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큐슈에서 고조선식? 고인돌 발굴 기사를 보고 관련되어 기존의 연구들을 소개합니다.
사실 고대 일본 열도와 고조선의 관계가 연구가 기존의 연구가 진행이 되었습니다만, 일본 쪽에서도 이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 일본 우익의 반감도 있었겠지만 진보적 지식층 사이에서도 제국주의 시대의
일선 동조론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본능적인 거부감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래의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연구 같은 경우 꽤 오랫동안 정치적인 편견없이 순수하게 학술적으로 평가되어 지지 못했지요. 아래의
구메구니타케의 연구를 보면 큐슈에서 저런 유물이 나오는 것이 신기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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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메 구니다케 교수와 오카 마사오 교수에 의해 밝혀진
일본 고대사의 실체
1. 머리말 2. 구메 구니다케 교수가 밝힌 일본고대사의 뿌리 3. 오카 마사오 교수가 밝힌 일본개국신화의 실체 4. 맺음말 |
1. 머리말
『日本書紀』와 『古事記』에 나오는 일본 개국신화의 신은 天神과 國神으로 구별되며 天神(외래호족)이 일본의 국토에 내려와서 그곳에 原住하던 國神(지방호족)을 정복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天神이 강림한 지방은 이즈모(出雲,시마네현)와 휴가(日向, 규슈 동남부)에 있는 다카치호(高天橞)의 구시푸르봉으로, 이즈모에 내려온 것이 스사노오노미코토이며 휴가에 내려온 것이 니니기노미코토라고 전한다. 이들은 신라인으로 일본의 역사시대를 연 崇神天皇(3세기) 시기에 대국주신의 제사를 그의 아들인 오타다네코(大田田根子)에게 맡겼다는 『日本書紀』의 기록과 대국주신이 스사노오미코토의 아들 또는 5대손이라고 전하는 것을 보아 초기 일본의 국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일본의 개국신으로 추앙받았고, 일본 왕실의 중심신앙은 이와 같은 하늘의 천신들을 받드는 神道이다. 일본 왕실은 지금도 ‘新嘗祭’라는 이름의 韓國神들에 대한 제사를 매년 11월23일에 시행하고 있다. 이는 일본 왕실 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사로 왕실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근간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새로운 천황의 즉위식이 있는 해에 열리는 신상제를 “대상제(大嘗祭)” 라고 하며, 천황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부여 받았음을 나타내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서기 10세기 경에 일본에서는 國風운동이 시작되었고, 1630년부터 국수주의자들인 미도학파에 의해 역사조작이 시작되어 메이지(明治)유신 때부터 본격적인 왜곡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쓰다소우키치 등은 『日本書紀』에 600년의 역사를 추가로 만들어 일본사를 총 2600년의 역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엽 일제군국주의 치하에서도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이세신궁은 본래 단군을 받드는 조선 민족의 모든 신들을 주신으로 제사 모셔온 사당”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로 인해 그는 극단적인 극우 반한세력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카 마사오(岡 正雄, 1898~1982) 교수는 “단군 개국신화를 베껴 쓴 것이 일본 개국신화다”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였다. 두 교수의 연구는 일제 군국주의 皇國神道 역사관을 벗어난 전환점을 제공하였고 학문 연구에 대한 학자적 양심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구메 구니다케 교수가 밝힌 일본고대사의 뿌리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史學會雜誌]에 기고한 [신도는 제천의 고속]이라는 논문에서 “일본의 신도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등, 고조선 당시의 천신 제사인 제천의식을 바탕으로 일본왕실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하늘의 천신들을 그들의 조상신으로 떠받들게 된 일본신도가 본래 일본의 것이 아니고 상고시대 고조선에서 단군을 신앙하던 고조선의 朝鮮神들에 대한 天神 제사양식이 고대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고문헌들을 제시하며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임금이 하늘의 신에게 제사 드리는 국가의 제천대전은 곧 일본왕실에서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신상제라는 국가의 큰 제사를 거행하는 일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일본 천황가 사당인 이세신궁에서 천황이 직접 찾아와서 천신에게 제사 드리고 있는 “이세신궁의 신상제 제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고 본래 부여의 迎鼓神, 고구려의 東盟神, 濊의 舞天神 등등 조선신을 제사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고 천조대신을 주신으로 삼았다”라고 비판했다. 즉 일본왕실에서도 고조선의 韓神 등 조선신들의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연구론은 지금까지 일본 천황가의 이른바 ‘황국신도’의 근간을 흔든 대단한 학술적 고증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개국신인 소전오존(素?烏尊,스사노오노미코토)에 대해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소전오존은 하늘나라(高天原)에서 신라 땅 牛頭山으로 내려간 신라신으로서, 배를 만들어 바다 넘어 일본 이즈모(出雲) 땅으로 건너왔으며, 스전오존이 신라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新羅大明神’으로 숭배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소전오존의 아들로 [古史記]에 “바다에 빛을 비추며 건너온 신”으로 알려진 대국주신 또한 신라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오카 마사오 교수가 밝힌 일본개국신화의 실체
오카 마사오 교수는 1933년에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민족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옛 일본의 문화층]이라는 학위논문에서 단군의 개국신화가 일본 개국신화의 모태였다는 연구 결과를 통하여 고대 일본 역사의 시원을 당당하게 규명했다. 이 논문의 학문적인 경향은 당시 오스트리아 빈학파 민족학의 연구 수법을 기본으로 답습한 선진적인 학구 자세였다.
이를 바탕으로 1949년에 발표한 [日本民族文化の源流と日本國家の形成]에서 “조선의 檀君神話를 보면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3종의 寶器’(천부인)를 주어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한 조선신화를 본 뜬 것이, 일본신화의 ‘3종의 神器’였다. 일본신화는 단군신화와 가야신화를 모태로 삼아 발생했다”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1958년에 일본 역사학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日本民族の起源’에서 “일본 황국신도가 내세운 조상신 천조대신은 최고의 신이 아닌 두 번째 신이며 최고의 신은 高皇産靈尊(다키미무스히노미코토)였다. 천조대신의 신화는 동남아 苗族의 신화를 옮겨왔다. 『일본서기』에서 천손 니니기(니니기노미코토, 瓊瓊杵尊)가 하늘에서 내려온 장소인 산봉우리의 이름을 ‘소호리’(ソホリ)라고 했는데, 이것은 조선어의 왕도(seoul, 서울)의 뜻인 ‘소후루’(蘇伐, 신라의 왕도 소벌, 서라벌) 혹은 ‘소후리’(所夫里, 백제의 왕도 부여의 다른 이름)와 동일어(同一語)이다. 김해 김수로왕 신화에 나오는 봉우리 ‘구지’(龜旨)는 다카치호(高千穗) 봉우리인 ‘구시후루’의 ‘구시’(クシ)와 동일어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단정했다.
4. 맺음말
1948년, 일본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기마민족일본정복설’을 주장하여 일본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4세기 초, 금관가야(임나)가 북규슈로 건너가 그곳을 점령하여 한․왜 연합왕국을 세웠으며, 4세기 말에는 이들이 세토내해를 東進하여 畿內(오사카․나라지방, 고대일본의 수도권)로 들어가 그곳에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의 기원이다”라는 것이다. 북규슈를 점령한 왕은 일본서기의 제10대 崇神천황, 畿內에 야마토정권을 세운 왕은 제15대 應神천황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대륙의 강력한 기마민족연맹체였던 고조선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위만의 배신으로 단군조선의 구세력들은 한반도로 밀려와 열국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 고구려의 세력 확대로 동부여 마저 망한 뒤, 부여 왕실의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 왔다. 그러나 이미 한반도에서 세력을 다졌던 백제, 신라, 가야의 정치 세력과 부딪히게 되었고, 여기서 밀린 세력은 새로운 곳을 개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왜 땅은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이들이 이주하면서 가져간 것은 그들의 역사 문화 철학이었고 이것은 그대로 일본 신도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곧 우리의 국학인 仙道가 일본 神道의 뿌리인 것이다.
일본의 많은 학자들이 한일 고대사의 진실을 파헤쳐 왔으며, 지금도 연구는 계속 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학자들도 한일고대사의 진실을 연구하여 한일관계에 대한 편협적 시각을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