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6월10일 양덕, 자산동의 파출소가 3.15부정선거규탄시위에 이어 또다시 전소되었고 민정당 의원 우병규의 사무실이 습격받아 전두환과 우병규의 사진이 화형당했다. 경찰차량, 안기부 차량, KBS와 MBC의 차량도 전소되었으나, 경찰력은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진주
6월16일 파출소 4곳이 공격받아 불탔다.
경기 안양
6월26일 경찰관사와 안양파출소가 불탔고, 민정당 안양지구당도 전소되었다. 노동부 안양출장소도 같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안양 경찰은 패퇴했다.
대전
대전산업대(현재 한밭대)생과 한남대생이 보도블럭을 까서 경찰들에게 던졌다.
최루탄 추방대회가 6월 18일 전국에서 열렸다. 참가자 규모는 150만명으로 추산되며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을 검토할 심야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기백 국방부장관, 각군 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자는 전제 아래 출동준비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며 설득하지만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청와대에서 군 고위회의가 열렸다. 전두환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면서 "이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엄령에 플러스 알파를 하는 비상조치야.
군부 동원도 할 수 있고 군법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다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했다. 이에 따라 무력진압 실시로 최종결정이 났으며 각 위수군단 군단장이 지역별 계엄사령관을 맡으며 부산경남지구와 충남북지구를 핵심지역으로 설정. 또, 전방 4개 사단을 차출하고 특전여단 6개와 해병연대 2개, 그리고 각 군단 특공연대 4개를 동원해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 대전, 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에 집중 배치하기로 하였다. 육참총장 박희도는 철도청과 병력수송계획의 협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CIA 는 6월 20일 새벽 4시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주한미군 전차를 차출하여 수도방위사령부와 육군특수전사령부 정문에서 주한미군 전차와 한국군 진압부대가 대치하였다.
6월 20일 오후에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미국 국무부의 친서를 전달했다.
게스틴 시거 미국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23일 한국을 방문하고 이틀 뒤 한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계엄선포 반대의 뜻을 분명히 전했다."고 전했다. 미국 상원에서도 대한민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는 올림픽 개최지 변경을 여러 차례 거론했다.
또한 군내부도 무력 진압에 회의적이었는데, 사병, 위관급 장교 부사관들 뿐만 아니라 소,중장급 지휘관들조차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병력투입에 찬성하던 대장급 지휘관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고명승 보안사령관과 민병돈 특전사령관은 육사 15기수 하나회의 대표주자였으며, 민병돈은 예하 부대의 진압 동원에 반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고명승은 이 의견을 전두환에게 전달하였다. 미국의 관할 밖에 있는 특전여단들이 진압작전의 핵심이었으나 특전사령관부터가 반대하고 있는것이다. 87년 당시에는 707특임대가 사령부 영내에 주둔중이었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을 쉽게 제거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