재차 정숙을 강조했다.
"뭐 알겠습니다. 양도 얼마 안 되는데 끝내고 먹는 것도 괜찮겠네요”
대머리 사내가 찬성하자 형순이 검지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렸다.
“정확히 십 분 후에 움직여 주세요”
“띵 동”
초인종이 울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띵 동”
두 번째 초인종이 울렸을 때 현관문 건너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경주야, 영미 엄마야! 문 좀 열어봐”
문이 열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는 아직 안 왔니?”
“...네”
성큼성큼 들어서는 형순의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인부가 짐을 옮길 동안 시간을 버는 것. 그것
이 방문의 목적이었다.
“아무래도 직장을 구하신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겠니? 지금쯤 교육 같은 거 받고 집으로 오
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형순이 짐짓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아줌마...”
“응?”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뭐? 숨기다니? 숨기긴 내가 뭘 숨겨”
안면부로 더운 피가 확 몰렸지만, 형순은 용케 말을 더듬거나 하진 않았다.
“기분이 이상해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순간 바깥 통로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주의 고개가 현관으로 돌아가자 다급해진 형순이 아무
말이나 꺼냈다.
“경찰에 신고 해 볼까?”
속으로 인부들을 저주하며 형순이 경주의 반응을 살폈다.
“말이 조금 이상하네요”
“응? 이상하다니, 뭐가?”
“좀 전에는 분명히 집으로 오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형순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형순의 고개가 슬쩍 바닥을 향한 뒤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다시 정
면으로 올라왔다.
“혹시 모르니까, 만약을 대비...”
“그만 하세요!”
경주의 입에서 비명 같은 짐승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번에 얘기했죠, 아줌마 말에 책임지라고”
경주가 천천히 목을 젖히고 눈알만을 내리깔았다. 그 탓에 마스크 아래 공간을 통해서 그녀의 문드러진 입
부분이 드러났다. 아랫입술은 바싹 말린 동태처럼 쭈글쭈글 오그라들어 있었고, 윗입술은 절반만이 인중 쪽
으로 말려 올라가 시뻘건 잇몸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겨...경주야...”
그녀는 자신의 어떤 포즈가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쿵 쿵”
또다시 통로에서 소음이 들렸지만, 경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줌마, 누가 이사 가나 봐요...”
형순이 덜덜 떨리는 팔을 슬며시 뒤로 감췄다.
“혹시 아줌마네 집은 아니겠죠...?”
경주가 사전 동작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공기의 압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들이 양옆으로 휘날렸다.
“확인해 봐야겠어요...”
말려야한다. 형순의 머릿속에서 세찬 경보음이 울려댔다. 본능적으로 형순도 따라 일어섰다. 경주가 현관으
로 몸을 비틀려는 순간 형순이 경주방의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여...여기가 네 방이니?”
“건드리지마!”
경주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형순을 거칠게 밀어 버리곤 부서질 듯이 방문을 닫았다.
“아악”
부엌 쪽으로 난 벽에 형순의 등이 모질게 부딪혔다. 엄청난 힘이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몇 초간 숨쉬
기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경주는 그런 형순을 버려둔 채 현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철컥”
문을 열고서 경주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살피던 그녀가 다시 형순에게 다가왔다.
“아줌마, 앞장서세요...아줌마 집에 한 번 가봐야겠어”
“뭐...뭐라고? 대체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확인만 할게요, 엄마 오실 때까지 아줌마가 도망가면 안 되잖아요”
그녀의 음성은 단호했다. 형순이 집을 나와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 때까지 그녀의 끈적거리는 시선이 거머
리처럼 따라붙었다.
“철컥”
문이 열리자 형순을 제치고 경주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변한 것이 없었다. 가구도 그대로였고, 액
자와 전시해 놓은 양주병도 그대로였다. 적어도 외관상 형순의 집은 경주가 보았던 며칠 전과 조금의 차이
도 없었던 것이다. 베란다에 널려 있는 빨래까지 확인하자 그녀가 선뜻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제가 아줌마를 잠깐 의심했네요...”
경주가 형순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의 어깨를 형순이 재빨리 붙잡았다.
“밥 먹구 가, 너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지?”
경주의 마스크가 조금 떨려왔다. 형순의 말이 무척이나 의외였던 모양이다.
“괜찮으니까 먹어도 돼, 배 많이 고프지?”
형순이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다 식탁으로 옮겼다. 밥까지 푸짐하게 푼 다음에 경주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와서 먹어”
“아줌마...”
경주가 망설이자 형순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괜찮으니까 어서 먹어, 불편하면 딴 데 가 있을게”
“고마워요...사실 어제부터 못 먹었거든요...”
경주가 식탁에 앉자 형순이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왔다. 경주는 형순이 완전히 베란다로 나간 것을 보고서
야 마스크를 벗고 식사를 시작했다. 경주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언뜻 언뜻 드러나는 피부는
구토가 치밀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형순이 밑에서 대기하고 있을 인부들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줌마! 안 그래도 지금 막 올라가려던 참입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밥은 왜 안주는 겁니까?”
그토록 당부했건만 쿵쿵거리며 소리를 내던 그들을, 형순은 이빨이 덜덜 거릴 정도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지금 손님이 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요 근처에 중국집으로 가서 드세요”
“우리 돈으로 사 먹으라구요?”
‘아무것도 안 했잖아, 뻔뻔한 새끼들아!’
형순은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나중에 드릴 게요”
그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순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식사를
하고 있는 경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추악한 년’
형순이 원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경주를 속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문득 현기증이라도 난
것처럼 어지러웠다. 귀속이 웅웅거리며 시야가 깜깜해지자, 손을 더듬어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밀
물처럼 들어온다. 그렇게 바깥바람을 쐬고 있자니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아줌마...”
베란다가 열리고 경주가 나타났다. 마스크까지 쓴 걸 보니 식사를 끝낸 모양이다.
“잘 먹었습니다...이만 가볼게요...”
“가려구? 그래...가서 좀 쉬어. 기다리면 연락 올거야”
경주가 돌아간 뒤 형순은 제일 먼저 부엌으로 달려갔다. 식탁이 깨끗했다. 반찬들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
고, 그릇과 수저도 씻어 놓은 상태였다.
“젠장”
한줄기 불쾌한 기운이 목덜미를 간질거렸다. 건조대를 뒤져 경주가 씻어 놓은 그릇을 집어 들었다. 물방울
이 주르륵 흘러 내렸지만, 그것이 마치 냄새나는 고름처럼 느껴졌다. 그릇을 쓰레기통에 박아버리고 수저통
을 뒤졌다. 한참을 뒤져봐도 구별이 안 가자 그것들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다.
형순이 긴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주변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는 상태였다. 물먹은 솜 마냥 온몸이 축 늘어
졌지만,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계획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다. 경주가 돌아간 뒤 형순은 노부부에게
서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인출한 다음 인부들과 대방동으로 향했다.
형순의 연락으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주인에게 돈을 건네 준 뒤 열쇠를 받았다. 싣고 온 짐을 모두 옮긴
뒤 곧바로 인부들을 돌려보냈는데, 저녁까지 요구하는 그들에게 형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노골
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오는 길에 약국도 잠깐 들른 다음, 입력해 둔 이삿짐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공동주택이상에서는 원칙적으로 해가 저문 이후에 이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
었다. 약간의 웃돈을 지불하자 어렵지 않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집으로 온 형순이 제일 먼저 한 것은 먹다 남은 갈비를 꺼내 불판에다 올려놓는 일이었다. 불판에서 갈비
가 익어 가는 동안 약국에서 사온 삼 일치 수면제를 잘게 부수었다. 그것이 고운 가루로 빻아지자 적당히
흠집을 내두었던 갈비살 사이로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뿌려 넣었다. 이윽고 연한 속살이 검붉은 갈비소스를
머금은 채 노릿노릿 익었고 매콤한 연기과 함께 군침 도는 냄새가 한가득 풍겨 나왔다.
“띵 동”
갈비접시를 손에 든 형순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시각 저녁 일곱 시. 앞으로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쯤
후에는 한형사가 올 것이다. 그전에 경주를 재워야 한다.
“이것 좀 먹어봐, 너 고기 좋아하잖아. 설마 벌써 저녁을 먹은 건 아니겠지?”
형순이 들고 있던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자 경주가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줌마...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그녀도 기다림에 한계가 온 모양이다.
“그래 그러자, 안 그래도 신고할까 생각 중 이었어. 그건 아줌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식기 전에 어서 먹
자”
은색 호일 사이로 진한 갈비향이 풍기자, 경주의 마스크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소식없는 엄마가 걱정이 되
면서도 생리적인 욕구는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경주의 문드러진 콧구멍이 벌렁대고 있을 것을 생각하
자 경멸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잘 먹을게요...”
경주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형순이 고개를 돌렸다.
“넉넉하게 구웠으니까 실컷 먹어, 아줌마는 저쪽에 앉아 있을게”
형순이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매끄러운 비닐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
했다.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주가 갈비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꼼짝 않고 있으려니 쩝쩝거림과 함께 간간이 들리던 역겨운 트림소리가 잦아들었다. 식사를 끝내려
나 보다.
“후아암, 오늘 좀 피곤하네. 경주야, 아줌마 잠깐 눈 좀 붙일게”
형순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금세 몸 전체로 으스스한 한기가 찾아왔지만 아무
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후아아암”
또 한 번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하품을 해댔다. 식사를 끝낸 경주에게선 말이 없다. 틀림없이 자신을 쳐
다보고 있을 테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십 분이나 흘렀을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삭 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철커덕”
경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형순은 한참을 누워 있었다. 현재 시각 여덟시 십분. 형순이 유령처
럼 몸을 일으켰다.
“경주야, 자니?”
아무 대답이 없다.
“경주야, 자니? 아줌마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
음성을 조금 높였지만 역시 반응이 없다. 방문을 열자 컴컴한 어둠 속 한쪽에 시커먼 덩어리가 보였다. 경
주는 이불도 깔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고 형순은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 나왔다. 통로에서 내려다보자 대형
크레인 한 대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각이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곧 자동응답기로 연결이 됐다.
-한형사입니다. 어디 가셨나 봐요?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거의 다 왔어요. 오시면 연락 주세요-
형순은 문을 걸어 잠근 뒤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불까지 모두 끄고 나자 집 전체에 적막이 흐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한형사가 도착했다. 그는 경주의 집 초인종을 서너번 눌러 보더니 반응이 없자 이번에
는 형순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짐작컨대 상준에게 전화를 거는 듯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 버리자
형순이 방범구멍에서 눈을 뗐다. 크레인이 올라오고 있는 듯 멀찍이서 진동소리가 웅웅 울렸다.
타이밍이 예술이었다.
이사는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됐는데, 낮에 만난 인부들과 달리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형순의 요구를 착
실하게 따라 주었다. 하긴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형순의 요구가 없었어도 조용히 움직였을 터였다.
가구들이 하나씩 옮겨지자 집안이 조금씩 비기 시작했다. 침대를 크레인으로 막 옮기고 난 뒤 직원 중 한명
이 형순에게 말을 걸었다.
“장롱이 커서 문으로는 못 나오네요, 아무래도 창문을 뜯고 그리로 빼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오래 걸리나요?”
“한 삼십분쯤 더 걸릴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이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사단이 발생했다. 직원 중 하나가 화분을 옮기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다. 사
기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흙덩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조심하셔야죠!”
형순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도 시끄러운 것을 깨닫자 입을 다물었다.
“이제 끝났죠?”
집안은 형순이 예전에 이사 왔을 때처럼 완전히 비어있었다. 가구들이 모두 빠지자 공간이 훨씬 넓어졌지
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아뇨, 이제 창문을 뜯어내고 장롱을 빼야 합니다”
직원 중 하나가 창문에 손을 올리자 형순이 황급히 제지했다.
“그냥 두세요. 장롱은 안 옮기셔두 돼요. 그럼 진짜로 끝난거 맞죠?”
아무래도 불안했다. 화분 소리에 경주가 잠에서 깰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주소예요. 이리로 가시면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형순이 메모지를 건네자 직원들이 철수했다. 길게 뻗어 있던 철제 크레인도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 가버리
고 형순 혼자 남았다.
“위이이잉”
꺼두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밀린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부재중 36통?”
한형사에게서 걸려온 두 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준의 전화였다.
“철컥”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열려 있던 현관문 사이로 이질적인 소음 하나가 흘러 들어왔다.
‘맙소사’
형순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안방으로 도망친 형순이 장롱 문을 엶과 동시에 밖에서 누군가가 거실
로 들어왔다. 형순이 장롱 속에 숨은 뒤 문을 닫고 나자 비명소리가 터졌다.
“아아악, 뭐야 이게...”
그르렁거리는 쇳소리. 바로 경주였다.
“어디 간 거야...설마 도망간 건 아니겠지...”
경주가 미친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악을 써 가면서 중간 중간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중얼거렸다.
“따르르르릉”
컴컴한 장롱 속에서 떨고 있던 형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화가 울린 것이다. 경주의 소리도 일순 멈췄
다.
“따르르르릉”
한참을 울리던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자 자동응답기로 연결이 됐다.
-아직도 안 오셨나 보군요. 아까 신명희씨 집에 갈 때 잠깐 들렀었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한형사의 전화였다. 한형사는 혼자 말하는 것이 어색한지 조금 뜸을 들였다.
-직접 말씀드려야 하는데 바쁘신 것 같으니까 여기다 말할게요, 조금 전에 신명희씨 부검 결과가 나왔습니
다. 흉부관통상이 아니라 뇌좌상으로 판명됐어요. 아마 가슴 쪽은 죽고 난 다음에 찌른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죠...?”
경주의 억눌린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시죠? 영미 어머니신가요?-
“다시 말해보세요...신명희씨가 어떻게 됐다구요?”
-죄송하지만 전화 받는 분은 누굽니까?-
"신명희가 우리엄마예요..."
-아...-
수화기에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따님이시군요...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어머니께서는 이틀 전에 사망 하셨습니다-
마침내 경주가 알아버렸다. 자신이 무사히 빠져 나간 후에 알았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이곳에 숨
어 있고 경주는 진실을 알아버렸다.
-바로 알려 드렸어야 하는데, 계속 집에 안 계셔서 그러지 못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영미 어머니께도 말
씀 드려 놨는데...이것 참 면목이 없군요-
“으흐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별안간 우지끈 거리며 뭔가가 부서졌다. 한형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
리지 않는 걸로 봐서 경주가 전화기를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
“아줌마...우리 엄마가...정말 죽었어요...?”
그녀가 울부짖었다. 탁한 쇳소리만 낼 수 있는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어린 아이의 음성으로 울고 있었다.
“우리 엄마 죽이구...도망 가려고 했어요? 나 재우고 그 사이에 도망 가려고...?”
경주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흐느끼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형순이 재빨리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전화도 안 받고”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상준의 음성이 커다랗게 울렸다.
“한형사한테서 전화 왔었어, 집에 갔었는데 아무도 없다 길래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쿵 쿵”
별안간 거실에서 육중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여보세요? 당신 듣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
형순이 모기만한 소리를 내뱉었다.
“뭐라고? 잘 안들려 좀 크게 말해봐”
“신.고.하.라.구”
쿵쿵거리는 소리가 이내 안방으로 이어졌다. 가느다란 틈 사이로 포대자루 같은 것을 끌고 들어오는 경주
의 모습이 보였다.
“신고하라고? 이제 와서 무슨 신고를 해? 사실 고민해 봤는데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잘
못했다고 하면 내 생각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안 그래도 지금 영미랑 그쪽으로 가는 중이야”
‘안 돼, 오면 안 돼... 왜 또 혼자서 결정하고 그래...’
“쿠웅”
장롱 바로 앞으로 육중한 뭔가가 떨어졌다. 포대자루에서 나온 그것은 공 모양의 마스크 비슷했는데, 상당
히 무거운 듯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집안 전체가 시끄럽게 울렸다.
“쨍그랑!”
경주가 이번에는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부수기 시작했다. 안방을 시작으로 집안 곳곳에서 전구알 터지는 소
리가 들려왔다.
“오.지.마 그.냥.신.고.해”
“무슨 일 있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모퉁이만 돌면 주차장입구야”
전등을 모두 깨트린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히히, 아줌마...집에 있는 거 알아요...”
별안간 그녀가 개구쟁이 아이처럼 웃었다. 발걸음 소리가 안방 쪽으로 다가오자 형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줌마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장롱 앞에서 발걸음이 뚝 끊겼다.
“왜냐면요...”
“신발이 있었거든요!”
장롱의 문이 흉폭 하게 열렸다. 마스크를 벗어버린 경주의 모습에 형순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내리쳤고, 형순의 몸이 축 늘어졌다. 경주가 형순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자 손에 쥐여
있던 핸드폰이 떨어졌다. 그녀가 형순의 핸드폰을 주워든다.
“형순아!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이제 다 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저씨...”
“여보세요? 누구야, 경주니?”
“아줌마 방금 제가 죽였어요”
경주가 킥킥 웃으면서 형순을 질질 끌었다. 거실까지 끌고 나오자 형순에게서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
‘아...’
형순은 지금 비몽사몽간이었다.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고속의 회전목마라도 탄 듯 세상 전체가 빙글빙
글 돌았다. 흐려져 가는 시선 속으로 어둠속에 숨어 있는 경주가 보였다.
곧 상준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들어왔다.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형순에게는 마치 영화속의 슬로우 모션
처럼 느껴졌다. 상준이 뭔가를 밟고 넘어졌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듯이 입을 쩍쩍 벌려댔지만,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넘어진 상준의 너머로 영미가 나타났다. 시커먼 뭔가가 영미를 덮쳤지만 형순은 이미 의
식을 잃은 후였다.
4. 종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이 아프다. 얼마나 아픈지 두개골부터 뇌까지 바늘 수십 개가 박혀 있는 것 같다. 낑낑
거리며 참고 있으려니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 누굴까. 뒤를 돌아봤지만 밝은 햇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
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뭔가를 내민다. 도화지 한 장.
아...영미구나. 사랑스러운 내 딸 영미. 끔찍했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영미를 덥석 안고서 얼굴을
들여다본다. 썩어 가는 얼굴. 누런색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얼굴이 사악하게 웃고 있다.
“아줌마!”
형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주변의 광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
자 저만치서 상준이 모로 누워있다. 상준의 다리 주위는 뭔가를 엎지른 것처럼 액체가 흥건했는데, 자세히
살피자 그것이 시뻘건 색임을 깨달았다.
“여보!”
상준이 천천히 돌아본다. 얼굴은 흘러내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흡사 울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상준이 고통을 호소하며 양손을 다리 쪽으로 가져갔다. 흥건한 액체 한 가운데 그의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한쪽 발목에 시커먼 뭔가가 매달려 있었다.
둥그런 박 모양의 철제기구. 흡사 중세시대 여인들의 정조대를 연상케 하는 물건이 상준의 발목 깊숙이 채
워져 있었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듯이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그 주위로 손만 가져가는 상준이었다.
“아줌마, 정신이 드세요...?”
누군가 또 있었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모서리 쪽에서 포대자루를 깔고 앉아 있는 경주의 모습
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상준의 발목에 매달린 것은 경주가 앉아 있는 저 두툼한 포대자루에
서 나온 것이었다.
“아줌마 남편이 많이 힘들어 해요...저대로 두면 출혈과다로 죽을 수도 있구요...”
“뭐라고?”
형순이 다시 상준을 쳐다봤다. 바닥에 가득한 시뻘건 액체. 그것은 상준의 발목에서 흘러 나온 피였던 것이
다.
“멧돼지 잡는 덫 이예요...모르긴 몰라도 절반쯤은 절단 됐을 거예요...”
“미...미친년”
“아줌마가 먼저 우리 엄마 죽였잖아!”
경주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옆에 세워져 있던 막대기 비슷한 것을 주워 들고는 형순쪽을 향해 치켜세
웠다.
“죽여 버리고 싶어 미치겠어요...아줌마 젖통에다 대고 한발씩 쏴주고 싶어 죽겠다구요...”
형순이 자세히 보자 자신을 향한 것은 막대기가 아닌 기다란 엽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랬었군. 형순은 비로소 그것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인 게 아냐”
“아니요, 아줌마가 죽였어요...아줌마가 안 꼬셨으면 우리 엄마는 안 죽었어요...”
형순은 주위가 밝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완전히 드러난 경주의 추악한 얼굴을, 그것도 밝은 장소에서는 더
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영미는? 영미는 어디 있지?”
“거실에다 묶어 놨어요...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않으셔도 돼요...”
형순이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자신의 다리는 굵은 밧줄에 묶여 있는 상태였고, 이곳은 영미의 방인 듯
싶었다. 가구를 모두 빼내자 못 알아 봤던 것이다. 엎드려 있는 자신의 얼굴 왼편으로는 플라스틱 대야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가득 채워진 물 안으로 길쭉한 뭔가가 두 개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저
것은 젓가락일 것이다.
“아줌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젓가락에 대한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경주가 형순에게 말했다.
“아줌마가 기절해 있는 한 시간 동안 생각해 봤는데...”
“잠깐만, 우선 아저씨를 풀어줘. 그 다음에 얘기하자”
“가만히 있어 봐요...아직 말하는 중이잖아요...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영미는 아무 잘못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영미는 살려줄까도 생각했어요...”
“뭐...뭐라구? 그럼 우리는 죽이겠다는 말이야?”
경주가 희멀건 눈동자를 위로 까뒤집었다. 짐작컨대 어이없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 같았다.
“그럼 살려구 했어요...? 아줌마랑 아줌마 남편은 백 프로 죽일 거예요...내 말은 영미를 어떻게 하냐는
건데...”
“우...우리가 자...잘못했어, 너한테 시...실수한 거 같다”
상준이 고통을 참아가며 용서를 구했다.
“그래 경주야,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요, 아줌마 말은 거짓 이예요...”
“.......”
“저한테 약 탔잖아요...”
“뭐?”
형순이 일순 할말을 잃었다.
“나 재우고 이사 가려고 고기에 약 탔잖아요...저는 그것도 모르고 넙죽 받아 먹었네요...솔직히 말하면
아줌마가 조금 좋아지려구도 했었어요...”
“무...무슨 말이야? 여...여보 지금 경주가 무슨 말 하는 거야? 약이라니? 대체...”
상준의 말에 형순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더불어 경주에 대한 적개심이 맹렬히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실수 하셨어요...저한테는 내성이 있거든요...옛날에 너무 아파서 못 잘 때마다 수면제를 먹었었
어요...하도 많이 먹어서 나중에는 효과도 없었지만 말예요...”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형순의 대꾸에 경주가 재빨리 말을 쏟아냈다.
“두 분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어준다면 영미를 살려줄게요...옆에 있는 대야 보이시죠? 그 안에 있는 젓
가락을 저기 있는 구멍에 끼워 주세요...”
경주가 총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홍색 꽃무늬 벽지와 콘센트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설마...’
“맞아요...그 콘센트 구멍에 젓가락을 꽂으면 영미를 살려 줄게요...”
“말도 안돼!”
“미...미친 소리”
형순과 상준의 입에서 동시에 악소리가 터졌다.
“뭐 안하셔도 상관은 없어요...”
“만...만약 안하겠다면? 아...안하겠다면 어떻게 할거지?”
상준의 물음에 경주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총으로 셋 다 죽일 거예요...물론 훨씬 덜 아프겠지만...”
“미친년! 더러운 년! 쓰레기 같은 년!”
형순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저씨부터 선택하세요...어느 쪽이죠?”
형순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주가 상준에게 묻는다.
“자...잠?p>
상준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 대신 초점 잃은 눈이 멍하니 젓가락만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상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죽겠어, 영미는 살려줘”
“여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