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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끝나서 시간 널널해진 김에 영조가 사도세자 갈군 기록을 모아봤습니다. 정말 털어도 털어도 계속나와서 그나마 줄인게 이정도에요.
"한 문제와 무제중 누가 훌륭한가?"
"문제가 더 훌륭합니다."
"이는 나를 속이는 말이다. 너는 분명히 무제를 더욱 통쾌히 여길 것인데 어찌 문제가 더 훌륭하다 하는가?"
"문제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
"네 시에서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라는 글귀가 있어 기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 24년(1748)5월 19일 기사
??대체 뭘 어쩌라고?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왕은 세자의 생일마다 신하들 앞에 불러세워 꾸짖었습니다.
영묘께서는 나인을 시켜 세자가 가지고 노는 것을 가져오게 하여 모두들 보게 하시고, 많이 모인 자리에서 무안하게만 하셨다. 강학 따위만 하더라도 여러 신하가 많이 모여 있을 때 기어이 부르시어 문장의 뜻을 물어보시는데, 아기네가 자세히 대답하지 못할 대문이라도 굳이 물으셨다. 본디 부왕님 앞에서는 분명히 아시는 것이라도 쭈뼛쭈뼛하시는데,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대답을 하지 못하도록 물으시니, 더욱더 두렵고 겁이 나 대답하지 못하면 남이 보는 앞에서 꾸중하고 흉도 보셨다.
경모궁께서는 한 번 두 번 그런 일을 당하였더라면 감히 부왕을 원망하지 않겠지만 지극한 정으로 가르치지 않는 것을 보시고 감정이 격해지고 분하게 여기시며 두렵고 서름해져서 결국에는 천성을 잃으시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지극한 원통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한중록 中
대리하시기 전이라도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는 일이나 형조에서 하는 일, 영묘께서 직접 죄인을 심문하시는 일, 대궐에서 말하는 불길한 일에는 항상 세자더러 곁에 모시고 있으라 했다.
화평 옹주와 무오생 옹주, 지금의 정처鄭妻라는 이가 있는 방에 들어가실 적에는 신하를 만나실 때 입던 옷을 갈아입으신 후에 들어가시되, 세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어, 바깥에서 정사를 보시고 들어가실 때는 정사를 보시던 옷을 그대로 입으신 채로 오시어 동궁을 부르시어,
"밥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어 대답하시면 그 대답을 들은 뒤 귀를 그 자리에서 씻으시고, 씻으신 물을 화협 옹주가 있는 집의 창문으로 버리시고, 윗대궐이면 담 너머로 세숫물을 버리셨다.
그렇게 하실 일이 아니로되, 어떤 따님은 밖에서 입으시던 옷을 벗고 나서야 보시고 이 소중한 아드님은 말씀을 듣고는 귀를 씻으시니, 경모궁께선 화협 옹주를 대하시면
"우리 남매는 차비差備(하인)로다."
하고, 서로 웃으시었다.
-한중록 中
한 번 꾸중에 놀라시고 , 두 번 격노에 근심하시면 아무리 훌륭하고 영묘한 능력이 있는 기품이라 한들 한 가지 일도 제대로 못하시고, 정시庭試나 알성謁聖, 시사試射나 관무재觀武才 같은 호화로이 구경할 때는 도무지 부르지 않으시고, 동지섣달 사형수를 재심하는 일에나 곁에 모시고 있게 하시니, 어찌 마음이 편하시며 서럽게 여기지 않으시겼는가.
열다섯 살이 되시되, 능행에 한번 따라가지 못하시니 점점 장성해지자 교외를 구경하고 싶으시어 항상 서울에서 거동하시고, 능행하실 때 예조께서 동궁의 수행을 아뢰면 혹시 따라갈 수 있을까 조급히 마음을 졸이시다가 번번이 못 가시면, 처음에는 서운하시던 것이 점점 성화가 되시어 우실 적도 계시었다.
-한중록 中
아버지의 이유없는 차별과 갈굼이 시작되자 세자는 부왕을 점점 무서워하기 시작합니다. 세자 나이 열두 살 적에 자치통감을 외웠는데, 서원에서는 목소리가 컷으나 영조 앞에서 읽을 때면 목소리가 작아지기 일수였습니다. 영조는 이를 지적하며 말합니다. "내 앞에 있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영조 23년 9월 10일자 기록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영조는 정말, 자주 마음에도 없는 선위의 뜻을 밝혔습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기 전인 4, 5, 9, 10,14세의 나이 때도 말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항시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요구를 거두어 달라 애원하여야만 했습니다. 물론 이 양위 파동은 대리청정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약방·정원·옥당·대신·재신들이 청대하고, 영의정 이종성은 시골에서 들어와 대궐 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이 선화문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종성을 불러 입시하라고 하였는데, 이종성이 사은 숙배하지 않고 들어오자, 임금이 큰소리로 즉시 사은 숙배하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이종성이 나가서 사은 숙배하고 들어오니 임금이 또 누누이 비상한 하교를 수천 마디나 하였는데, 전일과 똑같았다. 이종성이 여러 신하들과 같이 극력 간하자, 임금이 또 육아편(蓼莪篇)을 읽었다. 그리고 《춘방일기(春坊日記)》를 가져오게 하여 승지로 하여금 세제로 책봉하였을 때 사양하였던 상소인 사세제책봉소(辭世弟冊封疏) 세 편을 읽도록 하였는데, 밤 3경에 이르렀다. 왕세자가 팔짱을 끼고 임금의 앞에 서있었는데, 임금이 손으로 휘저으며 가도록 하고 말하기를,
"너는 무엇 하러 나왔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므로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내렸던 전교를 반한(反汗)하겠다."
하고, 이어서 육아시를 읽어 끝 편에 이르자, 왕세자가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친히 동궁에게 하교하셨는데, 동궁의 효성이 지극하였습니다. 반한하겠다고 하신 명을 식언(食言)하시면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소학(小學)》의 편제(篇題)를 읽으라고 명한 다음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너의 도리는 들어가라고 한 명을 들었으면 들어가면 될 뿐이다. 무엇하러 오래 앉아 있는가?"
하니, 왕세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영조 28년 12월 14일 기사
또한 대리청정 시기 부왕은 세자에게 인자한 가르침보다 엄격한 훈육을 우선시하였고,(그렇다고 칭찬한번 안한건 아니지만)세자가 무얼 하든 질책하기 바빴습니다.
대체로 조정의 신하가 올리는 상서중에서도 나랏일에 관한 것이 있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 담긴 상서면 소조께서 스스로 처리하시지 못하여 대조께 고하시면, 그 상서가 아랫사람의 일이지 소조가 아실 일이 아니건만 격노하시기는 소조께서 신하를 조화하시지 못하여 전에 없던 상서가 났으니 소조의 탓이 되고, 상서에 대한 답서를 대조께 말씀드리면
"그만한 일을 결단치 못해 나에게 번거롭게 말하니 대리를 시킨 보람이 없다."
라며 꾸중하시고, 말씀드리지 아니하면
"그런 일을 내게 보고치 않고 네 멋대로 처리하느냐?"
하고 꾸중하셨다.
이렇게 할 일은 저렇게 하지 않았다고 꾸중이 나오시고, 저렇게 할 일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꾸중하시어, 이 일에도 격노하시고 저 일에도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하셨다. 심지어 겨울철에 옷과 밥이 없거나 가뭄이나 천재지변이 있으면 소조께서 덕이 없어 이런 일이 생겼다고 꾸중이 나왔다. 이러하시에 소조께서는 날씨가 조금 흐리거나 겨울철에 천둥이 치면 무슨 꾸중을 들을까 염려하시고 염려하시어, 사사건건 황겁하고 송구스러워 하셨으며, 병환이 점점 드시는 징조가 있었다.
-한중록 中
경오년 팔월에 내가 의소懿昭를 낳으니, 영묘의 마음인들 어찌 기쁘지 않으시리오마는 무진년에 화평 옹주께서 해산을 못하시어 상사가 나니, 그 일이 가슴 속에 맻혀 계시다 화평 옹주가 남처럼 순산하지 못하신 것이 새삼스러이 애달프셔서 옹주를 생각하는 슬픔이 손자를 보신 기쁨보다 더하신지라 산 아드님께 "네가 어느세 자식을 두었구나." 이 한 마디 않으시었다
경모궁께선 성숙하심이 어른같으시어, 마음 속으로 슬퍼하시어
"나 하나도 어려운데 아이가 나서 어떻게 하려는고"
하시니, 말씀 듣기가 심히 근심스럽고 슬펐다.
-한중록 中
동짓달 무렵 선희궁께서 병환이 있어 찾아가 뵈려고 가 계셨는데, 영묫께서 옹주 있는 곳과 가까이 온 것을 꺼리고 싫어하시어 대단히 노하시면서
"바삐 가라"
하시니, 창황히 높은 창을 넘어와 계셨다. 그날, 영묘의 명령까지도 엄하셔서
"낙선당에 있고, 청휘문 안에는 드나들지 말고, 서전書傳 태갑편太甲篇을 읽으라."
하셨다. 어머님의 병환에 뵈오려고 가셨다가 잘못하신 일이 없는데도 그런 일을 당하니, 원통하시어
"죽어 버리려 하노라. 독약을 먹으려 하노라!"
하시다 겨우 진정하시었다.
-한중록 中
오월에 영묘께서 숭문당에서 신하들을 만나 보시고 갑자기 경모궁이 계신 낙선당으로 가셨는데, 그때 경모궁께선 세수도 지저분하게 하시고 옷도 단정치 않으셨다. 그때는 금주가 엄한 때여서 술을 먹었는가 의심하시고,
"술 가져다 드린 놈을 찾아내라."
하시고 경모궁께,
"누가 술을 가져다 주었느냐?"
하셨으나 진실로 잡수신 일이 없으셨다...하도 다그쳐 물으시자 어쩔 수 없이
"먹었나이다."
하시니
"누가 주더냐?"
하여 델 데가 없어
"밧소주방 큰나인 해정이가 주옵더이다."
하시니 영묘께서 두드리면서
"네가 금주하는 이 때 술을 먹고 못되게 구느냐?"
하며 엄중히 책망하시자 보모 최 상궁이 아뢰기를
"술 잡쉈단 말은 억울하오니 술내 나는지나 맡아 보소서."
경모궁께선 상전上前에서 최 상궁을 꾸짖기를
"먹고도 아니 먹었다 아뢰었다면 자네가 감히 말할 성 싶은가? 물러가오."
하자 영묘께서 또 격노하시기를
"내 앞에서 상궁을 꾸짖으니, 어른 앞에선 견마도 꾸짖지 못하는데 그리하는가?"
하며 꾸짖으셨다.
-한중록 中
무한 스트레스가 계속되자 세자는 결국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이때쯤 세자는 홍봉한에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약을 가져다 달라고 애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세자는 자신이 지금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지 수 일이 지났건만 차도가 없습니다."
"나는 겨우 먹고 잘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
봄에 경모궁의 병환이 날로 심하셨는데 여름철의 가뭄 때문에 대조께서 근심하시어
"소조가 덕을 닦지 않은 탓이라."
하시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가 많으시니 여지없는 병환인데도 이렇듯 하시자 차마 견디지 못하고 죽기만을 원했다.
-한중록 中
이날 밤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좌참찬 홍봉한 및 양사(兩司)의 장관과 유신(儒臣)이 모두 궐 안에서 기다렸다. 초경(初更)에 임금이 최복(衰服)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崇化門) 밖에 나와 노지(露地)에 엎드려 곡을 하고 동궁(東宮)도 역시 최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었으니, 숭화문은 곧 효소전(孝昭殿)의 바깥 문이었다. 대신(大臣) 이하가 앞에 나아가 엎드려 울면서 고하기를,
"전하께서 어이하여 이러한 거조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동궁의 하령을 가지고 와서 아뢴 데에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이있으므로 얼른 지나쳐 보고는 놀라고 기쁨을 금치 못하여 장차 경 등을 불러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정신을 쏟은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동궁을 불러 묻기를, ‘옛날부터 허물을 뉘우치는 임금은 반드시 자기가 잘못한 곳을 나타나게 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윤대(輪對)의 조서와 같이 한 다음에야 백성이 모두 믿을 것인데, 지금 네가 뉘우친 것은 어떤 일이냐?’고 하였으나, 동궁이 대략만 말하고 끝내 시원하게 진달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같은 소리로 말하기를,
"동궁께서 평일에 너무 엄하고 두려운 까닭에 우러러 말씀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위차(位次)로 들어가시어 신 등을 불러 조용히 하교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재전(齋殿)에 나아가 승지에게 전위한다는 교지를 쓰라고 명하매, 승지가 붓을 던지고 죽어도 감히 못 쓰겠다고 아뢰자, 여러 신하들을 따라 들어오라고 명하고 다시 동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동궁이 나아와 부복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후회 막급하다고 일렀는데, 그 뉘우치는 내용을 말하지 않으니, 남의 이목만 가린 것에 불과하다."(중략)
동궁이 물러나와 뜰에 내려가다가 까무러쳐서 일어나지 못하니, 유척기가 급히 의관을 불러 진맥하도록 청하였다. 그런데 맥도(脈度)가 통하지 않아 약을 넘기지 못하여 청심환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한참 있다가 비로소 말을 통하였다.
-영조 33년 11월 11일 기사
이정도면 그냥 영조가 세자를 무차별적으로 갈군 겁니다. 미x사람이 사도세잔지 영조인지 의문이 들 정도.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사도세자는 사람 발걸음 소리에 놀라고 왕이 찾아온다는 소식에 잠을 못이루게 되었습니다. 유척기, 홍봉한은 이런 세자를 두둔하며 말합니다.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하시어 동궁께오서 제대로 말씀하지 못하신다.", "동궁은 보통 때도 입시하라는 말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고 쉽게 알고 있는것도 명확히 대답을 못하신다."(영조 33년 11월 11일)
따지고보면 세자는 대리청정 초 까지만 해도 총명하고 명민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멀쩡한' 아들을 영조는 제대로 돌아버리게 만들었지요. 별것도 아닌 일에 칼을 휘두르고 아랫사람들에게 성질을 자주 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긋날수록 부왕의 눈에도 더더욱 어긋나버립니다. 사도세자도 이런 바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무사하지 못할 듯하니 어찌할꼬?"
"안타깝소마는 설마 어찌하오시리까?"
"어찌 그럴꼬? 세손은 귀하게 여기시니, 나를 없애 버린들 무슨 관계 있으리."
"세손이 세자 아들인데, 부자가 화목이 같아야 하지 않겠사오리까?"
"자네는 생각지 못하네, 미워하시는 마음이 더욱더 심해져서 점점 어려우니 나는 없애 버리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면 어쩔 텐가?"
그 말씀을 하실 때는 병환 기운도 없이 처연히 그리하시니 그 말씀이 슬프고 서러워,
"그럴 리 없나이다."
하니, 또 말씀하시기를
"두고 보소. 자넨 귀하게 여기시니, 나에게 딸린 사람이로되 자네와 자식들은 예사롭고, 나만 이러하니 어디 살게 하겠는가."
-한중록 中
결국 세자의 예상이 맞아떨어졌습니다. 뭐 잘 아시겠지만..1762년 5월 임오년의 일입니다. 이때 왕이 세자를 부르자,
"세손의 휘항揮項을 가져오라."
"그 휘항은 갖으니 당신 휘항을 쓰소서."
"자네가 아무튼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고 싶어 내가 오늘 죽게 되었으니 꺼려하여 세손의 휘항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심술을 알겠네."
내가 더욱더 서러워 다시 세손의 휘항을 가져다 드리며
"그 말씀이 전혀 마음에 없는 말씀이시니 이걸 쓰소서."
"싫네. 자네가 꺼려하는 걸 써서 뭘 할꼬!"
-한중록 中
아마 세손의 휘항으로 '세손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살려달라' 는 의미로 쓰고 가려고 했겠죠. 하지만 이를 몰랐던 홍씨는 당신 것을 쓰고 가라 했었고, 아내마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상심한 세자는 될 되로 되라는 심정으로 포기하고 가버립니다.
...세자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 왕후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고,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신만·홍봉한·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躋)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이에 전문(殿門)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사서(司書) 임성(任晠)이 말하기를,
"일이 마땅히 다시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 천선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영조 38년 윤 5월 13일 기사
정성왕후의 혼이 영조에게 세자가 너 해칠거라 말했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영조가 세자를 꿇어앉히고는 자진을 명하자 세자 또한 자포자기하여 명령을 따르려 하니 신하들이 나와 이를 막았습니다. 이도저도 안되자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잡고는 "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느냐" 하며 울었고, 세손 또한 놀라서 달려와 아버지를 살려달라 빌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도 세자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습니다.(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사도세자는 뒤주에 8일 동안 갇혀있다 사망하였습니다. 뒤주를 호위하는 병사들은 세자에게 떡과 술을 앞에 놓고 '좀 줄까?' 라며 비아냥거렸다는 이야기가 남아있으나, 이런 태도에 세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뒤주에 갇힌 지 7일째 되는 날 뒤주를 흔드니 세자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세게 흔드니 안에서 "흔들지 마라. 어지럽다."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조는 무덤의 격식을 낮춰 묘墓의 형식으로 만들고는 방치해두었고(원래 세자의 무덤은 원園의 격식에 맞춥니다.)정조 때에야 원으로 격상됩니다. 사도세자는 죽은 후에도 아버지의 미움을 받은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한 아들의,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