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제의 성립과 발전과정
백제는 마한의 54개 소국 중에서 백제국이 성장, 발전한 국가이다. 백제국은 유이민집단과 토착세력이 결합하여 한강유역에서 건국된다. 한강유역의 돌무지무덤의 구성, 부여씨의 사용과 남부여로 국호를 한 점, 건국신화를 통해 유이민집단이 고구려계통임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온조와 비류집단은 고구려에 편입되지 못한 세력이었는데, 서로 갈등을 겪다가 온조집단이 비류집단을 병합하면서 지배권을 확립한다. 또한 무기단 적석묘를 통해 유이민집단이 시간에 차이를 두고 남하했음을 알 수 있고, 외형은 기단식 적석묘지만 그 내부는 토광묘가 병존하는 무덤형식을 통해 토착세력(피지배층)과 유이민집단(지배층)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백제국은 철기문화의 변화(주조→단조), 한강을 통한 교역, 낙랑과 대방, 말갈과 싸우며 침공을 저지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러던 중 정시7년전쟁(246)으로 강했던 신분고국이 패하고, 참전했던 백제국의 위상이 높아진다. 이 때 주변 소국을 통합하고 목지국은 약해져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가 마한의 주도세력이 된다. 한편 정시7년 전쟁 이후, 고이왕 27년에 6좌평, 16관등, 관료의 복식제정을 한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보다는 좌평, 솔, 일부 관등을 정하며 국가체제를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6좌평은 백제의 최고관등 6명이다. 6좌평은 초기에는 독자적세력을 가지고 많았는데, 좌평이 축소되어 6좌평으로 확립되고 왕의 신하역할을 하게된다. 이렇게 주도권을 잡고 국가체제를 정비한 백제국은 낙랑과의 다툼, 마한 소국의 병합과정을 거치며 백제로 성장한다. 그 후에 대외팽창정책을 시작하는데, 비류왕은 군현을 축출한다. 따라서 낙랑의 문화와 낙랑인이 백제에 흡수되어 발전에 영향을 준다.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전성기로서 한반도 서남부를 차지했고, 고구려와 북부 지배권을 두고 다투면서 영역국가로 발전한다. 또한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철기문화를 전파한다.
2. 신라의 성립과 발전과정
신라는 소백산맥 이남의 진한 12개 소국 중에서 사로국이 발전한 나라이다. 사로국의 건국은 혁거세 신화를 통해 철기문화를 가진 위만조선 유이민집단과 청동기문화를 가진 토착집단이 결합했음을 알 수 있다. 사로국의 발전은 왕호의 변천을 통해 알 수 있다. 거서간은 군장, 족장의 의미이고, 국읍의 수장인 거서와 같다. 차차웅은 자충으로도 불리며 무당이라는 뜻이다. 즉, 제사장적 성격을 지녔고 당시 사로국이 제정일치사회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사금은 군장, 연장자의 뜻이다. 이 시기에 느슨한 형태의 연맹이 시작되는데 울산과 김포집단이 경주에 진출하며 석탈해가 등장한다. 석탈해가 대장장이였음을 통해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이사금은 박, 석, 김 3성족단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했는데, 유력집단들의 수장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 정했다. 이는 연맹의 주요집단이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립간은 대군장의 뜻이고, 김씨세습왕권이다. 또한 6부가 존재했다. 6부는 지배집단들의 수장을 경주에 살게하면서 경주의 지배집단으로 재편성하는 것이다. 즉, 지배집단의 수장과 기존의 사로국 사람들을 같이 묶어 6개의 부로 나눈 것이다. 여기서 양부에는 김씨집단(왕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왕은 양부의 대표자였고 절대적존재가 아니었다. 6부는 화백회의를 통해 국정을 결정했다.
사로국은 음즙벌국, 독로국과 같은 진한 소국을 복속시켰는데, 그 강도가 약해서 공납적 지배관계였다. 이는 지증왕 때, 주군제의 실시로 직접지배로 바뀐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막기위해 고구려의 정치, 군사적 지원을 받았는데 고구려의 간섭이 심해지자 눌지왕은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배제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로국은 신라로 발전한다. 6세기 초에 6부, 17관등, 율령반포, 왕호사용, 화랑도와 골품제시행과 같이 지배체제를 정비한다. 따라서 신라의 왕은 초월적 존재로 부상하고, 곧 삼국간 패권다툼이 시작된다.
괜찮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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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달라구 구걸하는거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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