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48975&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 헌재 논리대로라면 을사늑약도, 한일병합도 '유효'다
미디어법 처리 과정 위법하나, 법 효력은 유효하다니...
오늘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내용이 나왔다. 네 개 법안 가운데 핵심 쟁점이었던 신문법과 방송법의 경우 그 처리 과정은 위법하나 법으로서 효력은 유효하다는 취지의 결정이었다. 1996년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고 하니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닌가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한 게 누군데...
법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세세한 법 논리를 알 길이 없으나, 처리 과정에서 위법한 사항이 있었는데도 그 법이 유효하다는 결론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절차상의 하자가 있어도 형식 요건만 충족되면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뜻 아닌가.
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윤리시간에 그토록 배워왔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논리는 이명박 정부나 보수세력이 국민들에게 누누이 해 왔던 주장이다.
작년 쇠고기 파동 때의 촛불시위를 돌아보자. 정부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은 하나같이 민주주의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문제삼았다.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도 그 의견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법과 수단이 적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미디어법을 날치기 통과할 때는 그 논리가 슬그머니 사라졌고 이제는 헌재마저 그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힘이 센 사람은 어떤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다소간 무리한 면이 있더라도 그냥 밀어붙이면 죄다 법적으로 유효한, 헌법에도 위배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논리는 사실 낯설지가 않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장윤석 의원은 YS 시절 서울지검 공안1부장으로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쿠데타는 하극상이고 반란이다. 절차상 분명히 위법한 행위다. 하지만 일단 성공하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검사들의 판단이었다. 그 논리는 지금 헌재의 논리로 이어져 성공한 쿠데타는 헌법적으로도 무효화할 수 없을 것 같다.
헌재 논리대로라면 을사늑약-한일병합도 '유효'
이 논리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우리의 불행한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명확해진다. 헌재의 논리대로라면 1905년의 을사늑약도 절차상 위법하나 헌법적 시각에서 유효한 '조약'이다. 고종황제 이하 온 나라 백성들이 무효라고 주장했던 것은 모두 헛짓에 지나지 않았다.
5년 뒤의 한일병합도 마찬가지다. 총칼로 위협을 했든 말든, 그 과정에 권한 침해가 분명히 있었고 그것은 위법하지만 그렇게 해서 성립된 한일병합은 법적으로 유효하다! 나는 오늘 헌재 결정을 보면서 우리가 더 이상 일본을 상대로 과거사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 국사교과서를 다시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일단 어떻게 해서라도 목표만 달성하면 법적으로 다 유효한 것이니 과정에서 귀찮거나 걸리적거리는 절차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아라, 라고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닌가.
법조계에 그 어떤 고상한 법논리가 있어서 헌재가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면 아무리 정교하고 고상한 논리라 하더라도 한낱 먹물들의 말장난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미디어법의 유효성 여부를 판단할 때 상당수의 재판관이 판단을 유보했다. 헌재는 주어진 헌법의 테두리에서 법적 판단을 내리는 기관이니까 그 테두리를 벗어난 대상에 대해서는 심사를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미디어법은 그런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헌법체계를 완전히 벗어나거나 초월적인 법이 아니다.
재판관의 판단 유보는 '직무유기'
대한민국 헌법은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민주공화국에서는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생명과도 같다. 그리고 그 절차적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이유는 권력의 주체인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협의하고 '합의'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기 위함이다.
민주주의가 쉽지 않은 것은 이처럼 대립하는 의견들 속에서 최선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헌재 재판관들이 위법하다고 판시한 절차상의 문제들은 한마디로 말해 "좀 수고롭더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자기 의견을 펼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과 "그렇게 합의를 거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이 곧 민주적인 의사 처리 과정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방송법의 경우 일사부재의까지 위반했다)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자체를 일부 재판관은 판단할 수 없다고 한 모양이다.
재판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 했으니 지금으로서는 그분들의 양심을 믿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양심이 혹시 헌법재판관으로서 직무유기는 아닌지도 한 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명확한 논리도 없이 판단불가만 남발한다면 헌법재판소의 존재이유는 그만큼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야당 의원들이여 배지부터 던져라
쿠데타는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아예 바꾸는 행위니까 그렇게 바뀐 헌정 속의 검사가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고 한 점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봤을 때는 조금이라도 동정의 여지가 있다. 수도 이전이 위헌이라면서 헌재가 2004년 경국대전이나 관습헌법을 들고 나왔을 때는 그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느라 재판관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불쌍한 생각마저 들었다.
2009년 오늘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 결정은 그런 일말의 동정이나 참신한 논리의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다. 반면에 이 결정의 파장은 적지 않을 것 같다. 그 파장은 심사대상이었던 미디어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자 법치국가로서 대한민국 자체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헌재 결정의 결과로 적어도 대한민국 국회는 더 이상 국민여론을 수렴하고 합의하는 민의의 전당으로서 기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힘 있는 다수당이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법을 통과시켜도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제지할 방법이 없다.
최고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앞장서서 국회를 무력화시켰는데, 더 이상 법이니 질서니 정의니 하는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번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한 야당 국회의원들이여, 그대들이 정말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한다면, 오늘 당장 그 무의미한 금배지부터 집어 던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