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20 am3:30
"Are you hot?"
방문을 닫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그녀의 첫 마디.
더워서 그러나.. 하는 마음에 에어컨을 켜고 그녀의 건너편 모서리에 걸터앉는다.
잠깐동안의 어색한 침묵, 그리고 그녀가 묻는다.
"여기서 같이 자는거야?"
당연한 걸 왜 묻는걸까. 어쩐지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묻는다.
"물론, 너는 나와 함께 여기서 잔다. 하지만 단지 잠 뿐."
그 '잠 뿐이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물어본다. 내 발음이 그렇게 이상한가?
"단지 잠 뿐. 그밖에는 아무것도."
그리고 나는 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 안다. 그리고 나도..."
한국인이 경영하는 유흥주점.
역시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물론 우리일행도 예외는 아니다. 해외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드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모처럼 먼 이국땅에 와서도 그 문화에 적응하려하지 않고 한국음식점을 찾고 한국 주점을 찾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함께 출장온 나의 일행도 마찬가지.
모처럼의 주말이라 일을 일찍 끝냈건만, 대형쇼핑몰을 가잔다. 항상 한밤중에 퇴근하던 스케줄에서 모처럼만에 얻게 된 낮시간은 정말 황금과도 같은 기쁜 시간이다. 여기는 필리핀. 그리고 여름. 남들은 이곳에서 이국의 정취를 느끼고자 비싼 항공비를 내고 바가지요금을 쓰면서도 이곳의 해변을 찾고 자연을 찾는데, 도대체 왜 우리일행들은 세계 어디에나 있는 - 한국에도 널리고 널린 - 대형쇼핑몰의 유명브랜드를 찾아 쇼핑을 하자는건지.. 가격이 싸면 얼마나 쌀 것이며, 싸다고 당장 필요치도 않은 것을 구매하려는 그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가 없다.
그렇게 황금같은 시간을 돌처럼 버리고, 또 한국식당을 찾아가 한국음식을 먹고, 그리고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흥주점으로 발길을 돌리는 일행속에서 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뭉개져있었다.
그리고 주점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 그리고 '모두가 원하니 너도 원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나와 함께 오게 된 아가씨.
"나도 안다. 그리고 나도.."
무언가 슬픈 눈으로 말을 잇는 그녀.
필리핀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임신을 했고, 이제 1살이 된 아이를 위해 그녀는 유흥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몸을 판다.
정말이지, 영화나 소설속에서나 보던, TV의 고발성 취재장면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를 인생으로 짊어진 사람이 지금 내 옆에서 슬픈 눈으로 날 보며 말하고 있다.
"그럼 너의 남편은 어디에 있지?"
"나도 모른다."
.....썩을넘.. 남자놈의 새끼가...
"...미안하다.."
"너는 미안할 일이 없다."
그렇게 슬픈 눈으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집에 아이가 있다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안아야 한다고.
"집까지는 얼마나 걸리는데?"
"한시간 정도."
"(멀다!!) 걸어서 한시간이겠지?"
"아니, 버스를 타야 한다. (진짜멀다!!)"
"이 시간에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있나?"
"호텔 바로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
그렇다면 어서 움직여야지. 하는 마음에 일어서자고 제안하자 그녀가 말린다.
"안된다. 너의 일행이 네게 화를 낼거다."
그녀는 내가 진작부터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었다.
나는 제안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밖으로 나가서 버스를 기다리고, 함께 있는 모습을 우연히 우리 일행이 보게된다면, 우리는 단지 산책중이었다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너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안아야하고, 이 이야기는 너와 나 둘 만의 비밀이다."
그녀가 운다.
그 큼지막한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 눈물을 연신 훔친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있는곳은 한국 가라오케(KTV)다. 나는 일을 하면서 수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들 불친절했고 말이 통하지 않았고 거칠었다. 내가 그들의 맘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화를 냈고, 항상 내게 섹스를 요구했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나와 내 아이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눈가의 짙은 화장이 번진다. 눈밑을 훔치는 그 손등에 화장이 번진다.
"너는 한국인이 아닌 것 같다. 친절하고, 착하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네게 친절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단지 내가 사랑하는, 결혼을 약속한 내 애인을 위해 이러는 것일 뿐이다. 나는 위선자다."
"아니다. 너는 매우 친절하다. 지금껏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날 배려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정말 미안했다.
그녀를 힘들게했던 모든 한국인을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갓난 아기를 키우는 한 엄마로서, 항상 아이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매우 긴 시간동안 쓴 술을 마셔 몸을 아프게 하고, 사랑하는 아기를 위해 타인의 욕구를 채워왔던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또 앞으로 얼마나 힘들까.
가자, 버스를 타러 가자. 그녀의 손을 이끌고 호텔을 나선다.
다행히도 일행들은 각자의 방에서 나오질 않는지 호텔로비엔 아무도 없다.
현관을 나서고 길을 건너며 그녀는 "지금은 새벽 2시 반이다. 매우 위험한 시간이다. 어서 돌아가라."고 나를 보내면서 연신 눈가를 닦으며 고맙다고 말을 한다.
돌아서서 호텔로 들어오던 내 기분은 상당히 착잡하고 안쓰럽고 후련하고 허무해 무척 비현실적인 꿈을 꾼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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