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경: 58세. 직업: 배관공. 당일 제주도에 배관공 잡을 잡아서 첫출근을 위해서 세월호를 타게 됨. 40여명의 학생들을 소방호수와 커튼으로 연결해서 필사적으로 구한 후 심한 부상으로 몇 주간 탈진상태로 입원했다가 이제 겨우 제주도 첫 직장으로 일하러 가면서 해경들의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직무유기를 고발하기 위해서 한겨레에 연락해서 인터뷰를 하게됨. 처음 아이들 구한 후 진도항에 있던 언론사 기자들에게 이런 해경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들을 얘기해줬지만 기자들이 묵살하고 기사에 단 한줄도 안나와서 해경들의 그런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는 심정으로 한겨레에 고발하게 됨.
사고 충격이 상당하지만 그는 진도에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직장이 있는 제주도로 왔다. 휴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배관 설비 기술자인 김씨는 사고 당일 제주도의 한 업체에 취업해 첫 출근을 하던 길이었다. 제주도 공사 현장에서 쓸 차량을 끌고 가야 해서 사고 당일 인천에서 배를 탔다. 그게 세월호였다.
김씨는 4월16일 사고 신고 접수 뒤 진도 앞바다로 출동한 해양경찰청 해양구조대가 너무나 어설프게 대응해 더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커튼과 소방호스를 밧줄로 삼아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동안 구조대원들은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만 보았다는 것이다. 선실 안에 남아 있던 승객들에게 바깥으로 나오라고 해경이 방송을 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해경 구조대원들의 "직무유기" 진도체육관서 방송사 기자에게 말했지만 전혀 전파 타지 않아 실수 반복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에 인터뷰 응하게 된 것
빌라촌 배관설계를 맡게 되어 제주 첫 직장 출근하러 가던 길 사고 직후 커튼과 소방호스로 학생 수십명 구한 뒤에 탈출 밤마다 침몰 때 떠올라 괴로워
-가만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는데 밖으로 나온 이유는 뭔가요?
"처음에 저는 죽을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다못해 바다에 뛰어들면 어떻게 되겠거니 했어요. 그런데 배가 15도 기운 상태로 가만있는 게 아니고 45도까지 기우는 거예요. 사고라는 직감이 들었어요. 더이상 가만있어선 안 될 것 같아 바깥 상황을 파악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바로 선장이 승객들에게 객실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야 했어요. 그러면 수십명은 더 구했을 텐데. 해양경찰 구조선이 곧 도착한다는 방송만 나왔어요."
-나오니까 어떤 상태던가요?
"다행히 제 5층 (선미 쪽) 객실은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배가 왼쪽으로 기운 상태가 되니까 저는 수면으로부터 가장 위쪽에 있게 된 거예요. 바깥으로 탈출하기 좋은 위치였지요. 탈출을 하려고 복도를 걷는데 '아저씨, 아저씨' 하고 (단원고) 애들이 애절하게 부르는 거예요. 순간 아래를 보니 아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배가 기우니까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앉아 있었던 거죠.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아이들 첫마디가 '여기 학생들 많아요. 도와주세요'였어요. 겁에 질려 있었어요. 엉엉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구명조끼는 끈을 단단하게 묶어야 하는데 그냥 걸치고만 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끈을 잘 묶으라고 말도 해주고…. 내가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생들은 몇명이나 있었나요?
"4층에만 100명 정도 있었어요. 내가 왔다갔다 하면서 40여명 정도를 구했으니 나머지 60여명은 못 구한 거죠."
-학생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한 건가요?
"배가 기울어버리니까 바닥이 벽이 된 상황이었어요. 높이가 6m 정도 되는 벽이 생겨버리니까 아이들이 기어 올라올 수가 없었어요. 저와 한 객실을 쓰던 사람들(김씨 외 3명)과 함께 커튼을 찾아 끈처럼 이어서 아이들이 있는 아래로 던졌어요. 아이들이 그걸 붙잡으면 어른들이 끌어올렸어요. 그런데 묶은 커튼이 자꾸 풀어져서 올라오던 애들이 추락하기도 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 소방호스를 찾아서 아래로 던졌어요. 아이들이 자기 구해줄 순번을 기다리면서 얼굴을 내밀던 모습이 기억나요."
-힘들지 않았나요?
"배가 누워버리니까 제가 몸을 지탱할 데가 없었어요. 우리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벽에 몸을 기댄 채 (아이들에게 던져준) 커튼(밧줄)을 겨우 끌어올렸어요."
"소방관이 화재 현장에 도착하면 인명을 구조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구조대원들이 배에 올라타고 나서도 선실 안으로 들어가질 않아요. 이거 직무유기 아닌가요. 배에 올라탄 해경 구조대원들이 저나 다른 어른들과 같이 적어도 배가 완전 침수하기 직전(30여분간)까지만이라도 아이들을 끌어올리기만 했다면 최소 몇십명은 더 구했을 텐데 아무런 장비도 없이 배에 올라타서 그냥 보고 있기만…."
김씨는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자신을 찾아온 두곳의 방송사 기자에게 이러한 부분을 지적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김씨의 이 말은 전파를 타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구조를 위한) 20분을 날려버린 거예요. 진도관제센터에서 세월호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몇십분 날려버리고. 배가 쓰러지고 있다면 얼른 20명이든 50명이든 구조대원들이 빨리 왔어야지요. (뒤늦게나마 도착한) 구조대원들은 잠수가 가능한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왜 도착하자마자 배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지 난 이게 이해가 안 됩니다. 2·3층은 내가 못 가봤지만 4층에는 분명 애들이 많았는데
-5층 객실에서 끌어올린 아이들은 다 살았나요?
"끌어올린 아이들은 다 살았지요. 마지막에 어떤 녀석(단원고 남학생)은 죽다 살아났어요. 이 녀석이 긴장을 했는지 객실에서 끌어올려진 뒤에 배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데 발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질 못하더라고요. 배(세월호)가 뒤집힐 때까지 어선으로 옮겨 타지를 못했어요. 세월호와 함께 녀석이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어요. 저는 녀석이 죽는 줄만 알고 너무 안타까워하는데 가라앉던 배 주변 바닷물 속에서 뭔가 퐁 하고 올라오더라고요. 녀석이었어요. 구명조끼 부력 때문에 바닷속에서 솟아올라온 거죠. (세월호 주변을 벗어나던) 어선을 돌려 녀석을 바다에서 끌어올려 함께 진도로 왔어요. 녀석의 부모가 저녁쯤 진도체육관으로 왔어요. "얘가 죽다 살아난 애예요"라고 부모에게 말해주니 부모가 '감사하다'고 수십번 말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