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미石見 은광이 개발되었을 시기는 일본 경제의 상업적 발전을 이룬 시기와 겹친다. 16세기 일본사는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기로 이해되고 있고 상업발전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비록 중국과 비교하면 그 정도는 작았지만, 16세기 이후의 일본 또한 사실상 동아시아의 핵심 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이 은 본위 경제로 전환하는 명대 이전만 하더라도 일본은 딱히 내놓을 만한 상품이 없어 아시아 무역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은이 아시아 무역의 기축통화로 통용되고 때마침 이와미 광산에서 은이 채굴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선진 상품을 수입하여 상업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유럽이 아시아 무역에 참여한 이후에는 이들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한 축이 됨이 따라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한마디로 은은 현재의 일본을 가능케 한 혈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와미 은광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현재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과 더불어 은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초, 일본 전체의 은 생산량은 전 세계의 1/3을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이와미 은광이 일본의 1/5의 은을 생산하였다고 하니 전 세계 은의 1/15를 생산한 셈이다.
이와미 은광은 은광 쟁탈전의 결과로 모리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의 군자금은 여기서 충당되었다고 한다.
정련가공된 은 '조긴丁銀'은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유통되었던 은화이며, 16세기 후반부터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포르투갈과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네덜란드와의 교역에도 사용되었다. 조긴은 칭량화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 일본의 은뿐만 아니라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신세계에서 생산된 은 가운데 약 4분의 3가량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안드레 군더 프랭크는 "은은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아가게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포르투갈 · 스페인의 유럽 기독교 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나 기존의 무역 네트워크에 때로는 완력을 사용해 들어왔고, 중국 대륙의 연해부와 일본 열도 서변을 기지로 하는 밀무역 세력-이른바 '후기 왜구'-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1566년의 아말감 정련법의 실용화 이래 폭발적으로 증산된 서인도의 은을 중국시장에 가져왔을뿐 아니라 일본 은을 중국 대륙으로 날랐다.
활발한 대외무역은 경제 확장의 동력을 의미한다. 경제 발전이 일본인의 입맛을 자극하자 정상적인 대외무역으로는 그들의 강렬한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무법자가 되어 조선과 중국의 동남 연해에서 침탈을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중국과 조선 역사에 등장하는 왜구이다.
유럽 세력까지 참가하고 있는 밀무역 집단인 왜구는 15~16세기의 동아시아 가운데에서 가장 국가적 통합이 약했던 일본의 서부 변경을 근거지로 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까지도 포함하면서 등장한 국경을 초월한 인간 집단인 것이다. 그들은 14세기 후반 이래 명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가 느슨해짐에 따라, 국가간 혹은 공권력간의 공적 통교를 대신하여 이 지역의 사람이나 물건, 기술 교류의 주역이 되었다.
일본은 16~17세기에 막대한 은을 토대로 하여 베트남, 시암(타이),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열대 동남아시아에서 무역활동을 전개했다. 심지어 당시 동남아에서 활동했던 일본인들은 네덜란드의 용병이 되어 영국과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이 둘은 서로를 활용하기 위해 1609년 일본 나가사키에 상관을 설치했다. 16세기 이후 일본은 유럽의 힘에 눌려 일방적으로 문호를 연 것이 아니라 열대 동남아시아 무역 활동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문화접변을 실현해나갔다.
1592~1598년의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일본 열도의 세력이 대륙 진출을 시도한 세 번째 사건(663년의 백촌강 전투, 왜구의 대륙 진출 좌절)이자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이 한반도 국가의 존속을 위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일본열도 내의 100년간의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기세를 몰아 한반도, 중국, 인도를 모두 정복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대항해시대’를 선도한 포르투갈 · 스페인 세력은 인도, 필리핀 등지에 이어 일본열도에서도 활발한 선교 · 식민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유럽 세력과의 이와 같은 상호 접촉 속에서 히데요시는 유럽 세력이 기독교 포교를 앞세워 일본 열도를 지배하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유럽 세력의 발달된 군사력과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그들의 세계관을 빌려왔다. 그리하여 중세 일본인이 생각하던 ‘전 세계’인 천축(天竺·인도), 진단(震旦·중국 및 한반도), 본조(本朝·일본)의 3개 지역을 모두 지배하려 했다. 여기서 당시 일본인들이 인도라고 믿은 것은 오늘날의 인도차이나반도로, 이 시기에 일본인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 지역인 태국,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반도 등지에 거주하며 현지 세력과 정치 ·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대체로 겹치며, 1944년에 일본군이 인도를 침공한 것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 일본이 중세의 활동 영역을 뛰어넘었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