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중학생 시절, 나는 제법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늘 말했듯, 나는 사실 영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다른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채로,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살았더랬다. 그 때 즈음, 나는 당신의 라디오를 들었다. 당신의 사고방식과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나에게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뭔가 경종이 울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아마 그 때 부터 였을 것이다. 내가 공부 이외의 내가 잘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기 시작한 것은.
당연히도 내가 먼저 선택한 것은 음악이었다. 나는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예술이라는 말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지만, 막연히 그런 쪽에 대한 동경은 있었더랬다. 그런 와중에 당신의 말은, 당신의 음악은 내게는 충분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성적은 당연히 떨어졌고, 부모님은 슬퍼 하셨다. 나는 그 와중에도 기타에만 여념이 없었고, 내 뮤지션의 꿈은 아버지의 호통과, 아버지가 내동댕이 친 기타의 잔해와 함께 바스라졌다. 당시의 내게는 그 모든 것들이 부조리하게만 느껴졌다. 이유 모를 분노 같은, 흔히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때에 나를 다시 잡아준 것 역시 당신이었다. 당신은 꿈만을 좇아 주위를 돌아볼줄 모르는 이들에게 '날것'에 가까운 질책을 가했고, 당신이 놓쳤기에 사무치게 후회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털어 놓았더랬다. 이상하게도, 당신의 말에는 언제나 설득력이 있었다. 사실은 그때도 지금도 당신의 말은 궤변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그렇다고 당신의 뜻을 부정하는건 아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의 말에 대부분 공감했다.).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런 배움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시작이었다. 오로지 재미있어서, 해보고 싶어서. 처음에는 잘 숨겼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것은, 언제나 오래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 부모님은 반대하셨고, 나는 꽤 힘들었다. 음악을 하고 싶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 재미있었으니까.
그때 나를 도운 것은, 당신이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 덕분에 제법 능구렁이처럼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을 그럴듯 하게 포장하는 방법 같은 것들을 배웠다(실제로 실생활에서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적어도 부모님이 내가 글 쓰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번의 운이 따라 주었다. 나는 처음 책이라는 것을 출간하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적잖은 수익도 올렸다.
나는 곧바로 당신에게 자랑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이제 괄호는 그만 쓰고 싶지만, 어쨌건, 나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어떠한 글을 쓴다는 것을 알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내 책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발가벗겨지는 것 같아서.).
그저 막연히 당신이 읽겠지. 하고 말았던 글이, 얼마 후에 당신의 방송에서 소개 되었다. 당신은 내가 보낸 편지를 줄줄 읽으면서, 낄낄거리며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말하듯 축하한다고, 하지만 거만해 지지 말라고. 그래도 이런 식의 자기 자랑은 참 좋다고. 뿌듯하다고 앞으로도 노력해 달라고. 언젠가 유명해지면 책 한권 보내달라고 해 주었더랬다.
정말이지 기뻤다. 고마웠다.
그게 기점이었다. 나는 계속 글을 썼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 당신에게 건내도 부끄럽지 않은 책을 쓰게 되면 반드시 당신에게 보내주리라 그렇게 생각 했더랬다.
그 이후로도 나는 한 두차례 더 당신에게 편지를 썼었다. 당신의 방송이 정규방송에서 인터넷으로 옮겨졌을 때 즈음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당신은 항상 내가 보낸 편지를 읽어 주었다. 이름을 굳이 제대로 명시하지도 않았건만, 당신은 내가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았다. 몇 년째 글을 쓰고 있으니 잘 하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한 적도 있고, 우리 식구들 중에 이런 예술 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는 둥, 책은 대체 언제 줄거냐는 둥 하고 툴툴거리기도 했더랬다.
그럴때마다 나는, 껐던 원고를 다시 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오랜 지기의 우정 비스무레한 어떤 감흥을 느끼면서.
당신의 공연에도 한차례 갔었다. 언젠가는 당신의 싸인도 받았고, 당신에게 당신의 방송을 오래 들었고 몇번 사연을 보낸적도 있다고도 했다. 당신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무슨 사연이냐고. 나는 그냥 간단하게 말했다. 책을 쓴다는 사연이었다고. 당신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어떤 놀람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책이나 빨리 보내세요. 하고는 나를 보냈다.
그때 나는 정말 쑥쓰러웠다. 당신이 정말 내 편지와 나라는 사람을 기억할리는 없었지만(얼마나 많은 사연이 당신에게 갔겠는가. 그 오랜 시간동안 고작 세 네번의 편지만 보낸 나를 기억하는게 대단한 일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당신이 나를 알아 본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아직은 당신에게 보이기 부끄럽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나는 아직도 글을 쓴다.
그리고 아직도 당신에게 보이기 부끄럽다. 적어도 십년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당신에게 보여도 자랑스레 미소 지을 수 있는 글을 쓰게 된다면, 반드시 보낼 거다.
당신의 손에 내 글이 인쇄 된 종이 뭉치를 쥐어 줄 수는 없겠지만, 아직 저장되어 있는 당신의 메일 주소로.
그리고 그 메일에는 이렇게 쓸 거다.
당신 덕분에 나는 꿈을 찾았고, 이뤘어.
고마워 마왕.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