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이강수를 따로 불러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여기 저기 고참들이 있는데다가, 지금은 내가 막사 주변을 청소하느라 아무래도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 싶었다.
궁금해 죽을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평소처럼 행동했다.
오후 일과가 시작되면서 몇몇 고참들이 내무반 막사 뒤에 모여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윤상병을 심하게 괴롭혔던 김병장이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병장은 심심하면 후임병들 세워놓고 훈련용 대검으로 가슴팍을 쿡쿡 찌르는 놈이다.
병장 1호봉인 그 자식은 생긴 것부터가 재수가 없다.
170이 될까 말까 한 키에 얼굴은 시커멓다.
눈은 양 옆으로 쫙 찢어져 있고, 납작한 코에 왜놈들처럼 윗니가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확히 경상도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놈이다.
난 원래 경상도 사투리를 좋아했는데, 그 자식이 우리 부대로 온 뒤로 경상도 사투리만 들리면 가위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전 부대에서 그 자식이 저지른 사고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 놈의 칼질에 여럿 당했다.
나는 당한 적이 없었는데 김병장에게 당한 부대원들의 공통점은 가슴팍 여기저기에
모기 물린 자국의 크기만큼 피멍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죽은 윤상병도 분명히 그 자국이 남아있었을 텐데, 헌병대 조사관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김병장은 직접적인 사인을 제공한 살인범은 아니어도 가혹행위로 처벌 받을 수도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김병장을 보면서, 안스럽기도 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잘 됐다. 미친 새끼...어디 한 번 콩밥을 먹어봐야 하는데..'
그나저나 내일이면 일병 진급날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기가 막혔다.
내무반 막사 앞에 천막을 두른 임시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우리는 단체로 예를 먼저 갖추고, 개인적으로 한 명씩 돌아가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정사진이 없는 관계로 대신 우리는 그 자리에 윤상병이 사용했던 헬멧과 군복을 올려놓았다.
한달 가까이 생활해 왔지만 아직 우리는 서로간의 정이 없는 것 같았다.
눈물을 보이는 부대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거긴엔 나도 속해 있었다.
한 달이 채 안되는 생활동안 나는 전입 온 부대원들이 내 부대원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몇몇을 제외하고 내 눈엔 아직도 그들이 정신병원에서 집단 탈출한 환자로만 보였다.
마침내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세면장에서 나는 열외된 고참들의 식판를 닦고 있었다.
오늘도 내 옆 우두커니 서서 내가 식판 닦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강수가 말을 건넸다.
"일병 진급 축하드립니다."
"..........."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나의 답변이 없자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20여분 뒤면 고참들이 씻기 위해 다시 이 곳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뭐 알고 있지?"
나는 일부러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물었다.
"뭐 말입니까?"
나는 주변을 잠시 살핀 후 그에게 다시 물었다.
"너 어제 나에게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
그러자 갑자기 이강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또다시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덜컥 겁이 났다.
동시에 괜히 물어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야....너 그런 표정 짓지마. 졸라 무서워 새꺄"
그런데도 그는 그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에겐 약간의 신기가 있습니다."
"뭐?"
오늘도 수세미를 던져야 하는가?
그런데 그의 표정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수세미를 던지기는 거녕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너...그게 무슨 말이야? 귀신이라도 본다는 거야?"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헐.....확 깬다. 내가 지금 무당하고 같이 있는거야?
너 지금 장난치는거지?"
나의 질문에 갑자기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전 무당이 아닙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닙니다."
대드는 듯한 그의 말에 평소같으면 정강이라도 깠을텐데 오히려 나는 주눅들어 있었다.
"그..그럼 뭔데?"
그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얘기를 이어갔다.
"어렸을 때였습니다. 7살 때 아버지와 함께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 벌초를 위해 인근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의 그의 얼굴에서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수세미질을 멈춘 지 오래 되었다.
"추석이 며칠 남았음에도 묘지에는 미리 차례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 몇몇 보였습니다.
주변을 둘러 본 저는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산소에서 인사받을 때 사람이 산소에 올라가냐고 말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례를 지내고 있는 산소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보라고 말했습니다.
제 눈엔 분명히 동그란 산소 봉분 위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는 주변을 들러보신 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지 저를 꾸짖으시며 바쁘니까 장난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전혀 끼어들 순간을 찾지 못했다.
"한 번은 그 해 겨울에 제가 심한 열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6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실인데 그 병실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어른도 있고, 제 또래의 아이들도 있고......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린 제가 병실 문 구석에서 두 아이가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깔깔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간호를 하시던 제 어머니께서 왜 그러냐며 미소 진 얼굴로 제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기 친구들이 놀고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신 어머니는 갑자기 싸늘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제 이름을 부르며 우시는 겁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제가 죽을거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게 계속 보이냐?"
난 어느새 그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 뒤로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였는데 그냥 모르고 지나갔었을 수도 있습니다."
"헐...그나마 다행이군.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그런데 말입니다."
"뭐?"
나는 다시 수세미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숨죽인 말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 이 부대에 낯선 군인들이 돌아다닙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버렸다.
척추를 따라 내려오는 싸늘한 전율.....삭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
나는 정말로 이 자식의 정체를 알고 싶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제 윤상병님은 그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괜히 물어봤다.
아...씨발 모른 척 할 걸.
이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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