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유머도 아닌글을 여기에 올려 죄송합니다. 요즘들어 계속 박정희를 미화하는 글들이 올라오는것 같아서 이 글을 올립니다. 박정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자료는 논란의 대상이나 미확인 행적에 대한 내용은 제외하고 사실이 확인된 내용만을 편집하여 논란의 여지를 배제하였으며 판단은 여러분들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친일파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죠. 박정희는 그당시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 일본군(만주군)장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관학교 입학 나이가 좀 많은 것을 우려하여 만주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이라는 아부의 혈서를 써서 보냈고, 이 혈서는 만주의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습니다. 그 뜻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에 충성한다는 뜻.
또한 그당시 친일파의 척도인 창씨개명을 했죠. 그당시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
그리고 일본인의 하수 만주군장교가 되어서 우리의 독립군들과 싸웠지요.
그당시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국내와 중국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과 상해의 임시정부요인.....그리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생각하면 과연 그의 행동이 용서될수 있는 행동일까요? 그러면서도 이런 과거를 숨기기 위해 교사생활당시 일본인 교장과 싸워서 학교를 그만 뒀다는둥 일본군내에서 독립군의 첩보활동을 했다는 둥의 날조가 생겨나게 되었죠.
2. 기회주의자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의 황국식민화가 목표였던 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 선생이 되었으나 사범학교 입학당시 그의 나이는 어렸기 때문에 이것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이후 시골의 힘없는 선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권력욕에 의해 일본의 하수 괴로국인 만주국의 장교가 됐으며, 해방이 되자 즉각 어제까지의 적이었던 우리의 광복군에 투신하여 초라하게 귀국합니다.
참으로 특이한 것은 그의 사범학교 졸업성적은 꼴지에서 두번째인데 만주사관학교와 일본육사시절엔 최우수 성적을 내고 표창을 받았을 만큼 그의 권력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지요.
그러다 다시 우리나라 초창기 사관학교인 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고 국군장교가 되었으면서도 한편 좌익의 세력이 커지자 남로당(남한의 공산당)에 몰래 가입하여 양다리를 걸치고 이후 여순사건이 터져 군부내 좌익세력 색출작전때 체포 되었으나, 또 다시 변신, 그동안의 공산당활동을 같이 했던 그의 동지들을 배신하고 모두 성토하여 사형당하게 하고 자신만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6.25가 터지자 육군소령에 복귀하였습니다. 그 이후 장군이 되어 4.19의거에 의해 민주정부가 건국 후 처음으로 세워졌지만 5.16쿠테타를 일으켜 쓸어버리고 정권을 잡지요. 정말 대단한 변신아닙니까?
일제의 앞잡이 교사 - 일본군장교 - 독립군 - 국군과 공산당의 양다리 - 공산당 배신 - 국군 - 군사 쿠테타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변신에서 화려함을 느낌니까? 아니면 기회주의를 느낌니까?
3. 독재자
1961년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도성장의 업적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다시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6월에 치러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극도의 혼탁상을 면치 못했습니다.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부정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죠. 1969년에 들어 3선 개헌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 9월 14일 개헌·지지서명을 했던 122명의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3별관에서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3선 개헌안이 확정됨에 따라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과 대결하여 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일으켰던 선거가 됐습니다. 이때 막상막하의 선거결과로 인해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 두려움이 생겼고 결국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즉 그는 1960년대에 이룩한 고도성장을 인질로 해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집권을 합법적으로 뒷바침해주는 유신헌법이 탄생하게 되지요.
그당시 자신의 충견 김재규에 의해 죽지 않았으면 얼마나 더 독재의 정권을 연장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권력의 연장을 위해서는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또한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4. 인권탄압
그의 인권탄압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학원과 학생운동에 대한 인권 유린.(학원 사찰, 학교의 병영화, 학교의 교육 재량권 박탈)
2)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에 대한 생존권 압살과 이에 대한 저항(전태일분신사건, 카톨릭농민화와 도시산업선교회 탄압, 광주대단지'폭동'사건, 철거민투쟁)
3) 정치권과 정적에 대한 탄압(김영삼의원 초산테러, 긴대중납치, 공화당 항명파동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개입)
4) 언론 탄압(동아일보 광고 탄압,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탄압, 검열)
5) 문화 예술에 대한 탄압(사전심의제도, 판금조치, 문인간첩단 사건, )
6) 종교계 탄압
7) 유학생간첩단 사건과 외국인 성직자 추방 등 국내법의 자의적인 적용
8) 안보, 반공이란 차원에서 반국가사범의 조작
9)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침해(필화사건)
박정희시대 인권의 탄압이 탈법, 비법, 불법 뿐아니라 다양한 반국가사범에 관한 처벌규정과 연동되어 자행됨으로써 인권탄압의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특히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은 일제시기 악법의 연장으로 인권유린의 최고공격수 역할이자 반공주의에 의한 마녀사냥의 도구로 쓰여졌죠.
인권탄압은 다양한 국가기구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특히 중앙정보부는 국가테러리즘의 상징이었습니다.중앙정부부는 공포정치를 펴면서 한층 더 강화된 극우반공주의.반북한주의를 기반으로 '군사문화'를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고루 전파시킴으로써 한국 사회 전반에 반민주주의적 독소를 깊이 뿌리내리게 했고경찰, 군수사기관 등 각종 기관들이 인권유린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한국 사회는 상층의 정치구조가 바뀌어도 하부의 인권유린은 발본색원되기 어려울 정도로 인권유린의 구조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신시대의 고문은 범죄 사실을 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만들기 위해 권력자와 그 하수인의 의도대로 각본을 짜기 위한 강제도구로 작용했습니다. 여기에는 일제시기의 고문기술과 한 사회가 이룩해놓은 과학.기술까지 총동원되었으며, 국가공무원이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국가의 범죄였죠. 아울러 고문에 대한 공포를 사회에 만연시켜 "저항하는 자에게는 고문이"이라는 극도의 공포감을 확산시켰습니다. 고문은 피해당사자를 포함해 익명의 국민 개개인 또한 폭력 앞에 떨어야하는 동물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고문의 방법도 극악해 물고문, 전기고문, 수면방해, 구타, 천장에 거구로 매달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넣어 비틀기, 겨울에 옷을 발가벗기고 찬물에 집어넣기, 불이나 담배불로 지지기, 비녀꽂기, 통닭구이, 강간.윤간.기타 성고문, 물속에 머리 처박기,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기, 원산폭격, 빈대붙기, 칠성판에 묶고 구타하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정치적 사건들 경우에는 고문문제가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범죄, 그리고 이른바 공안사건의 경우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알려지더라도 인권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인권의 불평등"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5.변태같은 생활
박정희는 술과 여자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가 죽게된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으며, 10.26사태가 일어나던 날도 박정희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권력자들인 중앙정보부장, 청와대비서실장, 경호실장, 이렇게 4명이 저녁에 벌인 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는 여자 둘이 동석했는데 한 여자는 유명가수였고 다른 한 여자는 여대생으로 아르바이트 패션모델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대통령 술자리에 한번씩 왔다 간 여자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습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이며 국민의 정신적 지주여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눈이 닿지 않는 중앙정보부 부속 비밀연회장에서 사흘에 한 번 꼴로 술자리 행사를 갖고 있었으며 충격적인 것은 그 자리 「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불러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통령전용 비밀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역할이었고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통령의 채홍사로 그는 최고의 비밀관리자였습니다.
6.경제발전
경제성장 자금을 위해 1960년대 중후반에 취해진 또 하나의 조치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이었습니다. 대략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 '월남특수(特需)'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1만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월남 파병 역시 그 명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독립을 되찾고자 근 1세기에 걸쳐 투쟁해 왔던 월남인들의 고난은 차치하고서라도 미국 내에서조차 반전 운동을 일으킬 만큼 문제가 많았던 월남전에 한국군이 사실상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은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하기에는 너무나 명분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급속히 추진된 외향적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민족적 자존심의 상실과 남북 관계의 악화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이 뒤따랐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 경제성장이 초래한 더욱 커다란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계급적, 지역적 분열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이죠.
1970년 11월 어느 날 서울 청계천에서 백주 대낮에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습니다. 바로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사건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경제성장 10년의 뒤안에는 10대의 어린 나이로 하루 14시간 이상씩 열악한 근로 조건에서 일해야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받는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3분의 1도 안 되는 그런 희생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서독의 차관도입을 위해 바탕이 미천한 우리나라는 광산노동자와 어린 간호원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담보로 외화를 벌게 했으며, 중동의 살인적인 더위를 무릎쓰고 건설 현장에 투입하여 달러를 벌었던 것입니다.
"뒤에서 딸같은 여자끼고 국민의 혈세로 술먹던 대통령"과 이역만리에서, 전쟁터에서, 열악한 공장에서 오직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목숨같은 노동력을 팔던 그 노동자들..... 과연 누가 그 경제성장의 주인공일까요?
즉 오늘날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무식하게 일만 하던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서독에 눌러 앉아 사는 나의 삼촌과 이모들, 월남에서 다리하나 잃고 고엽제의 고통과 지금까지 씨름하는 형님들, 중동에서 시커먼 얼굴로 돌아온 옆집아저씨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경제성장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지 못햇고 그들의 노동은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의 주머니만 채워주는, 가난을 대물림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경제성장은 이렇듯 사회의 계급적 격차를 확대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진행된 경제개발은 지역적 소외감을 초래했고, 이는 이후 광주민중항쟁의 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지역 정치의 폐단을 남기고 있습니다.
과연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해야 옳은 거죠?
저개발국들은 항상 독재와 군사쿠테타, 그리고 비극을 반복하며 제자리 걸음을 유지하죠. 우리도 그런시대에서 지금의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했는데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이것을 박정희의 성과로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 착각의 원인은 다름아닌 저개발 국가의 여타 독재자와 비교해서 그나마 박정희가 좀 낫다는 것이며 이것이 박정희를 위대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제 3세계국가의 독재가가 대부분 자신의 친인척을 권력의 핵심에 채우고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로 인해 자신들만 잘살기 운동하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는 것이지 지금의 박정희 업적은 너무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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