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자토방에 올라온 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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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js0213 : 어느분이올린글 삭제직전에 퍼옴. ㅋㅋ 읽어보셈 [93]
316258 | 2007-09-02
추천 : 224 / 신고 : 5 | 조회 : 6293 | 스크랩 : 40
이 글은 종교에 대한 글이 아님.
오로지 진리에 대한 것을 고찰하는 것이니 예수를 믿는다는 등의 시시한 종교적인
잣대의 리플은 사양함.
특히 한국 기독교라는 괴상한 종교의 교리 중심의 의견이나 반박은 허접 쓰레기이니
아예 리플을 달지 말기 바람.
이 글을 쓴 사람은 특정 종교인이 아니며 남의 믿음에 간섭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함.
특히 반박 한답시고 한국 기독교가 남몰래 소록도에 가서 헌신한다거나 음지에서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등의 인간 외적인 행동을 들고나와 떠벌리는 것에는 그 행동자체에 일절
옳고 그름의 잣대가 없으니 그런걸로 허세를 부리지 말기바람.
그와 반대로 글쓴이는 탈레반에서 벌어진 일이나, 분당에 800 억짜리 교회가 생기는 거나,
밤에 아파트 창문으로 보이는 동서남북 모든 방위에 나날이 늘어나는 수십개의 빨간
십자가 숫자에도 마찬가지로 무관심함.
따라서 진리 그 자체만을 가지고 얘기 하자는 것에는 정중히 응하겠으나,
진리 세계의 근처에도 못간 허접 종교관을 가지고 가소롭게 덤비지 말것.
글 중 가끔 등장하는 성경 문구의 인용이나 기독교의 주장 등은 진짜 진리를 살펴보는
좋은 소재가 되기에 사용하는 것임을 분명히 함.
내 나이 40 이 넘은지 어언 십년이다. ( 아... 그럼 딱 50살이구나. ㅡ.ㅡ;;)
지난 세월 수십여년간 진리는 뭘까라는 호기심에 밥 먹고 돈버는 시간외에는
명상과 진리에 대한 공부를 손에서 놓치 않았다. 운좋게 올바른 방향으로 공부했는지
이제는 진리에 대해 일푼어치이나마 이해가 된다.
비록 몸으로 체험을 하면서 비로서 얻는 열반의 경지는 언감생심이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진리를 구분할 정도는 된다.
진리에 대한 일푼어치의 이해만으로도 道(진리)가 트인 책이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로 다가온다. 노자의 도덕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감격 그 자체다. 불경도 대부분 그렇다.
이런 책들은 가까이 두고 이런 책들이 세상에 나오기 까지 해 준 역대 선배 도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책장을 자주 넘긴다. 볼 때마다 불가의 부처 아제 이하 달마 성님,
노자 행님 등, 역대의 도사들의 어록이 무지하게 감사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기대에 부풀어 성경이란 책도 보았다.
역대 지구최고의 베스트 셀러라 하는데 얼마나 좋은 진리의 이야기가 있을까 무척 기대했다.
그러나 첫장을 넘기는 초장부터 기분을 짱나게 잡쳤다.
천지창조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자식이고 애비이고.... 이게 무신놈의 경전이람?
족보 따지는 건 진리의 세계에서 관심 밖이다. 족보는 과거형이다.
과거형 시제는 진리 세계엔 결코없다.
진리는 오르지 지금 이순간의 현재진행형만 취급한다.
성경은 과거에만 집착한 쓰레기 모음집이다.
그래도 뭐가 있나 싶어 참고 꾹 참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보았다.
보면 볼수록 성경은 진리하고는 거리가 먼 책이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가 진리에 대해 글을 쓰면 저렇게 허접 쓰레기가 된다.
성경은 진리의 진자도 모르는 사람이 발가락으로 창작한 쓰레기 경전이다.
그러나 중간에 예수가 직접 말했다는 내용(벌겋게 칠한 부분) 에는 진리의 내용이
더러 보인다. 그것도 번역 오류인지, 아니면 예수말을 받아 적은 제자들의 대가리
수준이 낮아서인지는 몰라도 무척 진리 엑기스에서 변질되어 있었다.
그 예를 일일이 들어가면서 글을 써야 이해를 도와 줄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 달라. 원래 진리란 입 밖으로 말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머리속에서 환하게 이해되는 '그것'을 그대로 두어야지 입으로 백날 떠들어 봤자
그 역시 쓰레기가 된다.
'그것'은 가슴으로 , 몸으로 체험하여 얻는 것이지 머리로 이해하여 설명되어 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입밖에 나오는 순간 거짓이 된다.
이런 글을 쓰려면 그런 내용을 논증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꼭 있더라.
그러나... 어떻하냐. 분하겠지만 참아다오.
진리란 논리하고는 담쌓은 세상의 이야기다. 증명을 요구하지 마시라.
성경이 진리 서술에 완전 실패한 날라리 경전이라면 불경 쪽은 사정이 다르다.
부처 제자들은 그런 실수를 않았다. 부처의 오리지널 사운드를 그대로 적었다.
부처 자신도 진리는 입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법문은 무척 끙끙 거린 흔적이 도처에 보인다.
부처 아저씨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법문을 펼친 덕분에 불경은 진리설명의 훼손이
없었고 오염이 덜 되었다.
그것말고 또 한가지 부처의 복이 더 있었으니 그가 살아 생전에
5000 여명의 역시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을 키웠다는 것이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보는 법.
깨달은 자은 깨달은 사람의 말귀를 알아 듣는법.
심지어는 즈그끼리는 무언의 한마디 말도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득도한 제자들은 부처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를 하였다.
그런 자들이 모두 모여 머리 맞대고 부처의 어록을 정리하였으니 오류가 적을수 밖에..
성경은 그에 비하면 돌대가리 열두 제자들이 진리를 이해도 못한채 각기 따로 적은 것이다.
것두 예수 사후 수년~수십년 지나서...
도사 가르침의 기록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성경이 망가진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부처가 진리 설명에 끙끙거린 반면, 예수는 진리를 알고는 있었으나 설명에는
아주 무성의 했었다. 아니, 방편이 부실했다.
그걸 어슬프게 받아적은 성경은 진리를 모르는 제자들의 작의적인 서술이 대부분이다.
4대 복음서 모두 예수 사후 수년~수십년이 지나서 제자들이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이다.
그 제자들은 모두 진리에 대해 쥐뿔 아무것도 몰랐다.
그뿐아니라 성경은 후대를 거치는 동안 여러모로 수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
진리는 입밖에 나오기도 힘들지만 제대로 표현된거라면 수정은 더 이상 없다.
진리는 영원 불변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한 말 중 진리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문구들로만 추려서 재편집한다면
두툼하던 성경은 열댓 페이지로 쪼그라 들것이다.
성경이 왜 이모양으로 시시한지 의아하여 목사 몇사람을 접해봤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뭐 좀 아는가 싶어서였다.
만나서 얘기를 나눈 목사 여섯명은 모두 진리에 대해 뻥통이었다.
진리 학교 레벨로 치면 아직 유치원도 안 들어간 수준이었다.
절간의 중들은 초등수준에서부터 박사까지 진리 이해도에 다양한 수준이 있었지만
(중들도 돌팔이가 무지 많았다)
목사는 아직 글자도 모르는 상태였다. 학교에 들어갈 준비도 안된 코흘리개 상태였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기독교는 진리에 대해 완전 무지할까?
몇가지의 답이 있겠지만 두가지로 말해 본다면
첫째, 그건 바로 제대로 된 경전이 없어서였다. (이말에는 허구가 많다. 진리가 경전
따위의 공부로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道의세계에 대한
길라잡이는 된다)
둘째, 진리에의 이해를 도와줄 도우미가 전무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겐 진리를 아는 사부가 한 사람도 없었다.
성경들고 다니는 성경 동네의 사부들, 그 사부의 사부들, 윗대 조상들 들들...
모두 진리에 대해 사쿠라였다.
기독교엔 깨달은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이말 모두 인정하실거다.
반면 불교쪽엔 사정이 좀 다르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이후 동양에는 불교의 전파를 타고 득도한 제자들이
무척 많이 배출되었다. 그건 제대로 된 사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예수 주변 언저리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우선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부분인데... 그는 신의 심부름을 온 것이 아니라
일개 득도를 한, '조옷 찬, 사람의 자식'일 뿐이었다.
그는 단지 진리를 보았던 사람일 뿐이고 진리를 설명하려던 사람 새끼였다.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나고, 바다를 갈랐다는 기적등은 모두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의 창작 소설이다.
창작 정도로 볼때 해리포트소설과 비슷할 정도로 허구가 많다. 무협지보다 더 황당하다.
성경에는 이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유태인이 인류의 주인공 탄생인 척, 자신들의 잣대로 족보 소설을 짓고,
신구약의 줄거리를 새로 창작하느라 무척 고심한 대목이 여러군데 보인다.
이런걸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가르침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어찌 이런 가공의 소설을 거룩한 경전이랍시고 주말마다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 다니는지
참으로 우스울 뿐이다.
* 여기까지 오느라 대단히 수고많았다.
혹시 기독교인이 있어 여기까지 읽어봤다면 무척 심적 고통이 많았을거다.
지금 입에 거품이 물어지고, 분해서 씩씩거린다는 걸 잘 알고있다.
하지만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어디까지 쓸지는 모르겠으나 끝까지 읽고
뭔가 느껴진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생긴다면
이글은 역할을 다 한것이다. 도중에 종교적인 잣대로 반박해 본들 아무런 대꾸도 않겠다.
더우기 유교 바탕 위에 세워진 한국 기독교는 세뇌의 정도가 극에 이르렀기에
더욱 대꾸할 가치가 없다. 인간을 어떻게 그정도로 바꿀 수 있는지 참으로 불가사이 하다.
부디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아 참, 이런 글은 시중 서점에서 쉽게 접해 볼수 있는 것이 아니니 소중히봐주길 바란다.
수십년 각고 끝에 진리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얻은 사람이 쓰는 것이므로 감사히 읽기 바란다.
덧붙여 말해두지만 지금 이 글에 동원된 단어나 표현이 다소 거칠더라도 이해해달라.
원래 거친 언어가 고상한 언어가 더 전달이 빠른 법이다. 너희 기독교 돌대가리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고심하여 선택하는 글쓴이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존중해 달라.
예수에 대해 더 알아보자.
예수는 단지 득도를 한 인간 자식이다.
그가 어느 정도 깊이로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깨달은 자로 보인다.
성경의 드문드문 그가 말한 진리의 오리지널 사운드로 볼때 해탈한 자임은 분명하다.
진리에 이해가 있는 사람은 그걸 안다. 예수가 득도한 인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를 신하고 결부 시키지는 마라. 후세 사람들이 신이니, 천국이니 추가로
예수를 가공한 것이다. 아무리 아이큐 좋다는 유태인들이라지만,
진리의 이해가 없는 가공은 추리소설 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게 성경의 큰 실수다.
그 예수가 어느날 문득 성경에 나타났다.
성경에 보면 8살까지 예수의 흔적이 있다가, 세월이 흘러 별안간 30 살이 되어서야
성경에 등장한다. 그리고 33살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즉, 성경이란 것은 그 예수 3 년간의 작업이다.
그럼 사라진 8살부터 30살까지는 대체 예수는 뭐 하고 자빠져 있었던가...라는것이
조금 궁금한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 기간 동안 그는 동양으로 흘러 들어와
불교에 입문하여 그짝에서 도를 닦고 공부하였다는 것이 오늘날 해석이다.
즉, 예수는 불교의 제자였다.
당시 인도에는 부처가 죽고나자 힌두교라는 종교가 득세를 하는 바람에 불교의
제자들이 모두 강제 철거 당해 모두 티벳으로 이주해 있었다. 인도는 불교를 창시한
나라지만 가장 먼저 불교가 몰락한 나라이기도 하다.
인도에 다다른 예수는 힌두교의 댓빵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실망을 한 나머지 - 힌두교는
진짜 뻥통이다. 각설. - 털레털레 동쪽으로 더 여행하다가 티벳에 이르러 비로서 강퇴당해
와있던 진짜 覺者 스승들을 만나고 자신의 미약함을 뼈저리게 알고 그 자리에서 넙죽 절하고 입문한다.
이건 내 창작이 아니라, 절에가서 중들에게 물어보면 이렇다고 공히 말하는 내용이다.
물론, 표현은 적절히 현대용어로 바꿔서 했지만...
여기서 쓰는 언어는 전부 장돌뱅이 언어다. 그게 이해를 더 빠르게 해준다.
고상한 언어는 의미전달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싸한 철학용어로 씨부려봤자 이해가 더 어렵다.
대체 인간이 만든 언어로 진리의 무엇을 정의 한다는
것은 애초 엉터리 발상이다. 그냥 나오는대로 씨부리자.
예수는 거기에서 불교 스승들에게 명상을 배웠으며, 참선과 수행의 의미를 알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어느날 문득 득도를 하였다.(뭐 하긴, 해탈은 그렇게 한순간에
오는 것이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예수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구하라 그러면 줄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것이다.
(마 7:7)'
저것은 진리의 말이 맞다. 진리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에 있음이고
자기 성찰을 하다보면 불현듯 그렇게 얻어 진다는 뜻이다. 불가의 돈오돈수 다.
둘은 똑 같은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성찰이란 명상의 의미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란 뜻이다.
저걸 두고 하나님을 믿으며 천국을 찾아서 돌아댕기며 '구하라' 어쩌란 말로 해석하면
안 된다.그렇게 인간들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며 신학대학의 강의다.
예수는 아마 저 세상에서 제자들이 헛소리로 하는 것을 보고 땅을 치고 있을 것이다.
예수, 그가 잘못 가르친 죄도 무지 크다. 아마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젠 아가리 닥치고
산속에 들어가서 묵언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사쿠라 강의가 얼마나 많이 지구상에
해악을 끼친지를 알게 된다면 아마 다시는 주둥아리를 놀리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7장의 그 뒤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은 후세 인간들이 지어낸 쓰레기다.
진리의 세상엔 이런 말이 안 나온다. 이건 진리에 대한 언어가 아니다.
(너희중에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어쩌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않겠느냐..저쩌고...씨부렁 )
이건 후대의 누군가가 인간의 윤리 잣대로 추가해 씨부린 것이다.
이렇듯 진리를 알게되면 옥석과 쓰레기를 구별할 줄 알게 된다. 각설.
암튼 예수는 티벳에서 득도하자 말자 바로 고향으로 간다고 발딱 일어났다.
그의 스승들이 '좀 더 내공을 닦아라'고 만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바락바락 간다고 우겼다.
당시 스승들이 만류한 것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예수가 그때 나서서 고향으로 가서
행해질 미래의 일, 즉 기독교란 종교가 예수로 인해 지구상에 발현하고 그종교가 나아가
훗날 인류 전체에 창궐하여 끼칠 해악을 예견해서인지도 모른다.
과연 목하 기독교는 수십세기동안 종교란 이름으로 지구를 말아 먹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예수가 깨닫자말자 발딱 일어서서 집으로 갔다'고 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렇다.
그는 성질이 무지 급한 인물이었다.
성경에 보면 그의 성격을 알만한 대목이 몇 군데 더 있다.
제자들을 델구 여행을 하다가 며칠을 꼬박 굶었다. 그러다가 저앞에 무화과 나무가 보이자
야호~! 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오잉? ... 무화과 열매는 앞선 나그네들이 다 따먹고
하나도 없었다. 예수는 곧바로 그자리에서 욕하고 저주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
이걸두고 서양의 어느 유명한 철학자는(샤르트르라고 했던가? )
예수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기독교에서 탈퇴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는 알았지 둘은 몰랐다. 철학쟁이는 원래 무식하다.
아는 것이 많은 척 하지만 머리속에는 오만가지 의문 투성이다.
철학으로 진리에 대해 결론 내려진 것은 이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진리를 몸으로 체득해서 아는 자... 그들은 결코 막히는 것이없다. 의문점도 없고...
또한 세상에 거리낌이 없다.
즉, 그들 내면의 세계엔 세상의 규범, 윤리 잣대 따위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윤리라는 건 이념의 산물이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집권용의 사회적 트릭이다.
누차 이야기 하는 거지만 수시로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더 이야기 하자면 또 딴데로 새지만 마저 해 보겠다.
득도한다고 모두 부처처럼 차분하고 진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은 자들은 본성대로 행할 뿐이지, 부처처럼 부처스럽게 되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본성은 개인의 것으로 각자가 소중히 하여 개발해야 할 덕목이다.
그래서 예수는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없음을 씨발씨발 거렸다.
그는 본성에 충실했던 것 뿐이다. 지탄의 대상이 아니며 샤르트르처럼 삐질일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또 진리란 무엇인지 설명해줄만한 힌트가 있다.
그렇다. 본성대로 행하는것,... 이것이 또한 진리의 속성중 하나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부처나 예수나 모두 비슷한 이야길 한 바 있다.
부처 왈: 길 위에서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고 지나가라 잉?.
같은 뜻으로,
예수 왈 : 나를 먹어라. 나를 마셔라. 나를 갈아 마셔삐라.
둘 다 같은 뜻으로 가르쳤다.
나를 알고 깨우치되, 나를 잊고 너 자신의 본성대로 깨우쳐라...뭐 그런 뜻이겠다.
깨달음의 지각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아는데서 온다... 그런 말이다.
진리는 하나다. 그러기에 역대 도사들은 비슷한 말을 자주했다.
같은 의미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했다. 이것도 진리의 말이다.
날 죽여라 하는 위의 도사들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진리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진리 표현 의미를 저절로 알게 된다. 재미도 있게 되고.
목사 나부랑이가 떠드는 내용으로는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
모조리 하나님이 사랑으로 말씀 하신거란다 ㅋㅋㅋㅋ 덮어놓고 믿고 따르란다. ㅎㅎㅎ
그뿐 아니다. 기독교엔 그런 윽박 지르는 것이 무수히 많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죄론>이다. 뭐?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하... 우린 그냥 영문도 모르고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것 뿐이다.
그게 무슨 죄가 되는가?
기독교는 이렇게 인간에게 좌절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세뇌를 시작한다.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나약해진다. 겁주고 불안하게 만든 것이 기독교의 기본 수법이다.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것, 그게 정말 죄악이다.
사람이 죄인이 되면 좌절하고 사랑이 없어진다. 사람에게서 원초적 사랑을 빼앗아 간
것은 다름아닌 기독교다. 그래 놓고 말로는 사랑을 하는 종교라고 떠든다. 참으로 교활하다.
웃기지 않은가?
사랑을 제일 가치로 떠드는 기독교가 사실은 사랑을 박탈해간 종교라는 것이...
그래놓고 또 기독교는 너희는' 남을 판단하지마라(마 7:1)' 라고 가르친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에서 앞의 '남을' 이라는 말을 빼면 진리의 말이된다.
혹은 '남을' 이란 단어를 붙여도 진리의 말이 어느정도 된다.
어찌하던지 간에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에 들어가면 목사는 완전히 남의 다리를 긁고 있다.
옳고 그르고 판단은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고 인간은 하면 안된다 라는 뜻으로 해석하더라.
어디서 저런 얼라들 같은 해석이 나오는지... 쯧쯧.,.
노자 도덕경에 '판단하지 말라' 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이런 말이 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알지만, 이는 아름다움이 아닌기라...)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선(善)을 선이라고 알지만, 이는 선이 아니단다)
아름다움과 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 틀린다. 윤리하고 비슷하다.
미스 코리아가 아프리카에 가면 추녀로 된다.
미스 아프리카가 한국에 오면 구토증이 된다.
부시의 선은 이라크에겐 악이다.
박통시절엔 이북사람들 모두가 빨갱이 였지만
지금은 한민족이고 보듬어 안아야 하는 동포이다.
지구위의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진리이지 니 판단, 내 판단이 틀리면 진리가 아니다.
판단은 분별심에서 온다. 분별심은 마음의 작용에서 온다.
마음이 있는 한, 판단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 뜻의 판단하지 마라이다.
판단하지 마라 라는 말은 마음의 변덕과 간사함을 경계한 것이다.
불가의 무심이 여기에 해당된다.
목사가 설교하는 하느님만이 판단하는 것이고 인간은 판단해서는 안된다가 아니라,
너 자신이 외부 세계에 눈을 돌려 자꾸 현혹되지 말라고 예수는 가르친 것이다.
'판단하지 마라' 는 내면의 자신을 주시하는 방편을 강조한 아주 좋은 법문이다.
해석이 그릇되면 사이비가 탄생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오리지널 주장과 동 떨어진
사이비 집단이다. 원래 예수 오리지널 사운드는 참 좋은 것이었다.
예수 이야긴 틈나는대로 더 이야기 하겠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성격도 급하고, 직설적이고, 또한 긍정어에 능통한 사람이다.
부처는 그 반대로 느긋하고 진득하며 부정어의 달인이다.
여기서 부정어라는 것은, 진리란 전체에 대해 일부분 덜어내어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無, 空, 非 ..등등 . 진리의 세계에서 부정어라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의 말에는 진리의 설명에 오염이 될 건덕지가 적었다.
그러나 예수는 반대였다. 다이렉트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천국으로 들 것이다... 등등..
대부분 직설법이었다.
그 바람에 제자들의 가슴에 울린 파장은 컸을지 몰라도 해석은 여러갈래로
나뉘어지고 오염이 되기 쉬웠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 가르침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다분히 있었다.
이리하라, 저리하라.. 그럼 천국으로 들것이다. ㅋㅋㅋ
( 이 '천국'이란 것을 예수는 표현한 적이 없다. 대신 '신의 왕국'이란 말로 더러 표현한 것으로
안다. 그 뜻은 모두 동양의 진리의 세상, 피안의 세계, 혹은 열반 등등이란 뜻으로 쓴
말인데... 당시 동양의 심오한 뜻이 담긴 그런 표현을 대신할 라틴어가 없었기 때문에
신의 왕국이란 말로 대신해 썼다. 신의 왕국을 천국이란 말로 바꾼것은 한국 기독교에서
지어낸 것이다. 보다 그럴싸하게~~ 보다 더 신격화하여! 그것이 한국 기독교의 문제지)
깨달음과 역대 도사들의 주옥같은 진리의 언어...
알면 누구나 희열을 맛 볼것이요, 시공을 뛰어 넘어 부처와 예수를 바로 만난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다보면 나름대로 한두가지 철학은 가진다.
종교가 없는 일반인들도 그런 철학이 있다. 그중에 어떤것은 진리에 대한 개념화가
안되어서 그렇지 거의 진리에 가까운 나름의 철학이 있다.
대표적인 예)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 하는겨 = 남을 판단하지마라.
그러나 반면, 기독교인들은 어떤가?
그들이야말로 말로는 진리 진리 떠들지만 오히려 교회에 한번도 안 가본 일반인들보다
진리에서 더 멀어져 있다. 하느님의 말을 앞세운 까닭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그토록 세뇌시키는 트릭이었다.
기독교 세뇌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我)가 아닌 남을 앞세운 외부(하느님)의 성찰.... 그게 세뇌의 시작이었다.
나의 고통을 내가 아닌 남(하느님)에게 일임하고 나는 마음을 편하게 내려 놓는 것,
그것에는 일시적으로 자기 정화의 강력한 기운이 있다.
그것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현혹 당했다.
교회에 가서 일시적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 놓은 동안에는 그 사람은 잠시 착해진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는 착해지고 교회만 벗어나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더 이기적
인 사람이 되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일부 독실한 신자들 빼고.)
하느님이 다 떠 안아 주니까 너는 편해져라.
이것이 그토록 사람 미치고 폴짝뛰게 하는 기독교의 전도 수법이었다.
일시적인 안식은 일종의 도피이다. 스스로 진리를 찾지 않는 영원히 비겁한 도피이다.
불교에서는 부처 따위는 찾지말고 자기 자신의 자아의 성찰을 하라고 가르쳤기에
그나마 깨달은 覺者들이 나왔던 것이다. 별것 아닌것 같지만 굉장한 차이가 있다.
정반대의 가르침이다. 역대 기독교에서 단 한명의 깨달은 도사가 나오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렇게 기독교는 진리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더 암흑천지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떠드는 진리는 사람 개개인에게 파고든 가슴속 내면의 진리가 아니라
하느님이란 껍데기를 설정해 놓고 거기에 목을 매는 외부적인 진리다. 그러니
그들은 죽었다 깨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것도 또한 기독교의 한계다. 하느님을
찾는한, 그들은 영원히 진리를 모른다. 영원히 구원 받지 못한다.
(구원이란 말도 오해를 할까봐 다시 말하는데, 구원은 하느님이 심판의 날에 와서
기독교인들을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의 진리의 발견, 그 희열,
그 지복을 의미 하는 것이다. 예수가 구원이란 말을 어떻게 저 따위로 가르쳤는지
의심스런 대목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잘못된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해석을 잘못해서
퍼트린 것으로 보이며 이는 예의 유태인들이 그랬을 거라고 보여진다.
구원의 의미를 정말 교활하게 하느님의 몫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이제부터 확실하게 알자. 구원은 자기 자신만이 한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것이 구원, '진리의 발견'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이런 말을 하면 꼭 기독교 쪽에는 성령이니 성체이니 하는
아리쏭한 가공 단어를 들과나와 반박을 하던데 제발 그런 유치한 얘기는 하지 말기
바란다. 성령이나 성체 같은 것은 가공 단어는 어디까지나 있지도 않은 추상어이며
가정법 전용 단어이므로 공상 추리 소설에나 나와야 적당한 단어이다.
맨날 있다고 치는(가정법 if 문장이다) 천국설, 지옥설이나 성령, 성체 따위의 무의미한
단어로 공상소설을 써서 진실인양 얘기 하지 말기 바란다.
자, 그럼... '예수쟁이는 리플을 달지말것' 1편은 이정도에서 마무리합니다.
더 할까요 말까요? 반응을 봐가며 결정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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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반기련
너무 불교만 치켜세우는 듯한 느낌도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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