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사투리 외국인으로 인기가 높은 로버트 할리(Robert Holley, 한국이름 하일. 河一. 1962~). 그는 10년 전인 1995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에 '첫 외국인통신지기 로버트 할리'라는 제목의 인터뷰기사가 실리면서 전국적인 스타가 된다. 당시 그는 한국에 온 지 8년 째 되는 국제변호사로 1994년 4월부터 포스서브에 '산오름'이라는 등산동아리를 만들어 동아리지기로 활동한 맹렬 PC통신인이다. 하루 3시간씩 PC통신을 했던 그는 부산과 일부 PC통신망에서는 이미 인기스타였다. 아침마다 부산방송의 '굿모닝 미스터 할리'에 출연하고 있었으며, 부산 통신망인 아이즈(EYES)에서 '할리와 함께'라는 코너를 맡으면서 인기를 끌었다. 한국인보다 한국말을 잘 하는 그는 경향신문에 난 기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자신을 알렸고 이후 중앙방송을 통해 경상도 사투리 외국인으로 크게 인기를 끈다. PC통신을 몰랐던 사람은 어쩌다 방송에 섭외된 외국인 중의 한 명으로 알겠지만 할리는 한국 최초의 통신동아리 지기를 맡은 역사적 인물이다.
* 채근담을 영어로 쓴 책을 낼 정도로 로버트 할리는 한국말을 잘 한다.
(1) 내가 기억하는 할리 일화 중에서 가장 기억이 나는 것은 이홍렬쇼에서 이다도시와 함께 나누던 대화. 당시 아내와 함께 보면서 너무나 웃긴 나머지 그날 이후로 인상이 팍 박혔다. 당시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홍렬 : 할리씨는 보신탕 드셔 보셨어요?
할리 : 당연히 무그바찌예, 억씨로 맛있었쓰예∼.
이다도시 : (경멸의 눈빛으로) 오... 그걸 어떻게 먹어요?
할리 : 맛있기만 하든데예. 머.
홍렬 : 몇 번 먹어 보셨나요?
할리 : 마이 무그봤으예. 우리 장모님이 여름되면 마이 해주지예!
이다도시 : 어머 짐승들. 아니 어떻게 개를 먹어요? 오∼ 마이갓!
할리 : (궁시렁대며) 즈그들은 달팽이도 무그면서 개묵는 거 가꼬 난리고. (첫 번째 명언. 여기에서 시청자와 방청객 모두 폭소)
이다도씨 : (흥분한 이다도시 속사포로 쏘아대면서) 어머 이 짐승들. 개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친구에요. 그걸 어떻게 먹어요?
잠시 후 할리의 두 번째 명언이 나옴.
할리 :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 (다시 한 번 방청객과 우리 집 식구들, 웃다가 뒤로 넘어감)
(2) 당시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로버트 할리의 우리말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10년 전에도 한국인보다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실력파다. 채근담이라는 고전을 영어로 번역할 정도로 우리 문화에 대한 식견도 높다.
할리: 엉덩이에서 비파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대화방에서 대화 중 갑자기 던진 질문)
한국인 통신인:...(뜻을 몰라 침묵)
어떤 통신인: 그런 말도 있나?
다른 통신인: 맞아. 그런 말이 있을까? 비파는 우리 악기가 아니잖아? (맞장구 친다)
할리: 에헴, 없을리가 있는교. 너무 바빠서 자리에 앉아 있을 시간도 없는 사람을 얘기할 때 쓰는 말입니더. 한국 사람이 그것도 몰라예.
한국인 통신인: 윽. 억. 당했다. 외국사람이 별 걸 다 아네. ^^;
할리: 그러면 내일 보입시더.
(3) 로버트 할리의 경우는 19세 때 이미 선교사로 한국에 온 적이 있다. 이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국제변호사가 된 후에 1987년에 부산에 온다. 이후 진해 출신의 아내와 결혼한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로버트 할리는 1997년에 대한민국에 귀화한 이후 이름을 하일(河一)로 고치면서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가 1989년 팀스피리트훈련 당시에 미국군함이 한국의 어망을 끌고가 못쓰게 한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승소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4) 로버트 할리가 한국에 애정을 느끼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세 때 선교사 자격으로 대구시 대명동에 왔을 때. 당시 몇 달 간은 말도 통하지 않았고 음식도 맞지 않아서 매우 낯설고 불편했다.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그때 이상명이라는 고등학생이 말을 걸어오면서 친해진다. 어느날 그 학생이 준 선물 속에 담겨 있는 "할리씨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모든 한국사람들과, 특히 저와 친해지시길 바랍니다"라는 글귀로 인해 할리는 한국에 애정을 갖게 된다. 이후 연세대 가고 싶다는 이상명 학생과 "네가 연세대에 입학하게 되면 나도 한국에 다시 나와서 같이 공부할 거다."라고 약속한다. 몇 년 뒤 이상명 학생은 연세대에 들어갔고, 로버트 할리도 약속에 따라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다시 나와서 연세대에서 같이 공부하게 되며 한국과 인연을 이어간다.
(5) 당시 경향신문에 기사를 쓴 전성철 기자는 매거진엑스라는 꼭지를 맡아서 화제의 인물을 인터뷰했다. 나는 당시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운동가 활동을 이유로 전성철 기자와 인터뷰를 해 전면에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전성철 기자 결혼식에 찾아갈 정도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데, 요즘은 연락이 끊겨 아쉽다. 서로의 거취를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겠지만 사는 것이 바쁘다보니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10년 전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고 싶다. ^_^
최트루?
출처는 여깁니다
http://www.dal.kr/blog/2005/11/20051104_robert_holle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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