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감점을 심하게 가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들어 눈살 찌푸려지는 일본 정당화 찬양글이 자주 보이더군요.
1.신분제페지
형식상 갑오개혁때 신분제 페지조건이 걸려있었다고하나.
신분제 페지는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론 오히려 일본이 그 구조를 이용해 먹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식민화을 수월하게 관리하기 위하여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친일 양반은 그 댓가로 기득권을 받았고
사회적 통념으로는 자기 신분대신 직업을 썻다고는 하지만
양반의 토대가 견재하였기 때문에
천민은 천민 양반은 양반으로 지내는것이 없어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친일파에게 움직여지는 제국주위의 노예나 다름없었습니다.
2.조선의 신분제 페지와,비리을 척결해줘서 일본에 고마워 해야된다?
역사의 가르침은 일본은 모든것을 빼앗아간 존재라는겁니다.
한가지 예로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을 당하지만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중립을 선언하고 2차대전 참전을 회피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선전포고도없이 진주만을 공습하여 미국은 대대적인 참전하게되는 계기가 됬죠
그렇다면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안했더라면 어떻게 됬을까요?
역사적 유동으로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한가지 가설로
식민지화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면 우리 민족자체가 일제에 위해 말살되었을것입니다.
현시점 한국말도 까먹고 한글도 모르고
또한 제국주의적 사상으로 한국인은 배울거 못배우고 멍청한 교육수준으로
일본인에게 둘러싸여 열등한 취급을 받으며 인격적 모욕과 괄시와 차별을 당했을것입니다.
제국주의의 기본배이스가 피지배층은 우리보다 열등하다라는 개념으로 세뇌되어 침략을하기 때문에
침략,식민지화가 매우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는 사실이 제국주의사상적 특징입니다.
즉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해준것은 모두 미국 덕분입니다.
민주주의가 있었기에 지금 발전한 대한민국이 됬다고 확신합니다.
3.한국이 베트남전,광주민주화,제주4.3 같은 만행을 저질렀기에 할말이 아니다?
잘못한게 맞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자국에서 벌어진 만행을 교육하고 반성하고 있는 부분으로
비교자체가 안되는 이유이기도하며 tv방송,유튜브에선 검열없이 자발적인 영상을 통해 교육시키며
더불어 이런한 만행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2차대전을 대하는 유럽국가의 태도을 봐도
그 어느 나라보다 히틀러을 증오하게 교육받는 국가는 독일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2차대전 전범들을 영웅서사시로 만들어 우상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로 일본과 전혀 비교조차 될수없는 부분입니다.
4.인구가 늘고 삶이 개선되었다?
한국의 인구가 일제 강점기 시기에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연히 시기가 맞아떨어졌을 뿐입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합니다.
이후 조선은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죠. 이러한 근대화는 인구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와서 의술을 편 덕택에 수명도 증가하게 되고,
영아 사망률도 줄어들었으니 인구는 늘게 됩니다.
확실히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수명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때 들어온 문물들이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제가 없다 하더라도 조선은 독자적으로 외래 문물을 받아들여 인구를 증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외래 문물의 영향만은 아닙니다.
이미 조선 중기 이후 농민들은 이앙법(모내기)을 비롯하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 왔습니다.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다는 말은 식량이 부족하지 않고 잉여 생산물이 늘어났다는 말입니다. 식량이 부족하지 않으니 굶어죽는 사람은 줄어드게 되고 잉여생산물이 늘어났으니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문호를 개방하지 이전에도 조선의 인구를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업을 비롯한 산업들도 발달을 막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가 억지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도 조선 스스로 근대화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제로 인해 조선 스스로의 근대화는 좌절되고 외세에 의한 근대화가 진행됩니다.
한 예로 유럽의 1600~현재까지 인구변화 통계치을 봐도 1차대전과 2차대전을 치룬 이후에도
-누락된 인구 집계
조선시대때는 양반들도 조세를 내지 않기위해 노비와 첩을 줄여서 신고하거나, 호에 넣었습니다.하물며 평민들은 아예 호를 신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결과 조선 후기때는 누락된 인구가 50%에 이르렀습니다.
이부분은 세계 인구를 통계, 연구하는 외국학자들이 직접 밝힌 부분입니다.
(조선의 인적 피해상황)
총 강제징용 500만명중 291만명 사망(군대징용,일반징용,위안부 50만명중 살아돌아온 인원 1만명)
생체실험 : 277명 사망
제암리학살 - 29명 사망
훈춘에 한인학살 - 3만명 사망
간도 한인학살 - 1만명 사망
관동 대진진 학살 - 1만명 추정 사망
맹산학살 - 60명 사망
대구학살 - 115명 사망
합천학살 - 42명 사망
남원학살 - 11명 사망
이리장난학살 - 10명 사망
미즈호학살 - 27명 사망
강서학살 - 9명 사망
사천학살 - 73명 사망
정주학살 - 120명 사망
밀약 학살 -150명 사망
화수리학살 - 수십명 추정
해삼위학살 - 추정불가 한인학교.한민회관,그밖에 민가 학살
강계학살 - 4명 사망
강서학살 - 46명 사망
니이카타현학살 - 100명 추정 사망
그외 일본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시아인이 2천 5백만
여기서 은폐되고 고문,독립군 사망한 비공식기록을합치면
공식사망자에서 + 가 붙습니다.
공식적인 학살사건 더 있지만 여기까지 찾겠습니다.
수탈당한 피해자는 전국단위적인 수치입니다.
징용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몇일간 굶어서 죽을 지경이였는데
자기 동료가 죽으면 다음날 고기가 나왔다고합니다
또한 인간동물원까지 만들어 돈으로 조선인을 꾀어내 전시해놓고
어떤 일본학자는 당당히 조선영토에서
피해자 두개골크기을 조사하여 수집,전시하며 조선인은 열등하다는것을 입증하려 하였습니다.
생체실험된 자들은
자신을 열등하게 생각하고 과격하게 생체실험을 진행하는 일본인에게 둘러싸여
아무말못하고 자기몸이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침묵하며 죽어갔고
학살된 많은 이들 중
방금 웃고떠들던 가족이 눈앞에서 일본인에게 살해당해 인형처럼 질질 끌려가 불덩어리에 던져지는 광경을
통곡하며 지켜봐야했습니다. 유관순열사도 그런인생을 살았고요.
그외 피해자들의 개인사들을 들여다보면 정말 비통하고 한맺힌 절규뿐인 참혹한 인생사입니다.
-삶의 질
보통 일뽕들은 일제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행복하게 잘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절엔 백성들의 세금으로 걷어들인 국고는 이미 일제에 넘어간 상태이고
수탈과 횡포로 엉청난 슬픔속에서 살았던시절입니다.
어디까지나 제국주의사상의 본질은 모든것이 국가이득주위입니다.
일제는 자신들의 이익을 넓히기 위해 제국주의를 확장시킬려는 야욕에 찹니다.
그로인해 회사령과 토지사업에 들어오게되는데 그당시 3.1 운동이 괜히 일어난게 아닙니다.
일제의 수탈과 횡포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애국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뀐시기에 일본내에서도 쌀문제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자국의 쌀을 채우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세우는데
농사는 조선인이 짓고 그 수익은 일본이 ㄱ가져가는 정책이였습니다.
더군다나 농촌에 필요한 자금은 모조리 농부들이 감당해야했고
학생은 필요한 지식을 원할히 받을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더더욱 친일파를 양성하는데 온힘을 쏟아 붙고
미국의 대공황으로 시작된 일제의 경제수탈은 더욱 심해져서
전쟁과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 조선은인은 완전한 억압에 처해지게 됩니다.
우리말도 못하고 글도 못쓰고 내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위안부문제 또한 공출제와 식량 배급제등등등
또한 중일전쟁으로 조선은 병참기지가 되었는데
그말의 속뜻은 한국 인적,물적자원을 무단으로 전쟁물자에 공급한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로인해 한국의 금매장량 24톤 일본이 20톤으로 한국이 훨씬 많이 지녔지만
한국의 금은 모두 일본에 채석되어 반출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의 대일 철광석 수출을 전면금지하자 일본은 조선의 철광석을 대대적으로 뽕빨냅니다.
전쟁으로 수요가 늘어나면서 600만톤 이상의 철광석을 일본에 반출되게 됩니다.
그 밖에도 텅스텐.형석.몰리브덴.흑연,니켈,망간,납,아연,운모,석면,마그네슘 등
특수광물은 제조,도금,합금등을 채굴해 뽕빨내어 수탈해가고
일본 특수광물 총생산에서 흑연,운모,마그네사이트 등은 100% 조선에서 생산된 것이었으며
형석 95%, 텅스텐 88%, 몰리브덴 85%, 중정석 70%가 조선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거기다 금속회수령을 내려 조선인이 가지고있는 금속물자들을 전부 수탈해가고.
문화재는 물론이고 건물간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금속물들을 가져갔다고 보시면됩니다.
2년뒤에는 조선중요물자엄단령을 내려 아주그냥 국민들의 철 구리까지 모두 싸그리 가져가버림니다.
거기다 일본인들은 조선이 재개하지 못하도록 수맥에 말뚝까지 박는 의식을 치뤘으며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들은 일제의 우선시대는 말살정책중 하나로
200여기가 넘는 왕릉이 파헤쳐지며 보물들을 약탈하고
2천여기 넘는 고분을 도굴해 전부 일본박물관에 전시하게 됩니다.
데라우찌은 조선문물을 보전한다는 구실로 조선의 유적들을 허물고
400여기의 낙랑득 고분을 돌굴해갑니다.
그외 유물은 일본박물관에 받쳐야하는 법령을 선포하고
이조실록,오대산본,일성록,승점원정기,의정부비변사등. 수만권에 달하는 국가서적을 약탈해갑니다.
또한 길을내거나 건물을 만든다는 핑계로
78개 이상의 문화유산 궁궐,기념비,산성,유적지에 불을 질렀고 하나하나 철거했습니다.
즉 이런 일제시대 속 행복했던 조상들은 없습니다
5.일본의 만행이 일제 뿐만이 아니라는걸 알았으면 합니다.
뭐 지금와서 고대와 중세의 만행들을 신경쓸 필요 없지만
가깝지만 먼나라가 괜히 있는 말이아닙니다.
13~16세기
왜구라고 한번쯤 들어 보셨을겁니다.
단순히 해적 소규모 작은집단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규모는 함선 1만척,한 집단에 6천~1만명 규모의
완전무장.기마까지 갖춘 정예 편제도 체계의 군대입니다.
왜구는 신라시대에도 침입한기록이 있으며
고려말,조선초기에 가장 극심했습니다.
고려 말 40년간은 피해가 너무 커서 멸말의 한 요인까지 됩니다.
한반도 뿐만아니라 동아시아 상대로한 범죄집단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쳐
중국,고려,조선이 해양권을 포기하게되는 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논란이되고있는건 대마도인데
한국인들도 우리땅이네 아니네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마도는 왜구에 위해 강제점거되어 해적기지가 되버린
우리땅이 맞습니다.
(지도의 역사고증)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구기지도 대마도 조선영토 표기
18세기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 대마도 조선영토로 표기
고려시대 제작한 가장 오래된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마도 고려땅 표기
조선초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마도 조선영토 표기
또한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의 영락대제기를 보면
왜가 신라의 대마도를 침공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성제 시절에 왜는 자주 신라를 침공하였다.
실성제 7년에도 왜가 대마도를 침공하여 장악하고 신라본토를 공략하려하자
미사품이 [손자병법] 허실편에 나오는 구절을 들먹이며 이를 말렸던 것이다.
라고 기록됩니다.
결과: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으나 토속민을 학살하여
차차 왜인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땅이 되었다.
대마도는 결국 점거당해 임진왜란 후기부터는 완전히 빼기게되는 역사적 고증자료가 많습니다.
신라~고려~조선의 왜구적 피해
당시 왜구는 대마도을 해적기지화 하여
150년간 걸쳐 10년에 4~5번꼴로 거국적인 침입을 일삼습니다.
고려기록에 따르면
경사도는 거의 함락된 적도 있고 강화도가 싸그리 날라간 적도 있습니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로인해 최무선의 남해다첩 또한 이성계 부산 황산대첩을 이룬 뒤 기세로몰아
고려는 박위장군을 내세워 1만 고려군의 대마도 정벌을 나서게 되지만 패전하고
조선때는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나서게 됩니다.
그렇게 세월흘러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의 야욕으로 왜구을 군에 편승하기위해
해적금지령을 내려 왜구의 칩입은 잠잠해지지만
그렇게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난겁니다.
임진왜란은 일본 만행의 총집합소이며
일방적 전쟁준비로 선전포고도없이 침략한 비열한 전법입니다.
모든것은 학살-방화-파괴-학살-방화-파괴로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당시 일본 유학생과 전문가가 했던 말이 조선은 백성의 불만이 넘쳐나고
친일파가 넘쳐나니 전쟁을 수행하면 알아서 반란이 일어나 정복하기 수월할꺼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라를 지킨것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백성들과 의병들이여서
일본의 왜곡된 시선과 자만으로 인해 벌어진 살육현장이 되버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회고록에도 적군이 백성을 너무 학살하여 공격을 자제한 전례도 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이성을 상실한채 죽은자의 시체까지도 난도질을하며 시체유린까지 하였다.
일본군이 지나온곳은 모든게 사라지고 남는것은 불길뿐이였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은 썩은 시체까지 먹기시작했다
시체의 젖을 빠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넘쳐나고 가는곳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귀와 코가없는 백성들의 시체는 성병을 이룰정도이며 산천이 피바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일본의 기록에선 부산진성이 함락되자 여자를 비롯 아이들과 개,고양이 할 것 없이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해하였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납치와 약탈은 결코 빠질수없는 만행이며
임진왜란 후의 인구는 평상시의 6분의 1도 안되는 극심한 희생을당했다고 기록되며
이 후엔 대마도는 완전한 일본땅이 되버림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역사을 볼때
더 나은 미래로 가기위해 과거을 반성하고 성찰해야됩니다.
그저 반성과 성찰만 하면될것을
국가주위적인 시선으로 왜곡과 은페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행위는 나중에 나라을 이끌어간 후손들에게 전쟁과 분쟁의 씨앗만 남겨놓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