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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난영화는 세월호 참사와 닮았다. ‘괴물’(위)에서 국가는 소녀를 구하거나 괴물을 죽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연가시’에서 정부는 ‘먹튀자본’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며 한정 없는 기다림에 놓인 감염자들이 고통과 공포를 겪도록 방치한다. |
책임자는 도망가고 국가는 배신하고
위험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인 영화들
세월호 참사는 <괴물> <연가시> <감기> 등 한국 재난영화의 장면들을 기시감으로 불러낸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확인되듯이, 현대사회에서 재난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자본은 재난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이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수명이 다한 배를 규제 완화라는 명목으로 수명을 연장해 운행하도록 하고, 불법적인 증개축과 적정량의 3배가 넘는 화물을 과적한 것은 모두 이윤을 위한 행위다. 재난이 일어나지 않을 때, 이윤은 고스란히 자본의 몫이다. 그러나 재난이 일어나면, 위험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 된다. 위험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정부와 전문가 집단은 정보를 독점하고 은폐하는 방식을 통해 위험을 떠넘긴다. 그 결과 사회적 약자들이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다. 가령 인천에서 제주로 가기 위해 배편을 택하는 사람이 부유층일 가능성이 낮으며, 해양수산부 관료나 해경 등 여객선의 위험성을 알았던 사람이 배를 탈 리는 만무하다.
전문가나 공무원이 아닌 주인공 재난은 견고하다고 믿어온 시스템이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자, ‘죽게 내버려두거나 살게 해주는’ 국가의 생체 권력을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사안이며, 재난을 다루는 영화들 역시 본질적으로 정치영화의 성격을 띤다. 한국 재난영화는 할리우드나 일본의 재난영화와 확연히 다른 정치성을 지니는데, 이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주인공은 주로 전문가나 공무원이다. <단테스 피크> <딥 임팩트> <아웃브레이크> 등에서, 유능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재난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재난을 막거나 구조에 힘쓴다. 전통적인 영웅서사를 따르지 않는 재난영화 <컨테이젼>에서도 정부의 전문성과 공무 수행 능력은 높게 그려진다. 반면 시민사회와 노동계, 대중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간호사들이 파업한 자리에 수녀들이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대중이 인터넷상의 무책임한 선동이나 음모론에 휘둘려 시위에 나서거나 폭도로 돌변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일본 재난영화에서는 숭고한 직업의식으로 순직하는 전문가와 공무원들이 그려진다. <블레임: 인류멸망 2011>에서 의료인을 비롯한 모든 인물은 사명감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재난과 싸운다. 일본 사회의 분열이나 음모론 등은 그려지지 않으며, 대재난이 지나간 뒤 재건의 희망을 말하며 마무리된다. 이러한 서사는 감동적이라기보다 섬뜩한데, 2차 세계대전 패망과 원폭이라는 대재난에도 불구하고 천황제를 비롯한 기존 체제의 붕괴 없이, 전후 복구를 통해 모순을 봉합한 일본 현대사가 반영된 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는 후쿠시마 사태 이후 체제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급격한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 사회의 현재와도 연관 있어 보인다.
반면 한국 재난영화에서 주인공은 대체로 전문가나 공무원이 아니다. 설사 전문지식이 있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일개 시민으로 행동하며 다른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사태를 해결한다. <괴물>의 주인공은 하층민 가족이고, 이들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라고 말하는 노숙자와 연대해 괴물을 죽인다. <연가시>의 주인공은 원래 과학자이지만 현재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다. 그의 전문지식은 쓰이지 않는다. 동분서주하던 그는 마지막에 시위대의 응원을 받으며 트럭으로 공장 문을 부수고 들어가 공장노동자들과의 연대로 치료약을 빼낸다. <감기>에서 주인공은 감염전문의와 구조대원이지만, 이들은 조직에서 낙오된 채 일개 개인의 몸으로 시위대에 합류해 국가폭력에 맞선다.
한국 재난영화에서 국가는 전문가나 공무원을 활용해 재난에 빠진 국민을 구조하는 존재가 아니다. <괴물>에서 정부는 소녀를 구하거나 괴물을 죽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합동분향소를 차려주고 애도의 푸닥거리를 통해 재빨리 사고를 잊게 하거나, 효과도 없는 방역 코스프레로 전시행정 쇼를 하거나, 언론과 합작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균자 딱지를 붙이고 감시하는 데 진력한다. <연가시>에서 감염자들은 자살 충동으로 날뛰지만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전염력은 없다. 하지만 국가는 감염자들의 폭주와 자살로 사회 전체에 공포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외부와 격리시킨다. 정부는 체육관에 이들을 몰아넣은 조치가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부가 이들에게 해주는 것은 물에 뛰어들지 않게 가둬놓는 것과 최소한의 물과 식량을 공급하는 것뿐이다. 이들이 느끼는 고통과 공포, 그리고 이들의 인권은 정부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정부가 이기적인 ‘먹튀 자본’에 끌려다니며 불리한 협상을 계속하는 동안, 감염자들은 한정 없는 기다림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버틴다. <감기>에서 국가는 치명적인 감염의 원인을 밝히거나 확산을 막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주먹구구로 우왕좌왕하는 사이 감염은 급속히 확산되며 어느새 전문가들은 전면에서 사라지고, 정치인과 군인이 사태의 주도권을 잡는다. 정부는 도시를 봉쇄하고 감염자들을 살처분하는데, 정부가 감염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던 시민들은 진실을 알고 나서 봉기한다.
선조와 고종, 이승만 그리고… 한국 재난영화에서 국가는 재난을 수습하지 못하고, 국민을 적으로 삼아 국가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기층민인 주인공이 시민의 연대로 재난에 맞선다는 설정은 매우 특징적이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이고 민중적인 서사는 실제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무의식에 각인된 체험이 일종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백성들의 피란을 막기 위해 사대문을 걸어잠그고 피란을 갔다. 분노한 백성들은 왜군이 도착하기 전에 궁궐에 불을 질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자, 고종은 농민군의 서울 진격이 두려워 청군을 끌어들인다.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지휘를 받은 조선 관군은 농민군을 학살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가장 먼저 피란 가면서 서울 시민들이 피란 가지 못하도록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학살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기 전 사장은 대피 명령 없이 도망쳤고, 500여 명이 압사당했다.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 때, 기관사는 대피 명령 없이 개폐 열쇠를 빼서 달아났다. 천안함 침몰시 함장을 포함한 장교는 모두 구조되었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선장은 가장 먼저 빠져나갔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수장되었다. 해경이 국내외 구조 지원을 거부하고 민간의 구조 활동을 방해하면서 결국 정부는 실종자를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이처럼 면면히 흐르는 책임자 도망의 역사와 국민을 배신하는 국가의 존재는 한국 재난영화의 중심 서사로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디테일한 각론적인 기시감 그보다 디테일한 각론적인 기시감도 존재한다. 가령 <괴물>에서 “현지한테 전화가 왔어요”라는 주인공의 말은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세월호에 갇힌 아이가 배 안에서 메시지를 보냈다고 호소한 가족이 있었지만, 정부는 유언비어에 속지 않아야 한다며 듣지 않았다. <괴물>에서 탈출한 가족들이 가까스로 한강변에 왔을 때, 방역업체 직원이라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며 일감 나눠먹기와 뒷돈 거래를 이야기한다. 주인공 가족들은 그들에게 돈을 찔러주고 한강변에 갈 수 있었다. 해경과 유착된 인양업체 언딘마린인더스트리(언딘)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구조가 지연되었으며, 민간 잠수사들은 언딘과 계약을 해야만 구조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괴물에게 잡혀간 현지는 저보다 어린 거지 소년을 돌보며 결국 소년을 살린다. 위기의 순간 어린 오빠는 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아이들은 서로를 보듬었다. 구호품의 90%가 청소년들이 보낸 것이라는 소식은 재난 속에서 서로를 돌보는 아이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괴물을 물리친 주인공은 TV를 발로 끈다. 거짓말만 하는 공중파 언론에 불신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은 언론의 거짓 보도에 환멸을 느껴 공중파 카메라를 내치고, 외신과 소수 언론의 취재에만 응하고 있다.
<연가시>에서 체육관에 격리된 감염자들의 모습은 진도체육관 바닥에 가림막도 없이 이불을 펴고 누워서 인내를 강요당하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과 겹친다. 먼저 아이의 주검을 찾아 장례를 치른 가족들은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을 지옥의 입구 같은 그곳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찾아와 남은 자들을 위로한다. <연가시>에서 정부는 감염자들이 사회를 혼란시킬 수 있다며 가족 면회를 제한하고 휴대전화도 빼앗으려 한다. 현실의 정치인은 실종자 가족들을 사회 혼란 세력으로 매도하고 ‘종북’으로 덧칠하기도 했다. <연가시>의 정부가 먹튀 자본에 끌려다니듯 현실의 정부는 청해진해운과 언딘 등 자본에 약점이라도 잡힌 듯 끌려다닌다. <감기>에서 감염자들을 치료해준다고 데려간 정부가 사실은 살처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세월호에 갇힌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던 48시간 동안 정부는 최대의 구조 인력과 장비를 투입했다고 거짓 선전을 해가며, 실제로는 구조를 하지 않은 채 학살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의 거짓과 무성의한 대응에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이 서울로 가자고 나섰던 그 밤, 경찰들이 실종자 가족을 막아서며 진도대교에서 대치했던 장면은 <감기>에서 분노한 경기도 분당 시민들이 봉쇄를 뚫고 서울로 가자며 고속도로 입구에서 군과 대치하던 장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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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서 정부의 거짓 선전에 분노한 시민이 봉쇄를 뚫고 서울로 가자며 고속도로에서 군과 대치하던 장면은 진도대교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과 경찰이 대치했던 장면과 겹쳐 보인다. |
<감기>의 분당 시민, 세월호 승객들 <감기>에서 관료와 정치인, 그리고 군 장성들은 자기 자리를 보존하는 대가로 군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 자국민을 학살할 권한을 내준다. 재난에 국민의 관심이 쏠린 상황에서 대통령이 화사한 옷을 입고 맞은 오바마에게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이 돌려받는 것을 미뤄달라고 한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을 정부는 외교적 성과라고 포장한다. <감기>에서 재난은 거대한 시위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지금, 전국에서 촛불과 횃불이 켜지고 있다. <감기>의 분당 시민들이나, 세월호 승객들이나, 그리고 대한민국호에 탄 우리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순 없다.
황진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