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물이 된 중계방송’
보신각 앞 행사에서 KBS의 보도태도가 문제가 되는 모양이다. MBC의 신경민 앵커가 드디어 한 마디 했다. 사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KBS에서 어떻게 중계를 할지 걱정을 많이 했다. "도처에 노란풍선과 플래카트가 올라와 있으니, 앵글 잡기 힘들고 무엇보다도 음향을 차단하느라 고생하겠다."고 서로 농담을 주고 받았었는데, 막상 중계방송이 시작되고 보니 이 모든 우려가 한갓 기우로 드러나고 말았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그 방송의 테크닉에 솔직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현장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 즉 플래카드, 노란 풍선, 하늘로 떠가는 꽃등, 그 커다란 구호소리 등은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당했다. 그러니 KBS를 걱정해주던 우리는 얼마나 순진한가?
비슷한 사건이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만 예를 들자면, 클린턴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단상 앞에서 환영하는 시민들 중 한 사람이 클린턴과 슈뢰더를 함께 비난하는 플래카트를 들고 서 있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너희들은 배가 부르지?"라는 글이었다. 그런데 어느 주간지에서 이 사진을 사용할 때 그 플래카트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 돌출적인 플래카트가 전반적인 환영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별 일 아니지만, 문제는 보도 사진에 조작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 자체가 미디어윤리상 범죄적이라는 것이다. 결말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는데, 한 동안 책임자를 찾아서 처벌한다고 난리를 치던 기억이 난다.
KBS의 경우는 이것과 애초에 스케일이 다르다. 수많은 군중 중에서 한 사람을 지운 게 아니라, 보신각을 둘러싼 군중들 전체를 모두 다 지워버렸다. 좀 비꼬아서 말하자면, 그 솜씨 앞에서는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만든 데이비트 커퍼필드마저 울고갈 듯하다. '직접 현장에서 체험하는 현실과, 미디어로 매개되어 스크린에 비치는 현실 사이에 이렇게 큰 존재론적 차이가 있구나.', 하는 깊은 철학적 충격을 받았다. 매트릭스의 체험이라고 할까? 적어도 현장에 있던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튼 새해 첫날 시청자들이 KBS 화면으로 지켜본 것은 리얼리티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바람직한 리얼리티의 이상이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중계방송이 아니라, 한편의 환타지물이었다고 해야 할까?
앵글을 조작하여 보신각 주변의 시민들의 모습을 차단하고, 노이즈를 차단하는 장치로 현장에 울려퍼지는 항의의 구호를 사라지게 만든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놀라운 것은 그 조치의 완벽성일 뿐이다. 더 황당한 것은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퍼부어지는 야유소리를 미리 준비한 박수소리로 대체한 것. 여기에 대한 KBS의 해명을 듣고, 한 마디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사실 이게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KBS에서 현장의 아유 소리를 박수 소리로 바꾸어 놓은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시각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KBS 방송이 기본적으로 서울시에서 하는 어떤 공적 행사의 현장 중계라고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KBS가 만드는 일종의 새해맞이 쇼 프로그램이라는 견해다.
만약에 보신각 방송의 성격이 후자에 속한다면, 음성을 합성해 집어넣은 연출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미 쇼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웃음소리를 합성해 집어넣는 방송의 관행에 익숙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현실의 '왜곡'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만약 그 자리에 정말로 방청객들이 앉아 있다면, 또 거기에 마이크를 갖다대고 녹음을 한다면, 거기에 앉은 관객들이 보일 반응 역시 제작팀에서 합성해 집어넣은 폭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관행에 대해서는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어 있어, 시청자들도 그것을 양해하고 넘어가준다. 웃음이라는 것은 전염성이 있어, 혼자 웃는 것보다 (가상의 장치를 통해서라도) 여럿이 같이 웃는 게 더 즐겁다는 것을 시청자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보신각 방송의 성격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중계에 속한다면, 당연히 사정이 다를 것이다. 여기서 보신각 방송의 성격이 중계였는지, 연출된 쇼 프로그램인지는 따로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장에서 모인 시민들도 그 추운 날 가수들 노래하는 것을 보려고 거기 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게 주된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방송을 지켜보던 시민들도 그저 평소에 아무때라도 안방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쇼 프로그램을 보려고 그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닐 게다. 1년에 딱 한번만 볼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 때문에 그 추운날 그 현장에 나갔고, 또 그 깊은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것이리라. 한 마디로 보신각 방송의 본질은 실시간 중계방송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중계되는 화면에 합성음을 집어넣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청자들이 "방송 테크닉의 하나"라고 너그럽게 용인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다. 물론 PD에게는 현장에서 들리는 소리가, 거기서 보이는 영상이 행사의 취지에도, 방송의 취지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할 권리가 있다. 또 그의 그런 생각과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중계차가 나갔다면, 자신들이 주관적으로 원하는 장면만 내보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면, 거기에도 영상의 일부를 할애하는 것이 옳다. PD는 쇼를 연출할 권리가 있지만, 현실을 연출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오세훈 시장이 인사를 할 때, 현실에서는 야유 소리가 터져나왔다. 현실이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배치된다고 해서 그것을 합성음으로 처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규약을 넘어선 것이다. 적어도 그 장면을 볼 때 시청자들은 스튜디오 내에서 PD가 연출하는 쇼가 아니라, 스튜디오 바깥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본다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현장의 잡음을 제거하고, 마이크에 잘 안 잡히는 박수 소리를 잘 들리도록 증폭시키는 차원을 넘어, 아예 야유 소리를 박수소리로 바꾸어 놓은 경우다. 현장에 있었던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오세훈 시장은 야유를 받았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방송에서는 그가 박수를 받았단다. 한 마디로 현장의 의미 자체가 물구나무 서 버린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시청자들은 '진실'의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갖게 된다. 그것을 간단히 방송의 관행에 대한 시청자의 무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오늘날의 시청자들은 신윤복이 졸지에 여자로 등장해도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허구적 연출에 관대하다. 하지만 그렇게 관대한 시청자들조차도 이런 식의 연출은 분명히 도를 넘어섰다고 느낄 것이다. 심지어 쇼 프로그램에서도 연출이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쇼 프로그램에서 종종 연예인들의 몇몇 발언이나 행동이 이른바 '설정', 혹은 '연출'로 드러나는 바람에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심지어 쇼 프로그램의 '설정'이나 '연출'의 자유에도, 그것이 현실성과 관계되는 어떤 부분에서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 한계란, 가상을 현실인양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리라.
중계방송은 PD의 주관적 신념을 객관적 현실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다. 시청자들이 방송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PD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타종식의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타종식의 사건이었다. 그의 주관적 신념은 그런 객관적 현실에 짜증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계방송에서 시청자가 기대하는 것은 PD의 주관적 신념이 아니라, 그의 신념과 무관하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야유소리를 박수소리로 둔갑시킨 것도 '방송 테크닉의 하나'라고 용인을 한다면, 왜 다른 연출의 기법들은 '방송 테크닉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렇게 하나 하나 허용을 하다 보면, 머잖아 모든 중계는 보도가 아니라 PD의 상상력으로 연출하는 환타지 장르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 기술적으로 가능한 연출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현장의 카메라가 보신각에 초청된 인사들이 종을 치는 장면만 찍는 것이다. 거기에 과거에 미리 찍어두었던 시민들의 영상들을 편집해 집어넣고, 오세훈 시장이 종을 칠 때 환호와 박수와 환성의 소리를 편집해서 방송을 하고, 건물이나 배경은 CG로 처리해서 2009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PD는 자신의 신념을 어지럽히는 현실의 방해, 질료의 저항, 사건의 돌발을 무력화시키고, 저항이 없는 가상의 매끈한 공간 속에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타종식, 다시 말해 타종식의 이데아를 연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게 그가 말하는 "행사의 취지와 방송의 목적"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굳이 타종식에서까지 시위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PD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견해의 표출이야말로 중계용 카메라나 편집기로 할 게 아니라, 좀 다른 경로를 통해서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인기 없는 대통령이 참석한 기공식에서 시민들이 항의시위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에는 환호와 박수갈채만 보인다. 인기 없는 경찰청장이 나와서 타종을 한다. 시민들이 일제히 야유를 한다. 인기 없는 국회의원들이 길거리에 나와 불우이웃 돕기 쇼를 하다가, 시민들에게 타박을 받는다. 그런데도 화면에서는 온통 미담의 스토리만 흘러 나온다. 이거,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그런 연출은 3공과 5공시절에 겪을 만큼 충분히 겪지 않았던가. 연출된 중계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표상을 표현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세계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 자리에서는 야유소리가 아니라 박수소리가 들려야 한다는 것은 PD의 주관적 신념이다. 하지만 중계방송에서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PD의 주관적 관념을 보는 것이 니라, 그것이 내 신념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현실에서 직접 일어나는 사건을 보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이라도 그 일단을, 그것이 아무리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그게 과연 적절한지 여부는 시청자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왜냐하면 특정 정치인을 향한 야유를 박수로 둔갑시킨 그 영상의 조작, 그런 기법들이 "방송 테크닉 중의 하나"로 널리 용인되는 상황은, 우리에게 불현듯 유명한 어떤 사람의 말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세계다."
히틀러의 말이다. 방송을 둘러싼 최근의 정치적 상황은, 이 말을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의 기술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의 불길한 전조로 들리게 한다. 거기에 대한 네티즌들의 우려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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