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광란질주', 범인은 여고생
[연합뉴스 2005-08-10 10:02]
(수원=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지난달 28일 훔친 차량을 몰고 수원시내를 질주하며 차량 14대를 파손시키고 달아난 범인 2명은 여고생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기도 수원중부경찰서는 10일 수원 모 고교 1학년 C(17)양 등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차량 등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같은 반 친구인 이들은 지난달 28일 오전 6시께 오산시 모 여관에서 인터넷채팅으로 만난 오모(30)씨가 잠든 사이 차량 열쇠를 훔쳐 투스카니 승용차를 몰고 수원시내를 질주하다 차량 14대를 잇따라 들이받은 뒤 차를 버리고 달아난 혐의다.
지난달 말 가출해 수원시내 찜질방과 PC방을 전전하던 이들은 오씨의 휴대전화 사용내역 조회를 통해 신원을 확보한 경찰의 자수 권유를 받고 경찰서에 나와 조사를 받았다.
C양은 경찰에서 "호기심에 운전을 한번 해보려한 것인데 접촉사고를 내 당황해 달아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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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러고 신고하니깐 좋은지;
저는 뭔가 찝찝한 생각이..
제가 좋아하는
소닌양입니다.
소닌, 그리고 성선임. 1983년에 태어나서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여가수가 가지고 있는 두개의 이름. 지금까지 그 출신을 지닌 연예인들은 모두 그것을 감추려고만 했었던 '재일교포'라는 꼬리표를 당당하다 못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명찰로 달고 다니는 가수. 그리고 "재일교포"라는 일본에서는 핸디캡 중의 핸디캡에도 아랑곳없이 내는 음반마다 오리콘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가수. 바로 그녀, 소닌 혹은 성선임에 대해서 여기서 잠시 말할까 한다. 내가 그녀를, 그것도 '칼럼'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건방진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많은 분들이 그녀에 대해 알았으면하기에, 이렇게 용기를 내서 변변치 못한 글을 올린다. 만약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성선임이라는 본명을 가진 가수 소닌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전보다 더 아시게 되신다면 이 글의 목적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1983년 3월 10일 일본 코지현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선임'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그녀는 재일교포 3세였고, 그래서 그녀는 조선인 학교에 재학했다. 학교 재학 중에 당시 일본에서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SPEED의 콘서트를 보게 된 선임은 매우 큰 감명을 받아 자기도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하여 오디션을 응모하나 탈락한다. 하지만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하모니 프로모션이라는 연예 기획사 대표 와다 카오루 사장에게 눈에 띄었고, 그는 오디션이 끝나고 얼마 뒤에 선임에게 연락을 취해서 그녀를 가수로 키울 뜻이 있음을 알렸고, 이로서 성선임은 소닌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와다 카오루는 소닌외에 당대 최고의 여성아이돌 그룹, 모닝구 무스메의 간판멤버였던 고토 마키의 남동생으로 모닝구 무스메 콘서트를 보러와 와다의 눈에 띄인 고토 유우키와, 켄이라는 소년을 합쳐서 팀을 결성시킨다. 그리고 이 팀은 'EE JUNP'로 이름이 정해졌고, 90년대를 풍미했던 록그룹 샤란큐의 보컬리스트이자 모닝구 무스메 등의 프로듀서로 이름이 높던 츤쿠가 프로듀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데뷔를 향한 큰 틀을 짠 그들은 미국 뉴욕에서 보컬과 댄스의 트레이닝을 받는 등 데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트레이닝과 수련의 연속 속에서 TV쇼의 고정 출현자로 나가게 되는 등 데뷔전이지만 좋은 기미가 보이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켄이 돌연 "축구를 하고 싶다"라는 이유로 탈퇴를 한다. 켄의 탈퇴로 이이점프는 졸지에 2인조 팀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남겨진 두 사람은 데뷔를 향한 노력을 지속하여 결국 2000년 10월 18일 "Love is Energy"를 발매하게 됨으로서 정식으로 가수 데뷔를 이룬다. 그들의 데뷔 싱글은 오리콘 최고순위 18위, 등장횟수는 5회였다. 신인으로서는 좋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24일에 두번째 싱글, "HELLO!新しい私"를 발매하여 오리콘 17위에 오른다. 전작이 소닌이 곡 전반을 주도하는 형태였다면 이 싱글부터는 랩과 보컬로 두 사람의 구분을 지었다는 점이 특이점이고, 이는 이이점프의 향후 배치로 이어진다. 하지만 역시 첫 싱글과 이 싱글은 둘다 이이점프를 알리는데 치중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진정한 이이점프의 색깔이 드러난 것은 세번째 싱글인 "おっととっと夏だぜ!"부터 였다.
세번째 싱글은 이이점프 최대의 히트 싱글로서 오리콘 5위에 오른다. 이 싱글이 그렇게 힘을 받았던 것은 그들만의 특이점이 없던 전작들과 달리 여러가지 개성이 있었던 점과 인기 음악 버라이어티쇼인 의 엔딩테마송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여러가지 개성이란 우선 곡이 상당히 특이하게 뮤지컬적인 요소를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뮤지컬적 요소에 한곡속에 여러 변화를 주어 곡의 임펙트를 높였다. 그리고 비주얼적으로 소닌이 이때부터 백덤브링을(과거 우리나라 소방차가 했던 형태의 덤브링) 시작하는데 당연하게도 이것은 라이브에서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때 이렇게 세번째 싱글로 오리콘 5위까지 오른 팀이면 다음 싱글은 당연히 더 오를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네번째 싱글인 "イキナリズム!"은 최고순위 14위에 그친다. 상당히 놀라운 일인데, 사실 이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 싱글이 발매되기 몇일전인 2001년 8월 12일 밤에 그 다음날에 있을 이벤트를 위해 도쿄 근처 호텔에서 투숙하고 있던 이이점프의 멤버 고토 유우키는 출신지에서 친구들과 놀기 위해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던 중, 현장 매니저에게 발각되어 실강이를 벌이다가 "그만두겠다!"라며 도주했다.(일웹에 의하면 그는 택시를 타고 닛코라는 곳에 가서 온천을 즐겼다고 한다.) 네번째 싱글의 발매일은 2001년 8월 29일. 결국 고토 유우키 없이 소닌은 혼자서 이이점프로 싱글을 발매하고, 활동해야 했으며 이 사건은 결국 이이점프라는 팀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안긴다.
이이점프라는 팀은 시작부터 고토 유우키의 인기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차지하였다. 비록 노래는 전부 소닌이 하였고 고토 유우키는 랩만을 담당하였지만 '고마키의(모닝구 무스메의 고토 마키의 애칭) 동생'이라는 프리미엄으로 시작부터 주목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외모마저 누나를 빼닮아 미소년으로서도 인기가 높았기에 이이점프는 그의 인기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소닌 역시 이 당시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고 하며, 그런 걱정은 싱글 순위로 사실상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고토 유우키의 이탈로 단순히 이때만 이이점프의 인기가 꺽어진것이 아니라, 이 사건으로 인해 고토 유우키는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타격을 받게 되었고 이것은 지속적으로 이이점프에 악영향으로 남는다. 아울러 네번째 싱글은 전의 어떤 곡보다 유우키의 비중이 높은 곡으로 랩만을 담당했던 전작들과 달리 노래에도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타격으로 작용했다
결국 유우키는 돌아왔지만 자숙의 의미로 3개월간 휴업이 결정되었고, 2001년 11월 28일 'EE JUMP featuring ソニン'이라는 가수명으로 "WINTER~寒い季節の物語~"가 발매되었다. 이곡은 완전히 소닌 혼자서 부른 싱글로서 이전까지의 이이점프 곡과는 전혀 다른 곡으로, 주위의 걱정속에서 오리콘 10위에 오르는 대건투를 이룬다. 이때 소닌은 솔로로서 사실상 첫발을 내밀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솔로로서도 어느 정도 소닌이 가능성을 보이자 사무소에서는 소닌에게 솔로로 갈 것인지, 유우키와 함께 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권한을 부여한다. 이에 소닌은 유우키와 결성이후 처음으로 허심탄해한 대화를 나눈 끝에 둘이서 할 것을 결정하고, 심기일전한 두 사람으로의 EE JUMP의 복귀 싱글로 2002년 3월 6일에 "靑春のSUNRISE"가 발매된다. 오리콘 순위는 12위였다. 곡의 분위기는 정말 그런 큰 사건을 지나간 팀답지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밝다. 아울러 이이점프적인 느낌을 잘 살리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이이점프 곡들 중에 제일 귀에 잘들어오는 멜로디를 가진 곡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다시 두명으로서의 팀이 돌아가고 오리콘에도 복귀작으로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자 일본의 이이점프팬들은 이제 이이점프는 다시 시작했다면서 기뻐하였다. 하지만 소닌과 팬들의 바램에도 아랑곳없이 2002년 4월 12.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2002년 4월 12일, 일본의 유명잡지 "플라이데이"에는 고토 유우키의 성인 카바레 클럽 출입이 보도되었고, 이것은 곧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그날로 하모니 프로모션에서는 고토 유우키의 이이점프 탈퇴를 결정한다. 아울러 5월 9일에 발매되기로 확정되어서(자켓까지도 이미 완비되어 있던) 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첫번째 앨범도 발매 중지(사실상 취소) 결정이 나게 된다. 소닌은 흥분하면 코피가 나는 독특한 체질적인 특성이 있는데, 이때 그녀는 무려 티슈 한상자를 전부 소비할 정도로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소닌은 졸지에 은퇴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정말 본의아니게 은퇴의 기로로 내몰려진 소닌이지만, 사장이자 매니져였던 와다 카오루는 그녀를 은퇴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에게 솔로로서 다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했었는데, 사실상 앨범마저 취소된 상황에서 그녀를 솔로로 데뷔 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고, 와다는 전례가 없는 기획을 준비하여야만 했다. 결국 그 기획으로서 그 유명한 <うたばん>에서의 570km 마라톤이 벌어진다. 소닌은 570km라는 멀고 험한 길을 뛰고, 또 뛰어 기어코 코지현부터 조부모가 계시는 거창까지 완주해 내었다. 그리고 이 기획은 상당한 반응을 이끌어내었고, 그런 여러가지 효과가 작용해서 그녀의 첫 싱글 "カレ-ライスの女"는 오리콘 8위에 오른다.
이때부터는 소닌은 그래도 전보다는 순탄한 길을 가는 듯했다. 싱글도 내는데로 오리콘 10위안에 들었고, 숙원이었던 앨범도 2003년 5월 14일 발매하여 오리콘 5위에 오른다. 그러나 또다시 그녀의 앞길에 큰 장애가 발생하는데, 레코드사와의 재계약 무산 사건이 그것이다. 2003년에서 2004년을 넘어갈 무렵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으로 소닌은 또 다시 은퇴기로에 서게 되지만, 노래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와 그런 그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와다 카오루 사장의 노력으로 새로운 싱글이 인디즈로서 소속사인 하모니에서 발매하게 된다. 같은 소속사 가수인 요리코의 곡을 커버한 다섯번째 싱글 "ほんとはね。"는 오리콘 12위에 올라 소닌이 솔로로 전향한 이후 처음으로 10위밖으로 밀린 싱글이 되지만 인디즈로서, 그것도 여성으로서는 기록적인 성적이었다. 그리고 2004년 9월 15일에 발매한 6th "ジグソ-パズル"가 오리콘 9위에 올랐고, 2005년 1월 13일 7th 싱글 "あすなろ銀河"를 발매하였다. 이 싱글은 요새 주가를 높이고 있는 밴드"スキマスイッチ"가 작사 작곡을 담당하였다.
소닌의 대략적인 일대기는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소닌이 아닌 성선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시작하기 전에 여기서 논하는 재일교포 사회와 그녀의 국적에 대한이야기는 100%확실한 것이 아님을 알린다.
성선임은 재일교포 3세다. 그녀는 원래 조총련, 즉 북한국적으로서 어릴적 조총련계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연예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조총련계의 실정상 그녀는 세가지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가수의 꿈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일본인으로 귀화를 하던지, 그것도 싫다면 민단, 즉 남한 국적을 취득하여 가수가 되던지. 성선임은 세번째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남한 국적의 교포 3세 성선임은 소닌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의 길에 들어선다.
재일교포가 귀화를 하지 않고 자기의 출신을 그대로 보이면서 연예인으로 된 경우는 일본에서 거의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그만큼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천시받기 때문이다. 이지매를 당하는 일본애들은 만약 근처에 조선인 학교가 있을 경우 "저런 냄새내는 조센징의 학교나 가라"며 괴롭힘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일본에서 재일교포라는 존재는 천시받는다. 만약 귀화하지 않는다면 취직에서도, 승진에서도 차별받는다. 법적으로도 재일교포는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일본인들이 가지는 권리 중 상당수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재일교포다.
겨우 그뿐이라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재일교포 사회 내부의 문제도 일본인들의 차별 못지 않게 심각하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북한계의 조총련과 남한계의 민단과의 갈등은 수십년간 양측이 말도 안하고 지낼 정도로 극심했다. 조총련계의 남성과 민단계의 여성이 사랑에 빠지면 그야말로 일본에서 벌어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는 게 불과 10년전이다.
2004년 9월 9일의 일본의 유명 토크쇼인 <우타방>에 선임이 한국에 와 영화 JSA의 촬영장에 가 판문점이 재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왔다. 일본인들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많은 한국인들도 왜 선임이 우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선임은 그곳에서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그녀는 재일교포 3세이기 때문에. 태어나서 지금껏 조총련계로서 또 민단으로서 그 사이에서의 갈등과 반목을 숱하게 보아왔기에.. 그렇기 때문에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비록 재현이지만 가보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른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어서 분단되어 있다지만 우리는 북한사람과 맞딱드릴일이 없다. 하지만 재일교포들은 그들 사이에서 조총련과 민단으로 언제나 그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선임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분단의 아픔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고, 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임은 눈물을 흘린 것이다. 선임은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보다 더 한국인이다.
하지만 일본대중문화에 관심이 있지 않은 이상 한국인들 중 선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아니 선임 뿐만이 아니다. 그토록 숱하게 일본에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나 비하가 이어졌지만 그런 내용이 우리나라 언론에 소개되는 것은 가뭄에 콩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그들을 일본인 취급을 해버리고 관심이 없다. 대표적인 예가 얼마전 일본에서 과거 북한으로 납치된 사람들의 생환문제가 나왔을 때, 사실 그동안 북한 정권은 그런 사실을 부인하거나 언급을 회피했으나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접견하면서 처음으로 북한측에서 그 사실을 시인하자 일본내부에서는 반 북한의 정서가 극렬해졌다. 그리고 재일교포들이 거리에서 일본 극우 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것에 대해 한 조치는 아무것도 없다. 이에 분노한 재일교포들이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우리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대한민국민으로도, 일본인으로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런 그들의 사정에 무지한채 재일교포들이 귀화를 선택하면, 그 사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매국노로 매도하기 일수다. 그들은 일본의 한가운데 있는 민족의 섬이다.
그런 와중에서 선임은 소닌으로 노래를 발표해서 오리콘 10위안에 진입시켰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시는가. 한국에 거주하는 우리들은 잘 모른다. 일본에서 오리콘이라는 차트가 가진 위력, 그리고 그 안에 그것도 20위나 더 나아가 10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한주에 나오는 싱글만 최소 수십에서 수백개이다. 그런 경합속에서 고정적으로 10위 안팍에 오른다는 것, 절대로 쉬운일이 아니다. 그것도 어느때보다 재일교포에 대한 인식이 안좋은 시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특히 언론에서 그녀에 대해 관심이 있는가.
지금 검색창에다가 "소닌"이라고 입력해보라. 카페 게시글 등 말고 미디어에서, 즉 뉴스에서 소닌에 관련된 것이 몇개가 있을지. 아마 1개일 것이다. 그것도 이름만 등장한 그녀와는 별 상관없는 2004년 8월 기사로. 그것이 우리나라 언론에서 가지는 선임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나라 가수가 잠깐 일본에 갈때도 "열도 정복"이라고 난리를 치는 신문들이 오리콘 10위권에 언제나 머무르는 재일교포 가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다행히 아래에 언급할 K-1때문에 지금은 어느때보다 그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물론, 나도 대한민국의 가수가 일본에서 인기 끄는거 대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고,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임은 그보다 훨씬 힘든 길을 걸어오고 있다. 대한민국 가수가 일본에서 인기 얻는 것보다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인기 얻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가수는 어릴적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땅에서 나오는 물과 밥을 먹고 자란 사람이고, 재일교포는 국적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나오는 물과 밥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일본인으로서 대한민국 사람은 완전한 외국인이지만 재일교포는 그렇지도 못하다. 완전한 외국인이면 뒤에 그 국가가 버티고 있기에 그 사람이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했을 경우 그 국가가 그를 구해줄 수 있기에 상대국에서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재일교포들은 일단 우리나라에서 그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에게 닥치는 불이익과 차별을 고스란히 짊어저야 한다. 그런 와중에서 차별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서 인기 가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선임은 그것을 해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들은 어디에서도 진보던 보수던 그녀에 대해 관심이 없다.
2004년초 레코드사였던 토이즈 팩토리와의 계약이 무산되었을 때, 사실 이건 재일교포라서 차별받은 것은 아니다. 토이즈로서는 이이점프의 해체로 인한 앨범 발매 무산때부터 불어나는 적자를 버리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소닌의 판매량 부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굳이 재일교폭 아니더라도 이미 명분은 많던 상황이었다. 만약 재일교포였기에 계약하지 않은거라면 시작부터 재일교포임을 밝혔던 소닌은 데뷔 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뜻 보아서는 그런 재일교포로서의 차별 의혹이 생길만 했고, 그런 의혹들이 인터넷상으로 종종 거론되었다. 상당히 기사거리로 쓸만한 내용이 아니었는가. 하지만 우리나라 그 어떤 언론에서도 이런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재일교포들에 대해서 우리나라 언론들은 매우 무관심 하다. 만약 미국에서 재미교포 3세가 빌보드 10위에, 아니 30위만 들었다고 해도 우리나라 신문에는 실렸을 것이다. 인터뷰나 그런 것도 꽤 많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재일교포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 선임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4,5번 정도다. 그중에 방송이 2번인데 KBS위성에서 1번 SBS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1번. 두번다 광복절 특집이었다. 그나마 광복절이어야 재일교포에 대해 눈꼽만큼이나마 관심을 가진다. 언론이 그렇게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면, 팬들이 그들에게 소닌을 알려야 한다.
물론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녀의 시디를 사달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주시면 좋지만 일본시디 가격이 우리나라 사람이 선뜻 살 수 있는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대신 돈이 안드는 일을 하면 된다. 이를테면 검색창에 "소닌"이라고 매일 쳐주시는 것. 제일 쉽게 그녀를 도와주는 방법이다. 언론매체에 소닌에 대해 보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좋다. 아니면 그녀의 소속사앞으로 팬레터를 보낸다던지. 선임은 한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한글로 보내도 상관없다. 그리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소닌'이라는 가수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그녀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도 좋다. 아니, 사실 난 다른 것보다 여러분들만이라도 소닌이라는 가수, 그리고 선임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준다면 좋겠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200% 달성되는 셈이니까...
이번에 K-1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최홍만선수의 데뷔무대로 많은 관심을 가진 이 대회에서 우리는 우승한 최홍만 선수와 더불어 그의 승리에 눈물 흘리던 한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면을 보신 분들은 저게 누군가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소닌, 성선임이다. 그녀의 홈페이지에 특별한 일정이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K-1을 관람하러 온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최홍만선수의 승리를 웃으며 기뻐할때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재일교포로서 차별받던 한이 풀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선임은 그런 한은 다 풀어버릴 만큼 일본에서 재일교포의 명찰을 단 연예인으로서는 놀라운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그냥 기뻤던 것이다. 한국인의 승리가. 단지 그것이 기뻤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우리들보다도 더 한국인이니까. 그런 그녀가 언젠가 그토록 염원하듯이 한국에서 CD를 발매하고, 콘서트를 할 날이 오기를 난 진심으로 바라고 바란다.
끝으로 선임뿐만 아니라 모든 재일교포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이글을 몇분이 읽게 되실지 모르겠지만.. 부탁드린다. 제발 "재일", "재일"이렇게 부르지 말라고, 부르려면 재일교포라고 제대로 불러라. "재일"이라고 그들을 말하는 것은 말한 본인들은 그런 의도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 뉘앙스가 영락없이 재일교포들을 깔보는 것이다. 절대로 그러지 마시길 바란다. 그들도 당신들과 같은 한국인이다.
http://www.harmonypromotion.co.jp/sonim.html
그녀에 대해 더 아시고 싶으신 분들, 팬레터를 보내기 위한 소속사 주소를 알고 싶으신 분들, 그리고 메일을 보내고 싶으신 분들은 이곳 그녀의 페이지로 가보시길 바란다.
저의 꿈은 세계적인 인테리어건축가가 되는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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