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관련된 토론은 흔히 소모적이거나 인신공격적이거나 은폐된 목적성을 가지고 원천부정적으로 흐르기 쉽상인데 이 십일조에 관련된 내용은 '피식...'님이라던가 '밤배'님 등 다분히 합리적 접근자들에 의해 건강한 토론으로 가는 것 같아 저도 몇 자 끄적거려 봅니다.
저는 말씀의 인용이나, 교내 관습과 같은 제한된 합의들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상식적인 언어들로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과 의사소통 할 수 없으면서 보편적 진리나 타당성을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모순되는 일이며, 비기독교 신자들에게 어필할 수 없는 언어들이 과연 종교인들 내부에서도 그들의 중요한 요소인 '선교'의 차원에서 과연 의미가 있느냐 하는 이유에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십일조 관련 인용구를 통해 십일조의 의미를 가늠하는 방법의 효용성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회의입니다.
십일조의 존재가 만약 성경에 기반을 두고, 그 신학적 타당성으로 인해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유효하다면, 기독교 성립 이후 동일 종파 내에서 십일조 제도는 역사성과 보편성이 파악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이후에 사도행전부터 시작되는 초기 교회들의 서술을 가만히 보면, 예수 이전과 이후, 유대교와 탈유대교 차원에서의 기독교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가장 큰 주장 중 하나는 '정신이 결여된 율법 준수의 무효성'입니다. 이것은 "율법 자체의 부정"과 "정신과 율법이 합일된 차원에서의 율법 준수"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했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도 이러한 두 해석이 갈등의 주요한 이유로 보여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과 율법 간의 관계에 대해 제정일치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종교적 관습과 규범인 동시에 사회적 법률 제도였습니다. 예수의 율법파괴적 가르침은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을 심각하게 야기할 수 있었고 이것이 기득 계층이 위기를 느낀 이유입니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미루어 보건데 저는 다음과 같이 상식적이고 원초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단 "율법 정신"의 수호 입니다. 따라서 초기 교회에서도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그들의 율법을 마음을 다해 지키면 그것은 권장할 만 일이나 자신들의 그 덕을 타 민족 공동체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정신이란 의심할 나위 없이 "신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자신과 이웃에게 연장할 것" 입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볼때 '신에 대한 감사의 의미와 부의 재분배' 역할을 담당하는 '십일조' 제도는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신학적 기반은 확보할 수 있으나, 그것이 꼭 의무적인 일은 아니게 됩니다.
(참고로 이러한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는 오늘날 '제7 안식일 교회'로 전승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단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교회의 발생적 특성으로 인해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회적 퇴폐 행위가 없는 다른 단체를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는 '교무금 제도'로 국내 개신교 단체는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정기 헌금'을 세금의 형태로서 부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기본적 전제로써 제시했듯이 그렇다면 십일조는 보편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발생학적 차원에서 십일조 제도는 조직의 구조적 이유로 생겨났고 그 후에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당시의 유대교나 현재의 기독교와 같이 '전업 성직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열 두 사도들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바오로 조차도 선교 이외에 자신은 스스로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독립적인 성전도 가지고 있지 않아 지원자의 집이나 공공장소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 유지를 위한 무산계급이나 전용 시설에 대해서 교회 구성원들이 별도의 지출 즉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 교회의 성찬례 역시 각자가 음식들을 집에서 가져와 한데 모아놓고 다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후 교회가 체계화되고 성전이 마련되며 성사 업무만을 전담하믄 전문 성직 계층이 생겨남에 따라 교회는 자기 유지를 위한 회비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특정 유산 가정의 기부라던가 신자들이 모으는 주일헌금과 같은 비정기적이고 일정치 않은 규모의 예산으로는 종교적 행사와 성직자의 생활비, 시설의 유지 보수비 등 정기적 지출을 감당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회비"는 후에 성서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부여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 '십일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교회 운영진의 '안정적인 예산 확보'를 위한 제도의 부적절한 적용입니다.
제정 분리 사회에서 교회는 신도들에 대한 세금 부여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제정 일치사회에서 조차도 그것은 국가 행정기관과의 협의를 걸쳐 이루어졌던 부분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회비의 납부'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일어나야 마땅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의 '교무금' 제도는 신자 본인이 자신의 월 정기 납부액을 직접 설정하고 교회는 공식적으로 거기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암묵적으로 압박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많은 개신교 교회들에서도 십일조 제도은 이런 방식을 띠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파의 구분을 초월하여 제도의 문자적 해석을 빌미 삼아 '소득의 10%'를 납부하라며 신도들에게 마치 기부금과 헌금을 통한 구원을 암시하거나, 고액 기부자를 편애하거나, 공식적 비공식적 지위를 부과하는 등의 저열한 '신앙 오용 행태'가 국내 여러 교회들에서 성직자들이나 교회 운영진들에 의해 공공연연히 자행되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불쾌감을 유발하는 주요한 이유입니다.
차라리 신자들에게 정중히 부탁을 하면 하지, 구원론이나 성경을 (그것도 제정 일치 시절인 구약만을) 들먹거리면서 신자들을 금전적으로 압박한다면 이미 교회가 가진 본래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 아닐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헌금함을 따로 마련해 두지 않고 주머니를 돌리는 것 역시 단순히 관습 이상으로 "약발" 때문이라면, 공론화시켜 소득이 다소 감소하더라도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다른 어느 조직도 아니고 교회 조직이기 때문에 마땅히 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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