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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얼마나 예쁜데. 사진좀 보자."
만약 지금 레리티의 사진을 보여준다면 이 아저씨는 기겁을 하겠지. 애초에 사진도 없지만.
"사진은 없어요."
"재미없구먼. 사귀는거야?"
"사귀는 건 아니고... 친해요."
"흐흐 잘해봐."
이러더니 다른 아르바이트생에게로 갔다. 조금 있으니 혜진이에게도 답장이 왔다.
'다음부터는 비 맞을 일 없도록 수연이랑 친하게 지낼게요.ㅠㅠ'
왠지 내가 무작정 뛰어나간 것이 애같이 느껴졌다. 울컥해서 모든 걸 다 내팽겨칠만큼 책임감이 없지는 않은데...
'내가 미안하지... 그 땐 그냥 울컥해서...'
이렇게 보냈더니 답장은 곧장 도착했다.
'미안하시면 다음에 수연이랑 같이 맛있는거라도 사주세요. 레리티랑 랭보도 데려가게요.'
과연 저런 상황에서 혜진이랑 수연이랑 안 싸울 수 있을까? 의문은 제쳐두고 일단, 대답은..
'그래.'
이렇게 써서 보냈다.
일을 마치고 나는 녹초가 되었다. 레리티 없이 하는 택배 아르바이트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다른 택배 알바생들도 일이 고단했는지 전부 지쳐보였다. 다만, 담배 아저씨만은 아직도 팔팔한지 이마에 맫힌 땀을 훔쳐내고 다른 알바생들 기운 복돋아주기에 바빴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승합차에서 내린 곳은 언제나처럼 혜진이와 수연이가 다니는 여고 근처였다. 난 적당한 슈퍼에 들려서 사과를 산 뒤,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집에 엄마는 없었다. 오늘은 좀 일찍 출근한 것이리라. 식탁에는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식사가 보자기에 덮여 있었다. 그 위에는 엄마가 쓴 듯한 메모가 있었다.
'레리티양이 이런 거 좋아할런지 모르겠다. 식기 전에 같이 먹어.'
난 그 믿을 수 없는 메모를 다시 읽어보았다. 저 메모에 쓰여져 있는 것은 분명 레리티였다. 그냥 레리티도 아닌, 레리티양?이라니. 저런 소름 돋는 칭호가 현대 사회에서 아직까지 잔재했던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 엄마가 레리티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세상에...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 때, 레리티가 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미소지으며 도도하게 등장한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수고했어."
"사과 사왔어."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사과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마법으로 그것을 들더니 봉지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후후 웃으며 '고마워.' 이렇게 대답했다.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 지금은 가뿐하게 나은 것 같아."
다행이네. 레리티는 사과 봉투를 마법으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 엄마가 널 알아?"
"응, 어제 정식으로 인사드렸어. 참 좋으신 사모님이셔. 지적이고 자상하신 분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식탁 의자로 올라가길래 나도 같이 의자에 앉았다.
"수연이가 말한거야? 너에 대해."
식탁보를 치우자, 레리티의 접시에는 계란 토스트와 보온병 하나가 있었고 내 앞에는 따뜻한 밥과 반찬들이 내 주변에 밀집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미역국도 있었다. 딱 봐도, 우리집에 레리티의 노예가 한 명 더 추가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레리티가 말했다.
"아니, 내가 정식으로 인사드렸어."
난 미역국을 한 수저 떠먹고 대답했다.
"왜? 갑자기. 비밀로 하라면서."
레리티는 보온병을 열고 자기 앞에 놓인 컵에 내용물을 따르면서 말했다. 커피였다.
"보니까 좋은 분들 같더라고. 수연이도 그렇고.."
그러면서 컵에 따른 커피를 마법으로 살짝 마셨다.
"수연이랑은 얘기 좀 나눠 봤어?"
"응. 좋은 아이던데."
레리티의 기준에서 좋은 아이란 것은 자신의 시중을 잘 드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인지 순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식사를 끝마친 뒤, 내가 반찬들을 정리하자, 녀석은 빈 접시들을 마법으로 싱크대 속에 넣었다. 그런 뒤, 싱크대 앞에 의자를 놓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더니 싱크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법으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난 저 녀석이 내가 일할 동안 식탁에서 신문을 보며 느긋하게 커피라도 마시고 있을 줄 알았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설거지...를.. 하네?!"
거의 혼잣말처렁 중얼거리자 녀석은 날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도 안하는데 이런 것 쯤은 당연히 해야지. 언제까지 이 집에서 폐만 끼칠 수는 없으니까."
이미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일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샤워를 마치고 내가 나왔을 때, 녀석은 사과를 깎고 있었다. 레리티가 없었다면 온 몸을 벗은채로 물기를 닦아내며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겠지만 녀석 때문에 난 욕실에서 옷을 입고 나와야했다. 녀석은 말했다.
"머리 말리고 사과 먹어."
녀석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절하게 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원래부터 친절했지만 내가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둘은 사과를 먹으며 레리티가 만들어준 커피를 마셨다. 설탕도 넣지 않아서 무척 썼지만 레리티는 그 향을 맡으며 즐기는듯 했다.
"시럽 필요하니?"
녀석이 물어보았지만 그냥 먹기로 했다. '아니..' 이렇게 대답했다. 사과를 먹고 있으니 어젯밤의 피로가 몰려왔다. 눈꺼풀은 무겁다못해 퀭했고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다. 그 때였다. 갑자기 집 현관의 초인종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외치고 안전핀을 걸어둔 뒤, 문을 조금만 열자 그 앞에는 혜진이가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성숙한 여고생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 맞다. 여고생이엇지.
"오빠!"
활기차게 외치며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난 안전핀을 푼 뒤,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와.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라고 말하지 않아도 녀석의 머리 뒤로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녀석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푸른색 털에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갈기가 특징인 레인보우 대쉬였다. 녀석은 대답했다.
"안녕!"
"그래... 안녕."
내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하고 문득 혜진이의 발 밑을 쳐다보았더니 노란색 털에 분홍색 갈기가 돋아나 있는 플러터샤이가 있었다. 녀석은 바닥을 앞발로 긁으며 수줍게 '안녕.. 하세요.' 이랬다.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라서 아마도 저렇게 말했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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