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관계라기 보단 개인적인 잡설입니다.
더불어 쓸데없는 사족이 덕지 덕지 붙은 긴 글이니 양해바랍니다.
고대 국가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특히 농업국가 백성들이 국가의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기근으로 죽을 지경이 되거나 침략으로 터전을 상실하지 않는 이상 토지에 얽매인 농민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제한된 공간에서 삶을 영휘하다 마감하게 되고
그들이 삶을 살며 체감하는 사회는 가족, 마을 공동체, 공동체의 지도자 호족,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전부입니다.
보통은 가족단위, 공동체 단위로 충분한 삶을 살며 그 지역사회를 일생의 전부로 인식하는 보통의 농민에게
외부에서 온 관료의 존재, 국가라는 존재, 왕이란 대상은 상당히 추상적이며 쉽게 체감이 안되는 대상이기에
직관적으로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통치에 순응하게 하는 요인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동서양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 지배 계급인 영주, 왕들과 피지배 계급인 백성의 관계란
보통의 경우 무력에 의한 제압과 통치 이들이 또 다른 불규칙한 폭력과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는 현실적 신뢰와 (대표적으로 영주 봉건제가 그러합니다) 댓가인 충성과 세금이란 계약관계로 이뤄지죠.
한편 아시아권이나 특히 중국 한국과 같은 지역에서는 이러한 봉건적 국가를 넘은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보다 큰 규모의 국가를 형성해 가며
당장의 보호관계와 폭력의 위협과는 무관하지만 자신들이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를 통치할 특별한 권한을 받은
호족이나 촌장을 넘는 존재 즉 왕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는 필요성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매개체가 바로 종교의 역할입니다.
철기시대 이후 등장한 농업국가에서의 종교의 역할은 복합적인 필요성에서 모든 문명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농업국가에서 농민 백성이 생산으로 하고 지배계급이 그 잉여생산물을 약취하는 구조에서
이런 계급화된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폭력에만 의존함이 아닌
보다 긍정적인 성취동기를 자극하여 자발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체제의 지속력을 확보하는 필수적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각 개인의 감정적인 부분을 자극해 직관적인 방식으로 지배계급의 통치에 순응하고 현재의 노동에 충실하는 삶이
곧 선함이라 가르치며. 고통스런 현세가 아닌 내세의 행복을 바라며 순응하며 살자라는 일종의 생활 규제를 통해
사회구성원의 내부적 통제를 이끌어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불어 외부적으로 그 종교를 통해서 초월적인 존재로 부터 신성함을 부여 받고 통치할 권한을 가진 인간
즉 왕권의 정당성을 백성에게 인식하는 도구로 이용됩니다.
왕이란 존재, 마을이 아닌 국가란 존재는 추상적인 것이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에 기반한, (신, 태양, 하늘, 신묘한 동물 등) 왕권의 존재는 보다 쉽게 직관적으로 인식이 가능한 그런 존재가 됩니다.
농민 백성의 입장에서 너희가 복종하는 왕의 존재 이유를 정치적 목적, 사회적 존재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렵지만
너희가 복종하는 왕의 존재가 바로 고개를 들어 보면 바로 관찰이 가능한 하늘, 태양의 아들이자 너희가 믿는 신의 대변자이기 때문이다
라는 설명은 직관적이고 감정적으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법이고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왕과 사제의 권능을 동일시 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초기 중앙집권 국가들이나
중국 은나라와 조선의 단군과 같은 존재들이 그러하죠.
마을 촌장이나 호족들은 당장의 외부의 폭력을 집단적으로 방어하는 구심점이니
그 존재의 가치와 충성의 이유가 체감이 되지만 왕권이니 국가라는 존재는 체감이 안되는 것이기에
대상의 존재 의미를 초월적인 형이상학을 빌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농사를 짓지 하늘을 보라 저 위에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의 아들이 지금의 왕이시다
또는 하늘을 주관하는 초월자의 아들이 왕이되셨고 지금의 왕은 그분의 자손들이다 등등
중국의 삼황오제 신화나 주나라 이후 왕을 천자라 중국의 왕들
단군신화 삼국의 건국신화들이 모두 하늘의 아들을 지칭하고 신묘한 탄생을 이야기로 하는 것이
이런 일반 백성들에게 왕의 존재와 당위성을 쉽게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초기 성읍국가 단계에서 발생한 왕에 대한 이런 직관적인 이해의 범주는 국가의 크기가 보다 확장이 되고
국가와 국가간의 통합이 진행 되며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각 국가마다 신묘한 탄생의 이유를 가진 신적인 존재인 왕이 있고
각 지역마다 믿는 신앙의 대상이 다른 상황에서 이들 모두를 통합한
거대 국가의 출현은 분열과 투쟁의 빌미를 내부적으로 안은 불안정한 구조입니다.
이러한 체제를 통합하는 과정은 두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각지역의 모든 신을 인정해 다신교 체제로 가거나
이들을 부정하고 하나의 일신교를 포교하는거죠
(일신교는 좀더 후대에 개발 된 종교이기에 초기문명 대부분은 다신교 체제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 유럽과 중동의 다신교 등은
각 지역 마다 섬기는 신앙과 신의 존재를 통합한 흔적입니다.
간단히 모두가 신이라 이거죠. 단지 그중에 보다 중요한 신이 있을 뿐(제우스, 태양신 라, 옥황상제 등등)
각자의 분야의 신을 모두 인정하고 이들 모두를 통합한 다신교체제가 그러합니다.
보통 도시국가 봉건국가 체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이런 다신교 체제 국가들이 일신교 체제로 흡수가 되면
그러한 신들은 흔히 말하는 성인들, 선지자들로 대체 되며 이론화 됩니다.
중국의 경우 각 지역의 민간신앙을 존중하며 지방분권을 강조한 도교가 그러합니다
한반도의 경우 졸본, 위례, 사로국 등의 소구묘 성읍국가에서 출발한 국가가
주변의 작은 국가들을 흡수 통합하면서 각자 중첩 된 지역신앙에 근거한 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고구려 백제의 5부 체제나 신라의 6부체제 화백회의 등이죠
이러한 수평적 통합은 초창기 갈등을 해소하지만
앞서 서술한 직관적으로 국가를 인식하는 백성들을 이해시키는데도 한계에 이르고
지배층 역시 분열로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는게 자명하죠
이때 등장한 것이 서구에서 일신교 운동이 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비슷한 역할을 한 것이 유교와 불교라는 존재입니다.
특히 유교의 경우 중국에서 국가 간 통합을 이루며
국가와 왕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인식시키는 역할로서의 도입한 바가 있습니다.
주나라 시절 종법제도와 (천자인 주나라 왕실 혈통의 존중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큰집 작은집 관계의 질서관계)
예법을 보다 심화시키며 초기 유교가 탄생하였고.
전국시대를 거치며 정치 이념화 되며 심화 된 유교는
한나라와 같은 거대한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과 함께 법가라는 폭력에 의존한 통치이념을 대체하여 채용됩니다.
유교의 효경을 이론화 시키며 만들어진 충, 효의 개념이 그러합니다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유교적 충성은 서구의 로열리티와 전혀 다른
통치 이데올로기의 한 종류로써의 충성을 의미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곧 낳아준 부모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의 기본적 염치이듯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체험의 영역을 사회와 국가 차원으로 확장해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를 하듯 마을 공동체에서는 스승과 어른을 공경해야 하며
부모와 스승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듯 왕을 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충성이라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펑등한게 아닌 가족 단위 부터 수직화 시켜 서열화 하였으며
그 궁극적인 정점에는 그러한 모든 가족을 통제하는 황제의 존재로 연결되는
일상 생활에서 국가적 세계관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수직적 통치이념입니다.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여기라 이거죠.
유교는 상당히 이론적이고 심화된 정치이념으로
백성들이 체감할 수 없고 추상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국가라는 것의 존재를
가족이란 매개체를 동원하여 이해시킴으로써 중앙집권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런 개인의 가족관계라는 밑바탕 부터 건드린 유교의 생명력은 지금도 우리가
국가를 지칭할 때 조국이란 용어를 쓰는 것에서 쉽게 알수 있죠)
하지만 유교적 이론과 예법의 한계는 그것이 상당히 오랜기간 배움을 통해서 학습되야 하며
윤리와 도덕에 기반한 이성적인 세계관은
종교가 보통 가지는 맹목적 믿음과 그에 따른 안정감,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종교의 역할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진 인간의 본성에 기반하고 죽음이란 미지의 영역을 해설해 줌으로써
삶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상쇄하며 그 무의식 영역까지 건드리는 감성적 요소를 기본으로 하는데
유교의 경우 그런 죽음에 대한 해석을 굉장히 이성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혼백이 나와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내려가 흩어지게 되는데 이 시간이 보통 5대를 이어진다
때문에 아직 혼백이 흩어지지 않은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영웅, 왕의 경우 혼백이 흩어지지 않으니
영원히 제사를 지낸다. 즉. 한 인간이 죽으면 보통 5대를 지나면 기억에서 잊혀짐으로 살아남은 인간이 자신을 기억하는 만큼 인간은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중심이 아니라 내가 착한일 하며 나를 기억해 주는 이들이 있는 현실이 중요하다)
이런 종교적 역할이 부족한 관계로 백성들은 도교적 믿음에 더 쉽게 끌린 황건적의 사례처럼
이런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 요소의 부재를 다른 종교를 통해 해소하고 위안을 얻고자 하게 됩니다.
따라서 한왕조의 멸망과 함께 민중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에 이미 한계를 보인 유교가 후퇴를 하고
한나라 초기 인도에서 도입 된 불교의 존재가 이러한 유교의 종교적 공백을 매꾸며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불교는 참으로 특이한 종교입니다.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인 관계로 일신교처럼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인도 신앙의 영향으로 내세관 윤회관을 통해 민중들에게 심정적인 안정을 줄 형이상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고
불교가 말하는 절대적 신의 존재가 없다는 것의 다른 의미는 그 신의 역할을 상징화하여
그 대상을 왕으로 대체 하는게 가능한 열린 종교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그 자체가 풍부한 형이상학 세계와 철학을 가진 심화된 고등 종교이고
화엄사상처럼 고도의 상징화를 통해 왕과 부처를 동일시 하는 것도 가능하며
미륵신앙 처럼 현세 구원의 신비주의적 요소도 가진 종교입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유교가 말하는 제사의식이니 가족관계니 하는 것은
그나마 먹고 살만 할 때나 가능하지 사회 혼란기가 도래하면
자기가 살던 터전 조차 뺏기며 유랑하는 마당에 이런 공동체에 기반한 유교와 같은 통치이념은
말 그대로 공허한 배부른 소리 밖에 안됩니다.
반면 불교의 경우 보다 직접적으로 개인의 심성에 기반을 하여 어디서든 적용되는 보편성이 있죠
더불어 미륵신앙, 개인의 해탈, 죽음에 대한 공포의 갈증해소의 부분은 혼란기에 더 적합한 종교죠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 이런 불교는 크게 유행하였고
위진 남북조 시절 양무제처럼 스스로 보살의 현신이라 자처한 황제가 등장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다시 한반도로 넘어와 이런 불교의 영향 부분을 살펴 보면
과거 지역 단위 신앙을 통합하며
초기 중앙집권화의 불안정한 구도를 타계할 새로운 사상을 찾던
삼국의 통치구조에서 불교는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불교의 도입으로 보편 종교를 통한 하나의 신앙으로 통합은 물론
부처의 현신인 왕이란 관념을 통해 일반 민중 역시 부처왕이란 개념으로
왕의 존재와 국가를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며 국가관을 확립하게 합니다.
대표적으로 백제의 경우 왕의 존재는 미륵의 현신임을 자처하였고
신라의 경우 아예 지금의 왕은 곧 부처의 혈통임을 내세우며
부처의 혈통인 성골이란 계급관계가 확립이 됩니다
특히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설화에서 보듯
초창기 토속종교와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며
불교를 국가통치 이념으로 가장 잘 흡수한 사례입니다.
부처의 가문인 성골이 지배하는 신라는
그 응집 된 국가의 국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주도적인 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삼국의 통일을 달성 하게 되죠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부처의 가문이자 부처의 현신인 성골 가문의 왕계 혈통은
선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단절 되어
김춘추계로 대표되는 보통의 지배귀족인 진골가문이 왕권을 이어 받았고
신라의 왕권은 부처의 현신과 다른 전혀 다른 실질적인 권력에 의해
통치가 되는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신라 진골가문 중 김춘추계가 가지는 왕권의 정통성은
그들이 비록 부처의 자손인 성골이 아니지만
김춘추와 김법민 부자가 이룩한 업적이 가져온 위엄을 토대로 합니다
신리 김춘추계 진골가문은 수백년간 지속된 삼한의 전쟁을 종식 시키고
삼한일통을 이룩한 업적이 있는 가문이죠
한나라의 유방이 그러했듯 유교적 이념의 도입만으로
외세의 침략과 전쟁의 위협을 제거한 왕통이란 상징성이
충분한 왕의 존재의미와 그 가치를 백성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가능하지만
김춘추계 마지막 왕인 혜공왕의 죽음으로 그러한 김춘추계열 혈통마저
단절이 되는 신라 하대에 이르게 되면
사실상 백성들에게 다시 왕의 존재는 인식 가능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게 됩니다.
신라 하대 이르면 일반 백성들은 왕이 아닌 직접적 통치를 하는
마을 단위의 촌장을 더 따르게 되고
중앙의 혼란으로 지방에 위협적인 도적떼가 창궐하면서
현실적인 재산을 보호하는 사실상의 봉건 영주와 같은
호족들이 급성장 하게 되는 것이죠.
한편 신라 하대 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풍수지리 도참 사상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풍수지리란 흔히들 농업국가에서 농사에 적합하고 식생에 유리한 지역을 길지로 본는 실용적 의미를 내포한다 말 하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가 삶과 무관했던 일반 농민백성의 입장에서는 어디가 길지고 어디가 흉한지, 풍수고 나발이고 사실 관계가 없죠
그냥 지금 살고 있는 땅이 거친 땅이던 비옥한 땅이 던 그저 농사 짓는 땅이고 삶은 대게 마을안에서 마감하는 생애 주기를 생각하면 모두 무관합니다
개인적 생각에는 풍수설의 유행이란 농사에 적합 한 땅을 고르는 용도라기 보단
급성장한 지방의 호족지배계층이 자신들의 성장과 지배의 당위성을 농민들에게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이념적 용도의 성격으로 더욱 유포되었다고 봅니다
영서 지방에서 성장한 궁예가 철원이 삼한을 아우를 길지니 도읍이 된다느니
송악의 지형이 만세왕통의 땅이라느니
전주가 부흥의 땅이라느니 하는 도참에 근거한 신라말 풍수지리설은
실상 지방의 각 호족들이 기존의 전통적 수도이자 중심인
경주지방이 아닌 자신들의 근거지이자 터전이 중요한 중심지이자 곧 삼한통일의 숙명을 타고난 지역이고
이는 곧 이들 지역의 통치자인 자신이 왕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으로
지방호족들이 득세를 하며 자신이 통치하는 각 지방을 중심지역으로 설명하며 정치적 당위성을
백성들에게 직관적으로 인식시킨 결과물들입니다.
실제 고작 지방의 호족에 불과한 후삼국의 왕들은
백성의 입장에서 신라에서 권력 다툼을 하던 기존 신라왕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태생적인 문제점을 민중들에게 이해 시키기 위해
후삼국 시절 왕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 수있는데
고려 왕건의 사례입니다.
고려 왕건의 경우 이러한 백성 민중에게 왜? 왕이 되어야 하는지
고려의 왕이 왜 너희들의 통치자인지 필사적으로 주입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1. 성이 왕씨다. 지방 호족으로 성 자체가 없는 미천한 상인가문이지만
3대를 추존하며 조부 작제건(황제를 만든다)과 같은 인위적인 이름에서 보듯
왕씨라는 성을 사용한 가문이죠
2. 서해 용왕의 후손이다. 기존 삼국 건국신화와 같은 신화적 요소는 물론
서해를 통한 중국과 교역을 기반으로 한 송악지방의 특수성과 그 신앙을 투영한 결과물이죠
3. 고려왕이 곧 부처이고 왕건이 바로 부처왕이다.
(궁얘가 미륵임을 자칭하였던 왕건 역시 부처임을 자칭하며
불교를 통해 왕의 존재를 백성에게 알렸고 고려 초 왕건 부처상이 대량으로 만들어지죠)
4. 왕건의 기반인 송악지역은 원래 왕이 태어날 기운을 가진 지역이다.
(왕건의 탄생 설화, 풍수지리)
5. 당나라 숙종의 후예다
(서양으로 치면 영국 아더왕은 서로마 황제의 혈통이다 같은)
백성들에게 어떤 정치적 당위성과 신라 권력의 부조리를 설명해 봐야
설명할 방법도 없고 어차피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우리 마을은 고려라는 국가의 통치를 받고 있고
고려라는 국가의 왕은 성 부터가 왕씨이며 서해용왕의 후손이자 당나라 숙종의 후손이고
곧 부처의 현신이시며 고려국의 황도는 애초 천명을 받아 삼한을 통일하고 왕통을 이을 운명을 가진 땅이다.
그렇게 신라말 끊어진 백성들이 인식해야 할
국가관과 왕권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재교육 시키며 탄생한 국가가 바로 고려입니다.
오랜 분열을 종식하고 새롭게 등장한 국가를 설명하는데 국가적 이념으로
불교 + 풍수지리가 이용되었던 것으로
민중들이 인식하는 자신들 마을에서 주기적으로 세금을 걷어가는
고려의 왕이라는 인물의 존재의미는
그가 곧 부처의 현신이자 그가 사는 송악이 원래 풍수적으로 삼한의 왕을 배출한 땅이고
그런 천명을 받은 인물이니 왕이고 통치하는가 부다 하는 것 입니다
고려 현종이 거란에 개경을 함락 당하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송악을 잃고 도망치는 왕도 아닌 인간을 죽이려 들며 대접조차 안했죠.
유교적 충이란 개념이 자리잡기 이전의 고려 모습이기도 합니다.
몽골이 침입하자 강화도로 도피한 고려 조정이 민중들을 단합 시키는 방편으로
제일 먼저 행한 사업이 불교의 힘을 빌어온다는 대장경의 출판입니다.
(아주 예전에 강화도 시절 대장경 사업이 무너진 국가의 입장에서 그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마치 상해임시정부가 임시정부헌법을 만들듯 민중에게 국가가 존재함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불경을 만든거다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바로 이런 고려의 국가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이 되어 집니다.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황궁이 불에 타 전소 되고
십팔자위왕 도참설을 바탕으로 이씨가 다음 왕이 된다는 설이 횡횡하였던 고려는
사실상 3가지의 국가관의 붕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고려 건국 200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자
이자겸의 난 때 승려들이 이자겸의 편에 서서 황궁을 불태운 사건은
1. 불교적 관점에서 왕과 국가의 존재를 설명해 온 고려에서
더이상 고려의 왕은 불교가 보호하는 부처왕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2. 송악이 외침도 아닌 내분으로 불타버리면서 왕건 이전 3대에 걸쳐 신묘함을 보이고
삼한을 통일한 기운을 주었던 풍수적 관점에서 명분이 사라졌다.
3. 부처왕이자 사해를 아우르는 삼한의 주인인 고려왕은
외왕내제 체제로 여진, 왜국의 조공을 받는 황제였는데
고려왕이 거꾸로 조공을 받아 오던 여진족을 섬김으로써
통치자로써 자격을 잃었다.
200여년간 고려를 지탱해 온 국가적 구심점으로써의 고려왕의 존재 가치가
바닥으로 추락한 상황이었고 이런 가치관의 상실은 더이상 백성들이
왕의 존재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며 통치에 순응할 명분을 잃게 합니다.
실제 인종 이후 고려 중기 전국 각지에 민란이 터진 것이 그러하며
심지어 경주지방에서는 신라의 부흥을 외치며 신왕조의 개창을 주장하는
반란까지 터지게 되는 것이 대표적 사례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바로 이런 무너진 왕권과 국가관의 재건을 외치며
국정 쇄신을 요구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묘청이란 요승은 요망한 술수로 권력이나 탐하며 사기를 치다
죽임을 당한 인물에 불과했지만
그가 주장한 서경 천도 운동에 윤관의 아들을 비롯한 정지상과 같은
고려의 많은 인물들이 동조를 한 이유도 그것이 당시로써 상당히 타당한 해법이기 때문이죠
묘청 자체가 곧 불교의 승려이고
풍수지리의 이유와 고려의 건국시조인 왕건의 훈요십조가 이미 국시로 정한
삼한 제1의 길지인 서경에 도읍을 함으로써
불교적, 풍수적 관점에서 국가의 건재함을 다시금 백성들에게 인식 시키고
건원칭제를 통해 삼한의 황제 고려국의 위상을
국가적으로 재환기 시키자는 운동입니다.
일견 타당한 이러한 운동이 반대에 직면 한 것은
고려 성종 이후 점차 이식이 되며 차츰 자리를 잡아 가던
신흥 지식인 계층인 유학자들 때문인데
유학을 배운 정치집단이 내세운 명분은 명확합니다.
정치란 불확실한 예측에 정치적 판단을 거는게 아니라
명분을 따지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행하는 것이다.
유교라는 이념의 정치철학 원칙은
이성적 판단으로 정치를 하자는 경향이죠.
고려 말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사대부 형성에 영향을 주는
유교적 정치관의 주류화 경향은 이 시기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합리주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유학을 배운 김부식이
왕과 조정의 관료들이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풍수설이니 도참설이니 따위를 이유로
설득하는 광경을 보았을 때
글을 배우고 합리적 정치판단을 지향하는
유학자의 입장에서 용납이 가능한 사안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김부식 본인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건너 갔다가
금나라에 개봉이 함락되며 북송이 멸망하는 것을 목격 하였던 당사자 입니다.
고려가 중화로 인정한 송나라 조차 수도가 무참히 함락되고
송나라 황제가 포로로 끌려가던 시절
당시 국제정세에서 금국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인지
합리적판단을 하는 김부식은 당연히 반대를 하죠
이후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김부식은 이어 서경의 반란을 진압하게 됩니다.
나아가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의 국가적 방향이 유교적 정치이상에 있음을 제창한 인물입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관련하여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
사대주의와 민족주의의 투쟁이라 하기도 하고
묘청이 성공했으면 자주적 국가 위상을 지켰을 것이다
아니다 당시 금나라와 전쟁을 하면 고려는 파탄에 이르렀을 것이다 등등
분명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과 반란은 한반도의 국가관에 큰 변화를 가져 온 사건입니다.
신채호 선생이 1천년 래 제일의 대사건이라 평가한 것도 그러하지만
그걸 접더라고 단지 역사상으로만 보아도 고려 건국 200년 이후의 고려는
이전에 우리가 알던 고려의 모습이 분명 아닙니다.
고려 초기 30만 강병을 키워서 송나라도 제압한 북방의 강국 거란을 물리치고
윤관이 동북 9진을 개척하고 여진을 제압하던
대외적으로 진취적이고 응집된 국력을 과시하던 강국 고려는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됩니다.
고려 중기 이후의 고려사를 보면 분명 위축되고 중앙의 권력 투쟁에만 몰입하는 듯 보이죠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의 진압 이후 한반도의 정치, 사회의 양상이 바뀐 것은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건데 바로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국가관이 바뀐게 아닌가 합니다.
거창한 민족주의니 사대주의니하는 이념이 아니라
본 글이 앞서 장문에 걸쳐 민중들이 왕과 국가를 인식하는 방식을 이야기한 이유이기도 한데
고려 건국 200년 묘청이 난이 진입 된 고려 중기 이후
고려시대를 살아가는 고려의 민중들에게
왕씨를 왕으로 모시는 고려는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김부식이 주장한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본 정치관 외교관은
외형적으로 지극히 옳은 판단으로 보여집니다.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불교의 승려가 풍수지리 등을 내세우며 천도를 주장하고
당시 최강의 국력을 과시하던 금나라와 전쟁을 하자는 등의 주장은
지극히 허황된 주장이고 지금에 봐서도 김부식의 논리가 합리적이죠
다만 보다 민중의 입장이라는 다른 측면에서 묘청의 난을 보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앞서 이자겸의 난을 거치며 고려라는 국가에서 추락해 버린 왕의 존재와 정당성은
더이상 민중들이 국가의 통치자로 인정 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단지 여전히 진행 되는 무력에 의한 세금 징수와 부역의 요구에 따라 순응은 하겠지만
민중들은 그런 행위를 하는지에 대한 명분을 이해 할 수 없죠
마치 신라 말 김춘추계 왕통이 단절 된 이후의 신라왕실과 같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그런 고려의 상황과 민중들의 이탈이란 상황에서
고려의 왕과 국가가 건재함을 민중과 사회 전체에 재인식 시키고
국정을 쇄신하자는 운동입니다.
묘청의 난 이후 고려가 건국 초기의 진취적 힘을 잃은게
견제세력이 없어진 유학자 문신들이
가문끼리 권력을 독점하며 문신정치의 폐단을 가져와
무신 난을 촉발시키는 이유를 제공하여 고려를 쇠퇴하게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사실 민중들은 신라 말 경주에서 진골들이
왕위를 가지고 투쟁하며 서로 죽일 때도 그러했듯 고려 중앙정계에서 뭔짓을 하던
사실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고려사회에 나타난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와 장원화 경향으로
마을과 마을 단위를 모두 포괄하는 막대한 땅을 귀족들이 가지며
실질적인 마을주민들을 지배하는 이는 고려라는 국가와 왕이 아닌
이름난 귀족이나 지방의 특정 가문이 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땅을 주고 도적으로 부터 보호하는 귀족은 그나마 이해를 해도
고려라는 국가와 왕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으니 고려 중기 이후 전국 각지에서 고려에 자체에 항거 한
민중봉기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경주지역에는 심지어 신라의 부흥을 외치는 민중봉기도 발생하죠
이는 조정이 문벌귀족에서 무신정권으로 바뀌어도 지속되는 일입니다.
삼국시대 천손의 아들들이 국가의 명운을 가지고 전쟁 할 때
총력을 다해 싸우던 백성들이나
부처왕이자 서해용왕의 아들이 다그리는 고려의 백성으로 거란에 대항해 싸울 때
30만 중앙군을 만들 정도로 국가의 국력이 응집되던 시절은 이제 없게 된거죠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먹고 살 땅을 주는 가문이 곧 국가요 나라가 되었으며
유력 귀족들 또는 유력 장군들이 각자의 장원에서 백성을 키우며
사병을 만들며 유지가 되는 나라가 됩니다.
외형만 중앙집권적 국가지 실제는 유럽 봉건제와 흡사한 구조입니다
백성들은 국가와 왕의 존재를 체감 못하니
대신 실제 땅을 주고 보호를 하는 영주들에게 그저 복종하는 것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은 백성이 아닌 좀 더 고차원적인 정치를 이해하는
영주들만 국가와 왕에게 충성하는 구조입니다.
고려 중기 이후 고려는 고려 초기 처럼
고려의 백성이 왕명으로 고려를 위해 전쟁하는게 아니라
각자의 귀족 사병들이 차출되 각 가문의 충성으로 유지하는 사회입니다
묘청의 천도 건의를 두고 고심을 하다 결국 유학자의 합리적 판단에
손을 들어 주었던 인종이 죽고
그 아들 의종은 그저 방탕한 놀음에 몰입하다 무신정변으로 죽임을 당했으며
이후 고려의 왕들은 문벌귀족의 꼭두각시 => 무신들의 꼭두각시 => 몽골의 꼭두각시
=> 귄문세족의 꼭두각시 등으로
왕이란 존재는 그냥 중앙 조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형식적 존재로 명맥만 유지하게 됩니다.
고려가 200년을 더 흐른 뒤
이자겸이 찬탈을 시도 할 때는 용납이 안되었던 왕위는
동북변의 사병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성계가 유학자들과 손 잡고 보다 지방의 향약을 통해
유교식 국가관관을 민중들에게 학습시키는 사대부 계층을 흡수하고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백성들의 순응을 이끌어낼 통치체제를 제시하며 토지개혁에 성공하자
이름만 유지되면 고려라는 왕씨의 왕조는 공식적으로 종식되였을 뿐이죠
200년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 했을 때
민중들에게 이미 망했 던 고려왕조는
새로 경작할 토지를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씨 왕이 지급해 주게 되자
정몽주 같은 글을 배운 사대부들이 충신불사이군이니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이니 하며 알수 없는 논리로
자기들끼리 정치적 명분을 가지고 싸우던 말던 상관없이
백성들에게 아무런 저항없는 오히려 지지를 받으며
순조롭게 내가 사는 마을을 통치하는 이 나라가
고려가 아닌 조선이라더라 하며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