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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26723
    작성자 : 유진아그네스
    추천 : 10
    조회수 : 2189
    IP : 183.107.***.167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16/08/28 08:44:34
    http://todayhumor.com/?history_26723 모바일
    징기스칸 전쟁이야기, 거울제국의 등장
    < 징기스칸 - 전쟁 이야기 >

    거울제국(Mirror Empires)

    서력으로 13세기 초반. 중국에서는 한(漢)족의 송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시기. 유럽은 십자군 원정을 통한 새로운 문물의 유입으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시기. 인도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투르크가 북부 인도를 점령하면서 힌두교 중심의 브라만세력이 위협받던 시기. 이슬람 문화가 융성하기는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어있던 시기.

    금나라의 북쪽. 현재의 몽골과 고비사막, 바이칼 호 인근의 남부 시베리아, 그리고 알타이 산맥 북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서는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나라들은 각축전이 늘 있는 북방 유목민들의 세력다툼이라고 여겨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강력한 세력이 등장할 것도 아니었고 좀 힘센 인물이 나오더라도 황금과 보물로 적당히 구슬리면 문명국 임금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유목 기마족들이 노리는 것은 농경민이 소중하게 여기는 ‘영역’과 ‘농토’가 아니라 약탈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원하는 것만 손에 쥐어주면 얌전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변경에 일종의 용병세력으로 세워 그 밖의 다른 ‘야만인’들을 견제할 수 있으면 문명국의 관점에서는 꿩 먹고 알 먹기, 일거양득이었다.

    보물과 약탈물, 그리고 군사적 부용(附庸)을 매개로 하는 공존관계에 대하여 미국 인류학자인 토마스 바필드(Thomas Barfield)는 “거울제국(Mirror Empires)”이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어느 지역에 강력하면서도 규모가 큰 국가(제국)가 세워지면 이에 상응하여 변경너머에서 다른 강력한 정치체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가 중국과 북방유목민들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중원에서 강력한 제국이 등장하면서 정권과 물자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북방의 유목민들이 이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이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지도자나 부족이 등장할 경우 제국의 규모에 준하는 제국적 연맹체(Imperial confederacy)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목연맹은 중국 같은 정착형 제국에 준하는 관료시스템이라던가 고도의 행정체제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제국적 유목연맹의 지도자는 군사력과 대외교섭권을 독점하여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구축하고 휘하의 제 부족들에게 물품을 분배할 권리 역시 독점하는 경우가 많고 휘하 부족들은 약탈물을 분배가 보장되는 한 지도자를 거스르지 않는다. 유목연맹의 지도자는 이러한 역학관계를 통하여 정착제국의 제왕들 못지않은 힘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

    서력(西曆)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후 전환기까지 흉노와 중원을 지배하였던 한나라의 관계가 이러하였으며 역시 초원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단석괴(檀石槐)의 선비제국, 유연(柔然) 제국, 제1 돌궐 제국 역시 이러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변경의 유목집단이 정착문명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정착문명의 근거지로 들어가 이를 점령하고 왕조를 세우는 일이 있다. 이를 보통 ‘정복왕조’라 하는데 중국사에서는 척발 씨의 북위, 모용 씨의 연(燕), 전진(前秦), 거란족의 요(遼), 여진의 금(金), 그리고 만주족의 청(淸)등이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남북조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등장한 수(隋),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차지한 무굴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이 있다. 이는 유목민이 그들의 우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수의 정착민을 하층민으로 두고 이를 다스리는 형태이다. 그러나 ‘정복왕조’의 건설이 아니라 유목민이 정착에 성공하여 반농반목이 아닌 온전한 정착국가를 건국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약탈과 기습을 하던 유목사회에서 정착국가로 전환한 ‘마쟈르’의 헝가리는 유목민이 온전히 정착국가를 건설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초원의 제국, 해양 제국, 영역형 제국의 차이>

    몽골이 제국을 세우고 그 영토가 14세기 초 절정에 달하였을 때 그 면적은 2350만 평방km. 현대국가 중 가장 영토가 넓었던 소비에트 연방(2240만 평방km)보다 크다. 육지로만 그 전 영역이 연결된 연육제국(連陸帝國, contiguous land empire)으로서는 가장 컸고 세계 역사상의 제국 중 대영제국(3550만 평방 km)에 이어 2위이다. 몽골제국은 사실 초원/스텝지역에 형성이 된 많은 제국 중의 하나이다. 초원과 정착국가의 특성이 다른 만큼 몽골제국은 중원의 제국들이나 우리 역사상의 고구려, 중동 등에 세워진 제국과는 다르다. 제국이란 어떠한 세력이 광대한 지역에 영역을 설정하고 광대역을 통제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정치적인 시스템이라고 정의되어있다. 지역이 광대한 만큼 이질적인 집단들이 많이 포함되어있고 이들을 통섭하여 시스템에 순응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초원, 해양, 영역형 제국을 막론하고 공통의 사항이다. 그러나 각 집단을 통섭하여 제국에 붙들어두는 역학관계, 즉 메커니즘은 차이가 있다.
     
     

    * 통일이전 몽골 제 부족. (지도)

    영역형 제국(Territorial empire)은 일단 영역을 차지하면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고 세금을 걷는 식으로 행정력을 확보하려 한다. 이를 행하는 총독이나 지사, 군수 등은 모두 중앙정부의 대리인(Representative)으로서 해당지역에 나가있는 것이다. 역사상 제국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영역형 제국이다. 해양제국의 경우 어떤 넓은 영역을 고집하기 보다는 해안과 연안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여 거점간에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연결시키고 이러한 거점간의 물자유통망을 유지하는데 중점을 둔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제국이나 대항해 시대 초기의 포르투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비하여 유목제국은 거대 정착제국의 곁에서 ‘거울제국’으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정착제국을 약탈하거나 약탈의 위협을 바탕으로 한 협약, 또는 정체제국의 변경시장에서 거래할 권리를 독점하여 물자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국을 유지한다. 정착제국은 관리들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유지되지만 유목제국의 경우는 지도자의 군사력으로 획득한 재물을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줌으로서 유지가 된다. 즉 물품분배의 대가로 집단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만약 정착제국이 멸망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혼란으로 인하여 약탈이 쉬워지지만 정착국가로부터의 물품공급이 끊기면 장기적으로는 유목집단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여진다. 바필드의 거울제국 개념은 이러한 역학관계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유목민들이 원하는 것은 약탈의 대상이 되는 정착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정착국가의 생산력이 매개가 되는 일종의 공생관계다. 몽골제국 역시 초기에는 이러한 “거울제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12세기와 13세기에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제국을 구축한 후 그의 후손대에서는 그 모습이 달라진다.

     
    * 테무진과 몽골부족의 통합(지도)

    서력 12세기 중반에 지금의 몽골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여겨지는 칭기즈칸의 몽골통합과정은 명조(明朝) 초기에 한인(漢人) 사관들이 각종 사료를 집대성하여 저술한 원조비사(元朝秘史)와 페르시아의 라시드 알-딘 함마단이 쓴 집사(集史)에 잘 서술되어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는 몽골제국 등장이전에 몽골초원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하마그 몽골연맹을 세운 보르지긴 씨족 카불칸의 방계 손자이다. 카불칸이 초원의 부족들을 하나의 동맹 하에 묶는데 성공하고 ‘울루스(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금(金)나라가 새로운 울루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금나라는 인근의 타타르족과 손을 잡고 몽골 울루스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후 카불칸이 죽고 타이치우트 씨족의 암바하이가 칸이 되었는데 혼인문제 때문에 타타르를 방문하였다가 타타르에게 잡혀 죽고 카불칸의 아들인 쿠툴라가 칸 자리를 이어받는다. 쿠툴라는 타타르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였다가 1160년경 크게 패하고 죽는다. 이후 하마그 몽골연맹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예수게이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금나라가 뒤에서 조종하는 타타르-하마그 몽골 전쟁은 변경민족들을 이간질하여 그 통합을 방해하는 정착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약 변경민족들의 세력이 하나로 뭉치면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많은 비용이 소요됨은 물론 중대한 안보상의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게이는 선조가 타타르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하여 타타르와 전쟁을 벌이다가 타타르의 군장 한 명을 사로잡게 되고 그 군장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테무진’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예수게이는 이후 타타르에게 독살당하고 아내 호엘룬과 그 자식들은 갖은 고생을 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테무진은 주변 부족의 기습으로 잡히게 되고 아버지의 키야트-보르지긴 씨족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타이치우트의 포로가 된다. 타이치우트에게 잡혀있던 테무진은 소르킨 시라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타이치우트를 탈출하게 되며 소르킨 시라의 아들인 칠라운은 후일 칭기즈칸의 심복이 된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테무진은 역시 후일 명장이 되는 젤메와 보르츄를 친구로 삼는다. 테무진은 16세에 옹기라트의 보르테와 결혼하게 되는데 메르키트의 습격으로 보르테가 납치당하자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은 케레이트의 토그릴칸과 그의 어린 시절 안다(의형제)인 자다란의 자무카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를 격파하고 보르테를 되찾는다. 그러나 메르키트에게 잡혀있는 동안 보르테는 임신을 하였고 구출된 후 아들인 조치(손님이라는 뜻)를 낳게 된다. 조치의 출자가 의심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이후 칭기즈칸의 아들들간에 계승논쟁이 벌어질 때 갈등의 불씨가 된다.
     
     
     * 칭기즈칸은 토그릴과 자무카를 상대로 승리하여 
       결국 몽골을 포함한 북방초원을 통일하게 된다. ( 그림 )

     
     
    비록 도움을 받았기는 하나, 초원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있어 토그릴과 자무카 역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력 기원 1206년에 자신들에게 모여든 부족들로부터 ‘칸’으로 추대받은 후 토그릴칸과 역시 추종세력으로부터 ‘구르칸’으로 추대된 자무카와 싸워 승리하고 몽골을 포함한 북방초원의 제 부족을 통일하게 된다. [원조비사]에는 자무카가 패한 후 칭기즈칸 앞으로 끌려왔으나 칭기즈칸은 예전의 우정을 상기시키며 다시 의형제로 지내자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만큼이나 야심이 강했던 자무카는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며 칭기즈칸의 ‘우정에 찬’ 제의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다.

    “나의 형제여,
    그대는 우리 족속을 모두 복속시켰으며
    다른 부족을 모두 하나로 만들었고
    이로서 칸의 보좌는 그대에게 주어졌다

    이제 온 세상을 그대의 뜻대로 할 수 있는데
    내가 과연 그대의 형제로 쓸모가 있겠는가?”

    이제 초원은 모두 칭기즈칸의 것이 되었으며 칭기즈칸은 초원의 모든 전사들을 하나로 만들어 ‘해가 지는 땅 끝’까지 달려가기 시작했다.

     

     

    < 전쟁 : 유목사회와 정착사회의 차이 >

    전 부족이 통일된 몽골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군세(軍勢)를 동원할 수 있었으나 이마저도 인구가 밀집된 정착형 국가에 비하면 수적으로는 초라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강점은 기마집단특유의 기동성과 함께 말을 탈 수 있는 성인남성을 모두 군사력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아울러 활을 쏘고 사냥감을 추적하여 잡아들이는 일상 자체가 군사훈련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 없이 빠르게 전장에 투입될 수 있다는 것도 정착국가의 군대와 싸울 때 큰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이미 전투에 필요한 마필을 키우고 있었으며 평소에 무기와 갑옷 등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군사동원에 필요한 비용이 최소화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동원되어 일을 하지 못한다 하여도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노획물이 대개는 일을 하지 못하는 비용보다 몇 갑절 많다. 즉 유목민에게 있어 정착사회에 대한 전쟁 자체가 생산활동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의 군대는 농업이나 기타 생산활동에 있던 성인남성을 일부 차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무기 사용과 전투에 익숙해지게 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아울러 군대의 구성원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생활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훈련시키고 먹이고 재우는 것은 모두 국가의 비용으로 충당하여야 한다. 즉 전쟁행위 자체가 큰 소비행위가 된다. 물론 정착국가의 전쟁도 이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정착국가가 같은 정착사회와 싸울 경우 비축된 재화(財貨)와 함께 생산기반인 농토,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농민을 차지하기 때문에 전쟁 이후 오히려 국가의 재산과 생산력이 증대되는 경우가 있다. 로마가 공화정 말기에 벌인 정벌의 경우 대개 같은 정착사회를 상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몇 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어들였다. 기원전 167 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후 획득한 마케도니아 왕실의 막대한 재산으로 인하여 로마인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얻은 금의 양은 엄청나서 로마에서 금의 가격이 36%나 폭락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착국가가 유목국가를 상대로 싸울 때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일단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초원지대는 대개 농업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어서 이를 차지해보았자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유목민들은 정착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빼앗아 보았자 동원의 비용도 건지지 못한다. 결국 정착국가가 대군을 일으켜 유목민들을 무찌른다 하여도 유목민들은 속된 말로 짐을 싸가지고 달아났다가 대군이 물러나기를 기다려 다시 차지하면 그만이다. 정착국가는 또 변경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유목민의 침공을 막아야 한다. 이런저런 비용 때문에 정착국가의 관점에서는 효과도 확실하지 않은 정벌전을 벌이기 보다는 협상을 통하여 일정량의 ‘하사품’을 내려주고 변경의 시장을 개방하여 유목민의 소, 말, 양과 털옷 등의 물품을 곡식이나 옷감과 맞바꾸게 하는 것이 비용의 측면에서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칭기즈칸 등장이전의 몽골사회도 이러한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주변의 정착국가를 침탈하지 않는 대신 일정량의 물품을 받고 서역과 중원 등의 무역중개, 그리고 변경무역 등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초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단순히 중원을 공격하여 돈을 뜯어내는 것 이상의 꿈이 있었다. 칭기즈칸 이전 초원의 지배자들은 전쟁으로 벌어들이는 물품을 나누어주는 방식으로 하위 부족들을 아래에 붙들어두었다. 칭기즈칸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러하였으나 이와 더불어 내세운 이념을 부족들에게 내세웠다. 즉 자신의 울루스(나라)에 있는 모든 부족들은 ‘푸른 이리’의 후손들이며 푸른 이리의 후손들은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땅을 그들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천신(天神)인 ‘텡그리’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군주가 아니라 몽골이라는 집단이 천하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종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유목연맹체들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이 노획물의 재분배였다면 칭기즈칸은 새로운 통일집단을 뒷받침하는 정치종교적 이념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민족주의라고 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하여 새로이 형성된 울루스의 구성원들은 보다 단단히 뭉칠 수 있었다. 이들은 푸른 이리의 후예라는 자의식 하에서 하나가 되었고 이로서 칭기즈칸은 일단 약탈물의 공급이 끊기면 쉽게 분열되고 쪼개졌던 과거의 유목연맹체와는 확연히 다른 일종의 정치적인 ‘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을 ‘몽골’이라는 국가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로 간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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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벌의 시대 1 : 대금(對金) 전쟁 >

    통일된 몽골부족의 첫 정벌대상은 티베트족 계열의 당항(탕구트)족이 지금의 중국 섬서성과 영하(닝시아) 자치성, 그리고 신강성에 걸쳐서 세운 국가인 서하(西夏)왕국이었다. 이는 서하 왕국이 통합된 몽골 부족의 영역으로부터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만만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1202년의 첫 공격을 시작으로 서하의 영역을 파고 들었고 1206년에는 대대적인 침공이 이어졌다. 물론 북중국 중원지역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맹약을 맺고 있어 서하를 정벌할 경우 금나라가 구원군을 보낼 가능성이 있었으나 칭기즈칸은 내부 정쟁으로 시끄러운 금나라가 서하에 원군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몽골의 침공을 맞은 서하는 예상대로 금나라에 원병요청을 하였으나 금나라는 원병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서하의 왕실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환종(桓宗)황제가 살해당하고 양종(襄宗)이 새 황제로 등극하였다. 양종은 칭기즈칸에게 자발적으로 복속을 청하고 그의 공주 중 한 명을 칭기즈칸에게 시집보냈다.

    한편 그 동안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몽골의 분열을 조장해온 금나라는 1210년에 칭기즈칸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과거의 칸들이 그러하였듯이 금나라에 복속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금나라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 몽골의 칸과 함께 통합된 몽골의 힘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푸른 이리’들의 후손들은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으려고 하지 않았다. 1211년에 전 부족을 포함하는 ‘쿠릴타이’를 소집한 칭기즈칸은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자리에서 과거 금나라가 몽골에게 가한 온갖 모욕을 상기시키며 원한을 갚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천신에 대한 제사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천신께서 우리에게 원수갚음과 승리를 약속하였다”고 선언하며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명하였다. 이어 칭기즈칸은 9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야호령(野狐嶺)의 전투에서 50만에 달하는 금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몽골군이 금나라의 영역에 진입하자 과거 북부 중국의 지배자였으나 금나라에 복속된 체 지내고 있던 거란족과 심지어 일부 여진 부족까지 몽골에 자진하여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칭기즈칸의 심복인 제베가 심양을 점령하고 만주지역을 금나라로부터 떼어놓았다. 1213년에는 금나라의 중도(中都)인 지금의 북경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1213년부터 1214년 봄에 걸쳐 몽골군은 북중국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결국 중도에 갇힌 금나라 조정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금나라의 새 조정은 몽골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몽골의 제후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뒤이어 금나라의 황제가 된 애종은 아예 수도를 예전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카이펑)으로 옮겼다. 금나라는 스스로가 유목민의 후예였고 몽골군의 몇 갑절에 달하는 병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송나라와의 전쟁과 내부의 혼란으로 군세를 통일하지 못하여 지리멸렬하였다.

     
    1214년에는 현재에도 그 지명이 남아있는 대동부가 몽골군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1215년에는 중도가 몽골군에 함락되었고 몽골군은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당시 그 참상을 담은 기록에는 건물들과 함께 죽은 사람들 역시 불태워 지면서 그 기름이 중도의 거리에 흘러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금나라는 1234년에 몽골과 남송의 연합에 패하고 멸망한다.

    < 정벌의 시대 2 : 코레즘과 카라 - 키타이 >

    몽골이 과거의 단순한 유목 약탈경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 칭기즈칸은 실크로드의 중간길목에 위치한 코레즘 왕국에 500명으로 구성된 상단을 만들어 파견한다. 그러나 몽골의 상단을 맞은 ‘코레즘’의 샤(페르시아말로 임금)인 <알라 앗-딘 무함마드>는 일단 몽골인들이 단순히 교역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탐색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무함마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슬림’이었는데 마침 바그다드에 있는 압바스 왕조의 ‘깔리프’와 갈등 중이었다. 바그다드의 깔리프는 명분상 이슬람 세계의 ‘교황’으로서 무함마드의 코레즘 왕국 역시 그 권위를 인정하기를 요구하였고 무함마드가 바그다드에 와서 깔리프에게 인사와 조공을 할 것을 명령하였다. 무함마드는 깔리프의 요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깔리프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되려 코레즘의 독립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바그다드의 깔리프가 몽골과 접촉하여 코레즘과 몽골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고도 하나 그 여부는 분명치 않다.
     
    몽골의 상단(商團)은 코레즘 왕국의 변경이었던 오트라르에서 코레즘의 관리에게 저지당하고 결국 포로로 잡혔다. 이 사건을 두고 실제로 칭기즈칸이 첩보전의 일환으로서 상단을 보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물론 칭기즈칸이 정벌에 앞서 정보수집에 충실하였고 적진에 내분을 유도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위의 설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금나라와 서하가 아직 멸망하지 않은 상황에서 코레즘과 일부러 전쟁을 할 핑계거리를 만들려고 하였다는 추론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몽골의 사단이 억류당하자 징기즈칸은 이에 대한 경위 해명을 요구하며 세 명의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세명 중 한 명을 참수하고 나머지 둘은 그 수염을 깎아버린 후 참수된 사절의 머리를 들려 돌려보냈다. 그리고 억류중인 몽골 상단 500은 모두 처형당하였다. 아무리 적이라도 사절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몽골인의 관점에서 무함마드의 행위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대노한 칭기즈칸은 코레즘과의 전쟁을 위하여 몽골 전역에서 전사들을 동원함과 동시에 몽골에 복속한 서하 왕국에서도 군을 내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코레즘 왕국은 40만의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에 투르크계의 유목민인 캉리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이는 코레즘 왕국이 실크로드의 중심을 장악한 부유한 나라였기에 가능하였다.
     
     
     * 대만 고궁 박물관에 있는 ‘원태조’(칭기즈칸)의 초상. 

     

    아무리 대초원을 통일하였다지만 코레즘의 40만 대군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 15만의 명의 병사를 모은 칭기즈칸은 그래도 이전에 자신의 신하가 되기로 한 서하(西夏)왕국에 사자를 보내 증원군을 요청했다. 서하의 왕인 신종은 칭기즈칸을 도와주자 하였지만 대장군 아사-감푸를 비롯하여 군권을 장악한 장군들이 이를 거부하였고 “그 정도 병력도 모으지 못하면서 어찌 칸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칭기즈칸의 사절을 조롱하였다. 이는 몽골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거의 정복해 북방 초원의 제왕이 된 칭기즈칸에게 형언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속이 부글거렸지만 코레즘과의 싸움이 급했던 칭기즈칸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코레즘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현재 중국의 신강성 서쪽에서 아랄해까지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걸쳐있던 서요(西遼, 카라-키타이)왕국을 지나야 했다. 원래 서요는 중국 북부를 지배하였던 요나라의 후예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이 1124년에 세운 나라였다. 그 이후 100년간 야율씨가 다스렸으나, 금나라와 싸우고 있던 1211년에 대초원의 부족중 하나였던 나이만이 칭기즈칸과의 전쟁에서 패한후 서쪽으로 도주하여 임금이었던 천희제(天禧帝, 이름 耶律直魯古)를 죽이고 서요의 왕좌를 빼앗는다. 나이만의 군장인 쿠츠룩은 서요에 들어왔을 당시 후대(厚待)를 받았고 서요의 조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랐지만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권력을 구축하고 서요의 왕좌를 찬탈한 것이다. 이로서 서요에서 거란인의 종사는 끝이나고 칭기즈칸에게 패하였던 쿠츠룩은 과거 서요의 땅을 7년동안 지배한다. 1218년에 코레즘으로 진격 중이던 몽골군은 쿠츠룩이 지배하고 있던 서요에 진입하였고 쿠츠룩은 몽골군에 맞서 싸웠지만 서요의 수도인 발라사군(현재 키르기스 공화국 비슈케크 인근)의 주민들은 구츠룩을 위하여 싸워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고 몽골군을 받아들였다. 사세가 기운 것을 안 ‘구츠룩’은 남쪽으로 도망하였으나 주민들에게 사로잡혀 몽골군 앞으로 끌려왔고 결국 참수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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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군의 진군소식을 들은 무함마드는 대군을 모아 결전을 하는 대신 군을 나누어 주요도시에 배치시켜 여러 방향에서 협격(挾擊)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아울러 수도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도시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때문에 ‘무식한’ 몽골족들이 공성전에 약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15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천산을 넘어 코레즘으로 진격하면서 일대(一隊)는 맏아들인 조치에게 맡겨 코레즘의 남쪽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조치는 진격하는 중 약 3만정도의 코레즘군과 충돌하였고 이를 격파함으로써 몽골군이 단지 시위로서 코레즘에 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조치는 아울러 혹시라도 전황이 불리해질 경우 무함마드가 남쪽으로 도망할 수 없도록 길을 막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칭기즈칸이 이끌고 있던 본군의 우선 공격대상이 된 도시는 몽골의 상단이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당했던 오트라르였다. 몽골군은 오트라르를 파괴하여 몽골을 모욕하면 어떻게 되는 지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오트라르의 함락은 무려 5개월이 걸렸는데 몽골군은 수비군이 잘 지키지 않고 있었던 돌문(突門)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와 수비군을 살육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이 성안으로 진격한 후에도 성주와 그의 군사 일부는 내성(內城)에서 끝까지 저항하였다. 약 한 달간 다시 내성을 한 후에야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몽골군은 오트라르의 성주 이날추크를 붙잡았고 어찌보면 몽골의 상단을 붙잡아 몽골과 코레즘간 전쟁을 촉발시켰다고 할 수 있는 이날추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펄펄 끓고 있는 은이었다. 몽골군은 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끓인 은을 이날추크의 목구멍으로 부어서 죽여버렸다. 칸은 또 다른 분대를 심복이자 대초원 최고의 명궁수로 이름이 높은 제베의 지휘하에 남쪽으로 보내고 칭기즈칸 자신과 막내 아들 톨루이가 이끌고 있었고 북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오트라르를 함락시킨 몽골의 본군은 사마르칸드 방향으로 오다가 방향을 바꾸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향한 방향은 키질-쿰 사막이 있는 곳이었다. 죽음의 길로 악명높은 키질-쿰 사막은 현지인들은 물론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 업(業)인 카라반 상인들조차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이를 들은 샤는 몽골군이 길을 잃고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한 시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칭기즈칸은 이미 키질-쿰 사막을 잘아는 향도(嚮導)들을 확보하고 이들을 앞세워 몇 안되는 오아시스가 있는 길을 따라 키질-쿰을 횡단하고 있었다. 많은 군사학자들은 이때 칭기즈칸의 키질-쿰 행군을 두고 역사상 최대의 우회기동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제국에는 많은 도시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도시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였고 이 두 도시는 몽골군의 최대의 목표였다. 몽골군의 진격로로 볼 때 보다 동쪽에 위치하여 있는 사마르칸트가 먼저 공격을 당할 것이 당연시 되었다. 몽골군이 사마르칸트로 오다가 사라져 버렸으니 무함마드는 수비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상황에 코레즘 수뇌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5만의 몽골군이 갑자기 어느 날 부하라 성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부하라는 투르크계 수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긴 농성전을 하기보다 결전을 택하였고 불과 수 일 후에 2만의 투르크계 병사들이 뛰쳐나와 몽골군을 공격하였으나 유인작전에 의하여 남김없이 궤멸되었다. 
    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야전에서 패하는 것을 본 성민들은 자진해서 열었지만, 성안에 남은 투르크 병사들은 내성에서 계속 싸웠고 몽골군은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 몽고에 있는 칭기즈칸의 언덕 위 초상. (사진)

     
    부하라가 함락된 후 몽골군은 코레즘의 수도인 ‘사마르칸드’에 모였다. 사마르칸드는 부하라보다 높고 두터운 성벽과 약 10만의 수비병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고 만약 이들이 마음먹고 수비만 한다면 몽골군에게는 길고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몽골군은 유인작전을 써서 수비병들을 밖으로 끌어내었고 밖으로 나온 5만의 코레즘군은 몽골군의 함정에 빠져 전멸하였다. 사마르칸드의 주민들은 모두 살려주겠다는 칭기즈칸의 약속을 받은 후 자진해서 성문을 열었지만 무함마드의 근위대는 내성에서 계속 싸웠고 몽골군은 이미 복속한 도시에서 또 다시 힘든 싸움을 겪어야 했다. 근위대의 ‘과잉충성’의 대가는 혹독하였다. 칭기즈칸은 이전에 한 약속을 무효로 돌리고 사마르칸드의 주민들을 모두 밖으로 내몰아 죽여서 그 머리를 피라미드처럼 쌓았다. 이때 죽은 주민의 수가 무려 75000명에 달하였다
     

    사마르칸트 함락 후 다른 대도시인 우르겐치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우르겐치는 습지에 지어진 도시였고 이 때문에 땅이 물러 몽골군의 장기인 기마전도 어려웠고 공성을 위한 중장비를 들여올 수가 없었다. 공성기를 들여왔다 하여도 주변이 습지라 큰 돌이 드물어 결국 병력을 동원한 공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칭기즈칸에게 우르겐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맏아들 조치가 성민(성민)들과 항복협상을 개시하자 차남인 차가타이가 반발하였다. 이에 칭기즈칸은 조치와 차가타이를 빼고 오고데이에게 지휘권을 주었고 조치와 차가타이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우르겐치가 함락되자 장인들과 공인들은 몽골 본토로 보내졌고 여인들과 아이들을 노예를 잡은 후 나머지는 모두 참살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사망자가 백만을 넘는다고 하지만 이는 과장이다. 우르겐치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고 이후 바미안과 더불어 코레즘 전쟁 중 몽골군이 자행한 대학살 중 최대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몽골군이 사마르칸트, 부하라, 우르겐치등 코레즘의 주요도시들을 모두 점령하고 분산배치 되어 있었던 코레즘군을 대부분이 패한 후 코레즘제국의 왕 무함마드는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잘랄 앗 딘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 가서 저항할 준비를 했다. 마침 지금의 이란 북쪽 파르완에서 몽골의 소부대가 패했고 그 근처의 도시가 반기를 들 기미를 보였다. 코레즘의 중심부를 떠나 남부지역인 호라산으로 진입한 몽골군은 테르메즈, 발흐, 메르브, 니샤푸르, 헤라트, 바미안 등을 연이어 함락시켰다. 이 방면의 지휘를 맡은 톨루이는 메르브의 수비군이 강력히 버티자 살려준다고 그들을 속인 다음 모두 죽였다. 니샤푸르에서는 칭기즈칸의 사위 중 한명인 토쿠차르가 목숨을 잃었고 니샤푸르가 함락되었을 때 톨루이는 성안에 살아 돌아다니는 것은 심지어 짐승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살육하였다.

    몽골군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남쪽 바미안을 공격할 때는 불행하게도 칭기즈칸의 손자 모두간이 농성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고 이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몽골군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미안을 함락시키라고 명령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몽골군은 결국 바미안을 함락시켰다. 도시를 함락시킨 몽골군은 대개 학자와 기술자, 공인(工人)들은 살려 몽골로 데려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칸의 친족이 죽임을 당한 경우는 달랐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있던 칭기즈칸은 바미안에 있는 모두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 바미안에 있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몽골군의 칼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니샤푸르와 마찬가지로 바미안에는 살아 돌아다니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었다. 그 참상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몽골군 스스로도 바미안을 ‘슬픔의 도시’라고 부를 정도였다.
     
     
    무함마드는 카스피해 방면으로 도망쳐 외딴 섬에서 병들어 죽었고 아들인 잘랄 알-딘은 비록 소규모 몽골 선봉대와 싸워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목적은 5000명과 피난민들을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일단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더스강에서 몽골군에게 따라잡히고 잘랄 알-딘은 인더스 강가의 전투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마저 거의 모두 잃었다. 결국 몇 안되는 군사들과 함께 인더스강을 건너 델리의 술탄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몽골보다 병력도 많고 실크로드 위에서 번성하던 코레즘 제국은 이리하여 1221년, 몽골의 칭기즈칸에게 멸망 당하였다. 이후 잘랄 알-딘은 다시 나라를 일으키려고 코레즘으로 돌아와 반란을 선동하였으나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데이칸이 보낸 군사에게 패한 후 국제적 미아로 전락하여 셀주크 그루지아 등지에서 싸우면서 약간의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1231년에 셀주크의 술탄이 보낸 암살자에게 죽는다.

    몽골의 코레즘 정벌은 군사의 수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유목세력이 거대한 정착국가를 멸망시켰다는 선례를 남김과 동시에 후일 몽골군에 의한 러시아, 유럽, 이슬람 세계 정벌을 가능케 하는 기반에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 우르겐치의 코레즘 왕궁유적. (그림)

     
     
    < 정벌의 시대 3 : 코카서스, 루스  >

    코레즘 정벌이 완료된 후 몽골군은 둘로 나누어졌다. 본군은 아프간과 인도 북부를 휩쓴 후 칭기즈칸의 인솔하에 몽골 본토로 돌아갔으나 수보타이가 이끄는 군은 페르시아와 코카소스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카스피해 남부를 돌아 러시아로 행하던 도중 수보타이의 몽골군은 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시(市) 근처 쿠라江가에서 그루지아왕 게오르규 4세의 군대와 격돌하였다. 몽골군은 무려 7만에 달하는 그루지아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경기병을 내보내어 유인하였다. 그루지아군의 기사들은 열심히 뒤쫓았으나, 아무리 달려도 몽골의 경기병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그루지아군은 어느새 개활지로 나와 있었고 매우 지쳐 있었다. 이때 몽골 경기병이 도주를 멈추고 일제 사격을 가한 뒤, 말을 갈아탄 몽골의 중기병 군단이 돌격을 개시하였다.
     
     
    * 코카서스와 러시아 남부까지 정벌한 칭기즈 칸. 

    몽골 중기병들이 그루지아 군을 양분(兩分)하고 그루지아 보병을 도륙하기 시작하였고 수 시간 후 그루지아군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였다. 같은 해 (1221)말에 본격적으로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가기 전에 그루지야(현 조지아)군과 다시 격돌하였고 몽골군은 다시 유인작전으로 그루지아군을 함정에 빠뜨린 다음 궤멸시켰다.

    이들은 이미 1220년, 코레즘 정벌이 막바지로 접어들 당시 칭기즈칸의 최종 승인이 있기 전에 이미 코카서스 방면으로 진입하여 북쪽의 알란족, 체르카스 등의 부족연합군을 격파하고 뒤이어 부족유목민인 쿠만과 싸워 쿠만의 칸을 전사시킨 일이 있었다. 이들이 다시 코레즘으로 돌아가 칸의 허락을 받는 동안 코텐이란 인물이 이끄는 다른 쿠만족 일파가 결혼동맹을 맺고 있던 갈리치아-블라디미르의 므티슬라프에게 도망쳤다. 코텐은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몽골이 쳐들어와서 루스마저 점령당할 것이라며 구원을 요청했으나 쿠만족은 오랫동안 루스의 변경을 약탈하면서 괴롭혔기 때문에 루스의 대공(大公)들과 귀족들 중 그 누구도 선뜻 쿠만족을 돕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수부타이와 제베의 코카서스/러시아 남부 원정은 본격적인 공격과 점령보다는 일종의 정찰과 함께 적의 전력을 가늠하기 위한 탐색공격(Probing attack)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두 개의 투만(만인대)에 불과하였으니 아무리 많아도 2만을 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불과 2만으로 그루지야, 알란 - 체르카스, 쿠만을 이겼다는 것은 거친 환경에 익숙한 몽골인들의 강인함과 함께 ‘수부타이’와 ‘제베’의 전술적 천재성이 합쳐진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코카서스 인근을 휩쓴 몽골군은 결국 1223년에 루스의 18개 공국(公國)의 군사들이 연합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칼카강에서 대결하게 된다.
     
     
    몽골군은 ‘드네프르 강(江)’까지 진출하여 지금의 카자흐스탄 남부에 있는 조치로부터 원군을 기대하였으나 조치가 병을 이유로 원군을 보내지 않아 결국 있는 병력 그대로 루스의 병력과 싸워야 했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일단 물러서기로 하였다. 루스의 군세는 몽골보다 많았지만 총지휘자가 없어 각자 군을 이끌고 움직였다. 몽골군은 동쪽 칼카강을 향하여 물러나면서 1000명의 후위를 두어 루스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였다. 이 후위부대는 강을 비록 중구난방으로 건너기는 하였지만, 이곳저곳에서 들이닥치는 루스의 군사들을 맞게 되었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한다.

     
    칼카 강(江)에서 격돌하였을 때, 루스 연합군 중 ‘폴로프치’의 군사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하였고, 뒤이어 전장에 진입하고 있던 연합군과 충돌하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몽골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고 화살공격에 이은 포위전을 구사하면서 루스의 군사들을 궤멸시켰다. 비록 점령에 충분한 군사들이 없어 전투에 이겼음에도 철수하여야 했지만 칼카 전투의 결과로 루스의 군사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때 통합되지 못한 루스가 매우 취약함을 알아낸 몽골군은 후일에 ‘조치’의 아들인 ‘바투’의 지휘 하에 <루스 전역>을 휩쓸고 초토화시킨다.

     
    < 서하에 대한 공격과 죽음 >

    칭기즈칸이 코레즘 정벌을 끝내고 돌아온 후 그는 이전에 서하 왕국에 코레즘 정벌을 위한 병력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고 모욕까지 당한 것을 상기하고는 그 날의 모욕에 대한 징벌을 가하고자 하였다. 이때 서하의 임금이었던 헌종(獻宗)은 칭기즈칸에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받고자 하였으나 서하의 군부는 이를 거부하고 몽골과 결전을 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전황은 서하군에게 불리해지기만 하였고 설상가상으로 헌종 황제마저 사망하였다. 서하의 마지막 임금인 말제(末帝) 이현은 수도인 흥경(興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공격을 지휘하고 있던 톨루이에게 복속의 의사를 밝혔고 톨루이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흥경의 성문이 열리는 순간 몽골군이 난입하여 흥경내의 모든 것을 닥치는 데로 파괴하였고 말제는 톨루이 앞으로 끌려나와 처형당하였다. 이로서 이원호가 1038년에 세워 거의 200년을 지속하였던 서하 왕국은 이전에 칭기즈 칸을 모욕한 대가로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수도 싱징(興京)은 불타 없어졌다. 하지만 서하 정벌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227년, 전 몽골을 통일하고 카스피해에서 바이칼호, 그리고 만주의 요하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은 이미 전장에서 사망한 후였다. 일설에는 늙은 칸이 낙마(落馬)한 후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는 서하의 군사들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그의 생이 짧아 세상을 전부 정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 뒤 그의 자손들에게 남은 세상을 정복할 것을 주문한 후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강력한 지도자가 사라진 후 급격하게 붕괴하였던 다른 유목제국들과는 달리 몽골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영토를 더욱 넓히고 그들의 말발굽 아래 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켰다.

     

     < 칭기즈칸의 제국과 유산 >

    칭기즈칸이 통일한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던 나라들은 그의 군사적 위업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무자비한 학살자로 그린다. 미국의 시사 잡지인 타임지는 1999년 말에 특별판을 내면서 지난 천년간(1000-1999)에 가장 잔인한 인물 중의 하나로 칭기즈칸을 선별하였다. 비록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후 몽골군에게 여러 차례 크게 패한 적이 있는 유럽인들은 몽골군을 타르타로스(지옥)에서 온 군대라 부르면서 사악한 악마의 군대로 묘사하였다. 타임지의 기사는 이러한 인식이 아직도 불식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자손들에게 도시들이 철저히 파괴되었던 이슬람에서도 칭기즈칸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다. 특히 이슬람의 문화적 수도였던 바그다드가 1258년에 몽골군에게 깡그리 불태워진 사실은 이슬람의 역사에서 커다란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인들이 일부 점령지에서 파괴행위를 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전쟁의 부산물인 약탈행위의 결과, 또는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려는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몽골인들뿐 만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진시황 등 소위 ‘제국의 건설자’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칭기즈칸을 위시한 몽골인들만 ‘지옥에서 온 야만인들’로 인식하는 것은 상당히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칸이 뛰어난 지휘관이나 전쟁지도자였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몽골에게 있어 전쟁에서의 승리 이상의 것을 남겨주었다. 그는 국가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던 몽골족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푸른 이리”의 후손이라는 이념에 기반한 초기적 형태의 민족의식은 물론 유목민의 관행을 ‘야사’라는 법으로 법제화하여 ‘울루스’의 구성원들이 이에 따르게 하였다. 국가운영 제반 사항에 대한 명문화된 룰이 있다는 것은 체계적인 행정과 통치를 가능케 한다. 아울러 칭기즈칸은 비록 다른 문화권의 문자이긴 하지만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문자를 국문(國文)으로 공식화하여 문자가 통용되지 않던 몽골사회에 각종 정보를 명문화 할 수 있는 기호체계를 주었다. 정착 왕조를 정벌하여 정복왕조를 통치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다른 유목민들과 달리 통합이념과 체계적인 법, 그리고 문자를 가지게 된 몽골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게 되고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이 이룩한 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후에도 하나의 공고한 집단으로 존속하게 된다. 세상은 칭기즈칸의 기마대와 거대한 제국을 기억하지만, 필자는 몽골이란 나라와 민족을 존재하게 한 영웅으로서의 칭기즈칸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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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성남 /  안보· 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있다.
    출처 김성남 전쟁 전문가 글, 페이스북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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