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광주광역시에 대주(大州)라는 이름을 가진 오래된 아파트가 있습
니다. 몇 년 전의 일
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이 아파트의 어느 동 11층에 김연태라는 고
등학교 2학년 남
학생이 살았답니다.
어느 해 여름 방학이었다죠. 김연태는 외출을 했다 집으로 돌아 오다
우편함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전화요금 고지서 같은 우편물이 몇 개 들어있어 우편물
을 챙기던 김연태
는 옆집 우편함에 예쁜 꽃 무늬 편지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
애편지임을 한눈
에 알아 본 연태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옆집에도 고등학교 2학년쯤
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에게 온 편지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태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고 또 우편함 앞에 있는 엘리베이
터가 몇 층에 머
물러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그 우편함이 자기네 것인 양 손을 넣어
편지를 꺼냈습니
다. 편지를 표시 안나게 뜯어 본 뒤 밤이나 아침에 도로 가져다 놓으
면 다음날 배달된
것으로 여길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태가 그 꽃무늬 편지를 들고 있던 우편물 사이에 끼워 넣는
순간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누가 등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옆집
여학생이 튀어나왔습니다.
그 여학생은 곧바로 연태가 서 있던 우편함 앞에까지 달려와 멈추더
니 우편함 안을 살
피기 시작했습니다. 연태는 가슴이 뜨끔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
습니다. 그는 옆
집 여학생을 남겨둔 채 문이 닫히기 직전의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
어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연태는 자기 방에서 가슴을 쓸어 내리며 그 꽃무늬 편
지를 꼼꼼히 살펴
보았습니다. 생각대로 어떤 남자가 '김미영' 이라는 여자에게 보낸 편
지였습니다. 그
때 연태는 옆집 여학생의 이름이 김미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
었습니다.
연태는 편지를 가지러 나왔던 옆집 여학생을 생각하자 남의 사적인 편
지를 몰래 읽는
것이 좀 미안했지만 그대로 갖다놓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
다. 옆집에 배달된
신문을 조금 먼저 읽고 표시 나지 않게 접어 제 자리에 가져다놓는
일 정도로, 편지의
주인이 자기에게 온 편지를 누군가 읽었다는 것만 모른다면 문제될
게 아무것도 없다
는 생각이었습니다. 편지가 하루 늦게 배달되는 것 빼고는.
연태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다 편지를 쓴 사람 이
풀로 단단히 붙인
곳이 아닌, 봉투를 만드는 공장에서 엉성하게 붙여놓은 편지의 밑 부
분 한쪽을 조심스
럽게 뜯기 시작했습니다.
회를 뜨듯, 풀로 붙여져 있는 종이와 종이 사이를 날카로운 칼로 그어
가며 조심, 조심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조금만 하면 편지지를 빼낼 수 있을 만큼 편
지봉투를 뜯었을
때 연태는 콧속이 가려운가 싶더니 갑자기 재채기를 했습니다. 갑자
기 터져 나온 재치
기인지라 연태는 참을 틈도 없이 연속으로 두 번의 재채기를 했는데
재채기가 끝내고
감았던 눈을 떠보니 편지 봉투의 귀퉁이가 찢어져 있는 것이었습니
다. 재채기를 할 때
손이 떨려 그만 잡고 있던 편지봉투가 찢어지고 말았던 겁니다. 찢어
진 부분은 편지봉
투의 아주 일부분이었지만 찢어진 곳을 감쪽같이 풀로 붙일 수는 없었
습니다.
편지는 손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하게, 답장 늦어서 미안
하다, 네 편지 받
고 많이 생각했다, 나 역시 너를 사랑한다, 8 월 5일 저녁 6시에 너
희 집 앞에 있는
빵집으로 나와라, 이게 내용의 전부였습니다. 생각했던 것처럼 낭만적
이지도 않았고
은밀한 내용도 없었습니다.
연태는 편지를 다시 갖다 놓으려고 찢어진 부분을 정성껏 풀로 붙여보
았습니다. 그러
나 찢어진 부분은 얇은 종이가 찢어졌을 때처럼 종이의 면을 겹치지
않고는 풀로 붙일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연태는 편지봉투를 겹쳐 붙였다 붙였던 부분을 다시 떼어냈습니다. 그
렇게 붙이고 보
니 찢어진 상태로 그냥 두는 것보다도 더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연태는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찢어지고 또 풀로
붙였다 다시 떼
어난 흔적이 역력한 편지를 그대로 가져다 놓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
고 편지봉투를 사
다 필적을 흉내내어 소인도 찍히지 않은 편지를 갖다 놓을 수도 없었
습니다.
연태는 만약 옆집 여학생이 누군가 자신의 편지를 개봉해 읽은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자신을 의심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 편지는 연태의 참고서 사이에 끼워져 책꽂이에 꽂히고 말았습
니다. 휴지통에
버리자니 양심이 찔리고 갖다 놓자니 자신이 의심을 받을 것 같아 이
러 지도 저러 지
도 못한 것이었죠.
그런데 3일정도 지난 저녁 무렵 연태는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
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 모여서 떠드는 소리,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
아파트의 베란다로 나가 밑을 내려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
리고 있었는데 그
들의 한쪽에 피투성이 여학생이 엎어져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도
몹시 끔찍한 몰
골이었습니다. 머리는 두개골이 파열되어 뇌 조직이 밖으로 드러나 있
는 것 같았고 얼
굴은 한쪽이 완전히 뭉그러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바로 연태가 편지를 훔쳤던 옆집 여학생이었습니
다. 이유는 확실
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분명한 것은 자살이었습니다. 평소에 우울증
이 좀 있었는데 최
근 들어 증상이 더 심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연태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옆집 여학생을 자기가
베란다에서 떠민
것만 같았습니다. 그 편지만 전해줬더라도 옆집 여학생이 삶의 활력
을 얻어 죽지 않았
을 텐데, 그 편지를 받지 못해 상심한 나머지 자살을 한 것만 같았습
니다.
그 뒤부터입니다. 연태에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그 사고가 있던 날 연태는 침대에 쓰러져서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
습니다. 그리고
벽시계가 새벽 3시를 알리는 종을 치기 시작할때 연태는 갑자기 잠에
서 깼습니다.
댕! 댕! 댕-
3번째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연태는 온 몸이 경직되면서 지독한 가위
눌림이 시작되었
습니다. 천정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누운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
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던 연태는 천장에 빗물이 새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점점 그 형태가 또렷해져오자 연태
는 앗!, 하고 비명
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지른 비명이었습니다.
천장의 그 뭉그러진 덩어리는 바로 자살한 옆집 여학생이었던 것입니
다! 피로 얼룩진
붉은 색 잠옷을 입은 채로 천장에 낀 듯이 붙어있는 옆집 여학생… 십
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처럼 벌리고 있는 팔은 뒤틀려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부러져 누
런 뼈가 허벅지
를 뚫고 튀어 나와 있었습니다. 아스팔트에 긁히고 깨어져 형체가 명
확 하지 않은 얼
굴은 중증 지체장애자처럼 뒤틀린 듯이 옆쪽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눈
만은 연태를 노려
보고 있었습니다. 긴 머리카락과 스커트는 중력의 영향으로 침대 위
에 누워있는 연태
를 향해 늘어져 있었는데 그 머리카락을 타고 뭔가가 한 방울씩 똑,
똑, 똑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 떨어진 차가운 액체가 연태의 입가로 흘러들었는데 찝
찔한 맛, 바로
골수가 섞인 피였습니다.
눈을 감을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는 상황… 온 몸에서 식은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미칠 것 같은 상태가 얼마나 계속 되었을까?
벽시계가 다섯 시를 알리자 다섯 번째 종소리와 함께 말 한마디 없던
여학생이 천장에
서 스르르 사라지고, 연태도 그제야 몸을 움직 일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연태는 매일 밤 3시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 인
간과 만나야 하는
일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옆집 여학생의 원귀
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와 절과 성당을 닥치는 대로 드나들고 잠자리를 옮겨도 봤지
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김아무개고 모 대학 1학년생입니다. 저는 어떤 인터넷회사의 공
짜 메일을 사용하
는데 어느 날 메일계정을 열어보니 '용서해 주세요'하는 편지가 와 있
었습니다. 보낸
사람은 못 보던 아이디였습니다. 처음에 저는 광고메일인줄 알았습니
다. 요즘은 광고
메일이 별난 제목으로 다 오니까요.
누가 보낸 무슨 편지인지 모르니 저는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열어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미영아, 안녕!
날씨가 꽤 덥지?
보낸 편지 잘 받았다.
답장 늦어서 미안하다.
네 편지 받고 많은 생각을 했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나 역시도 너를 너무 사랑한다
는 것이다.
2월 5일 저녁 6시에 너희 아파트 입구에 있는 빵집으로 가겠다.
만나서 좋은 얘기 많이 하도록 하자.
널 사랑하는 은요일
이것이 장미영 님에게 온 편지의 내용입니다. 제가 편지를 훔쳐 못 읽
게 해서 너무너
무 죄송합니다.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서 제가 반성을 하고 사과를 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저의
후회와 사과가 진심이라는 것은 미영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정말 죄
송합니다. 죄송
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쓸 줄 모르는 제 손이 너무 원망스럽군
요. 죄송합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
시오. 그리고 이
제 제발 그만 모습을 드러내 주십시오. 저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
고 제발…
저는 이상한 편지도 다 있구나, 하며 누군가 주소를 잘못 입력해 엉뚱
한 곳으로 배달
된 편지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저는 잠을 자다 눈을 떴는데 위에서 말한 것과 같
은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그 뭉그러진 얼굴, 한이 서린 그 눈
빛… 아, 그 일은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바보 같은 저는 연속으로 3일 동안이나 끔찍한 원귀에 시달리고 나서
편지의 내용 중
가위눌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에 그 편지가 원인
이 아닐까 의심을 하기 시작한 거죠.
다행이 편지는 삭제되지 않고 제 메일 계정에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편지를 보낸 사람의 주소로 답장을 썼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받
은 뒤부터 밤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편지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고 싶
다, 한번 통화를
하자, 그리고 제 휴대폰 번호를 적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2
시간쯤 지나 전화
가 걸려 왔습니다. 새벽 1시쯤이었습니다.
'저, 저, 제가 편지 보낸 사람인데요.'
전화를 건 사람은 변성기가 막 지난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몹시 망설
이는 듯한 말투였
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정말 죄송합니다, 라는 말로 시작한 얘기가
바로 위에 쓴 그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얘기의 끝에, 그 여학생의 원귀를 달래줄 어떤 방법도 없어서
하늘나라에서 받
아보라고 편지를 썼는데 그게 바로 저에게 보낸 그 편지였답니다. 편
지를 쓰기는 썼는
데 보낼 곳이 없어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로 아무 자판이나 두드려 E메
일 주소를 입력
하고 편지를 전송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 메일주소였던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편지를 전송한 뒤 그 사람은 그 날부터 그 여학생의
원귀가 나타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 원기가 편지를 따라 저에게 왔는지, 그 편지를
읽은 저에게 나타
나기 시작한 것이죠.
저는 그 원귀가 편지를 따라 다닌다는 가설을 세워놓고 그 편지를 복
사해서 친구에게
보낸 뒤 전화를 걸어 빨리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3시가 넘었는데도 그 원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었습
니다. 저는 다행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편지를 받은 친구가 걱정되어 친구의 핸드폰으
로 계속 전화를 걸
었는데 받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는 다섯시가 딱 돼서야 전화를 받았는데, 친구는 얼마나 무서
웠던지 우는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얘기를 들어보지 않아도 그 원귀를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저는 자세한 얘기를 하면 친구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아 원귀를 물리치
는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해놓고, 학교도 빼 먹은 채 낮동안 내내 이렇게 글을 쓰
고 있습니다. 그
냥 은요일이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만을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은 가혹
한 일이라는 생각
에 앞으로 편지를 받을 누군가에게 원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
려 드리기 위해서
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저도 답답하군요.
이제 편지를 다 썼는데 저는 이 편지를 제가 편지를 보냈던 친구 에
게 보내 다른 누군
가에게 보내 읽게 하라고 시킬 생각입니다. 그래야 그 친구도 원귀에
서 풀려날 수 있
으니…
이 편지를 받아 읽었다면 여러분도 부디 그냥 무시해 버리지 마십시
오. 후회해도 그
때는 늦습니다.
밤 3시가 되면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면서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
리, 또 천장 속인
지 지붕 위인지를 누가 걸어다니는 것 같은 발자국소리, 정신이 들어
눈을 깜박이고
싶어도 꼼짝도 할 수 없고, 올려다보고 있는 천장에서는 얼굴이 뭉그
러진 여학생이 피
투성인채로 매달려 붉게 충혈 된 핏빛 흰자위를 드러낸 채 노려보고
있고, 뒤틀린 팔
과 부러져 허벅지를 뚫고 튀어나온 뼈, 짓이겨진 입술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부러진
이빨들,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 정말 생각조
차 하기조차 싫은
공포…
한밤중에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무서워서 머리가 돌지 않으면 다 행
일 겁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부디 건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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