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한파다. 며칠 전부터 기온이 낮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눈보라가 칠줄은 상상도 못했다.
빨리 장작을 넣어야 한다. 집안의 가구는 뮬이 도끼로 전부 부쉈다. 덕분에 은신처의 보수는 전부 마칠 수 있어서 한숨 돌렸다.
3명이서 논의한 결과 난로를 두개 설치했다. 급조한 난로라 효율이 떨어지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정도로도 감사해야지.
브루노는 아직도 아프고 뮬은 저번 부상이 남아있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한다.
10시쯤이었나...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프랑코가 오는 날은 아니라 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무기도 변변찮은데 반군이 들이닥치는 걸까 걱정하던 찰나 먼저 답이 들려왔다.
온몸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노인. 그는 자신의 나이로만 판단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거절하기 힘들다. 위급한 이웃은 도우러 가도 위급한 사람을 안으로 들인다는 것에 고민을 한다는 것이 비수가 된다.
미안해요. 저희는 아픈 환자가 있습니다. 겨울동안 당신이라는 사람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쥐어짜듯이 거절의 목소리를 내자 그분은 운을 원망했다. 고마우신 분이다.
우릴 원망하는게 아니라 운명을 원망해줘서. 언제 아플지 모를 노인분을 합류한다는 것이 나에겐 너무 무겁다
만약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뮬을 이해해 주려나. 브루노는 불만을 품을까.
거절 한번이 밤의 수색을 다녀온 듯 매우 지친다. 나에겐 쉴 곳이 필요하다.
왔던 발자국을 따라 되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더 왜소해졌다.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닐테지.
통조림 하나라도 쥐어드리고 싶은 마음과 갈 사람에게 미련을 주면 안된다는 머리가 따로 놀고 있다. 도덕이라는 것을 내 몸에서 도려내는 것 같다.
잘 가세요. 당신을 받아줄 곳은 분명 저같은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겠죠.
부디 무사하시길,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당신을 찾겠습니다.
파블은 아침의 일로 슬퍼하고있었다. 오늘은 대신 내가 수색에 나서기로 했다.
내가 향한 곳은 전쟁 전 마을에서 대형마트로 유명한 곳. 군인들은 이곳에서 거주하며 식료품과 생필품을 닥치는대로 쓸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가 된 상태라 적막만이 감돈다. 입구 근처에 서성이면서 괜찮은 물건이 없나 살펴보는데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문틈으로 엿봤다. 총을 든 군인 한명과 작은 체구의 여성 한명. 군인은 식량을 준다며 꼬드기고 있는 중이다.
좁은 구멍 사이로도 흔들리는 군인의 모습, 아마 여기서 굴러다니는 위스키 한병을 들이부었겠지.
서서히 접근하는 두 그림자.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려고 한다.
나는 문을 열고 손도끼를 휘둘렀다. 나무가 쓰러지기 직전에 내는 소리가 났다.
뮬이 어제 돌격소총과 탄약을 들고 왔었다. 마트에는 아직 군인이 남아있는건가. 뮬은 아직 물자가 많이 남았다고 하면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나도 두통과 씨름하면서 은신처 보강을 하고 수색을 나섰다. 뮬이 조금 모아놓은 물자들을 뒤지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다.
고장난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오는 한 여자. 아파도 그래도 운동한 남자인지라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그 여인은 나에게 이야기만 한다. 자세히 들어보니 어제 뮬이 자기 이웃을 구했다고 한다.
내 앞의 여인은 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다. 만약 내가 뮬과 동료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올 때까지 무작정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었나?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이걸 대신 이야기하러 와줄 정도로 유대가 깊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세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뮬, 네가 한 일은 잘 한거야.
오랜만에 뉴스를 들었다. 한파가 매서워서 도둑들도 밤에 돌아다니질 않는다고.
확실히 밤의 급습은 줄어들었다. 밤에 돌아다니면서 총이나 칼을 쓴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손과 실내에서 녹인 몸끼리 싸우면 결과는 명백하니까. 우리 집을 턴 녀석들은 똑똑한거군.
한파가 오기전에 미리 털었으니...머리가 자꾸 나쁜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황급히 채널을 돌렸다.
겨울이 시작된지 3일째. 브루노가 수색을 나선다고 했다. 밥도 먹고 움직일 준비를 하길래 나는 병이 호전된 줄 알고 기뻣다.
하지만 브루노는 새벽에 약과 통조림을 들고왔다. 상처에는 붕대도 감겨있었다. 우리같은 아마추어가 대충 둘둘맨 붕대가 아니라
전문적인 손길을 가진 사람이 해준 붕대. 브루노는 냉장고와 찬장에 식료품과 약들을 채웠다. 그리고 병원에 가지 말라고 한다.
...아마도 물건을 훔치다 걸린 듯하다. 붕대와 약을 준 사람들의 온정을 이렇게 배신하다니 어떻게 된거 아니야 브루노?!?
춥다. 3명이 전부 아프고 그중에 브루노는 내가 봐도 심각하다. 이제 병원에 데려갈 수 없으니 집에 있는 약으로 버텨야한다.
둘이 자는 동안 저번의 이웃이 또 찾아왔다. 오늘 밤에 자기네 쪽으로 와 달라고 한다.
저번에 대책도 없이 간 것이 미안한 지라 문에 방범장치를 설치하고 가기로 했다. 몸을 움직이면 이 상황을 잊을 수 있겠지.
브루노 미안해, 하지만 난 너를 원망하지 않는 대신 이웃을 도울거야.
그때 집에 두명밖에 없는지라 수색을 못나갔었다. 내가 한 일은 현상유지이지 개선은 아니니까.
브루노는 여전히 아프다. 집은 춥고 차갑게 굳은 음식을 데울 장작도 없다. 나는 칼을 품에 넣고 나섰다.
나는 우리 식구들을 지켜야한다. 우리 식구들을 지킬 수 있어야한다.
비상구 쪽 어두운 곳에 숨어있다가 그를 기습했다. 마주쳐서 불가피하게 죽인 것이 아니다.
내가 일부러 소리를 내서 유인한 것이다. 죽일 목적으로. 하지만 괜찮다. 이들은 여기서 살아갈 목숨이 아니다.
뮬이 그 인간쓰레기를 처치한 것처럼, 구호품을 자기들끼리 독식할 쓰레기들을 없앤 것 뿐이다.
그들은 살 가치가 없다. 살 가치가 없어야해.......
파블이 연 이틀동안 수색을 나가면서 약을 구하러 다녔다. 처음에는 수제 약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쓸데없는 내성이 생긴거 같다.
이렇게 살아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서 지옥을 보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덜 고통받을 것 같다.
내가 그렇게 거부하자 파블은 구해왔다. 고맙다 파블, 고통받는 나날이 늘어났어 네 덕분에.
집에 새로운 가족이 늘었다. 그는 예전에 고물상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전쟁 전에 마주쳤을 지도 모른다. 낡은 가구들을 우리쪽에 제공했을지도.
그는 자신이 집안의 물건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상당히 좋은 재주이다. 전쟁 중에는 무엇이든 귀중해지니까.
파블은 이번에는 내쫓지 않은 것이 기쁜듯 하다. 저번의 그 노인을 이입한 거겠지. 참 여린 녀석이다.
마린이라고 소개한 그는 다친 몸을 이끌고 집을 살펴봤다. 남는 재료와 가재도구를 살펴보는 거겠지.
침대에 앉아서 붕대를 감기면서 이야길 나눴다. 난로를 저렇게 만들어 놓으면 연기때문에 자다가 죽겠다고. 효율도 낮아서 땔감 버리는 거라고.
...내가 만들었다 인간아, 내가 장작 더 많이 주워오면 되는거 아니냐.
붕대를 감고 나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눈을 감으면서 앞으로 해야할 일을 생각중인데 두런두런 목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였다.
파블과 브루노, 아픔 때문에 좌절에 빠진 브루노를 파블이 격려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파블이 이 집의 리더로 판단된다.
친구를 생각하라고,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독려한다. 참으로 좋은 리더이다. 희생정신도 투철하고.
하지만 파블, 전쟁 중에 좋은 녀석은 죽은 녀석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