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로는 작성이 안되서 그냥 글을 쓸게요, 진짜 게시판이 무주공산 소말리아 된 이후로 글을 안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쓰게 되네요;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周武王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作八條之教, 尚禮義, 富農桑, 外户不閉, 人不為盜. 傳四十餘世, 燕 屬 真番 朝鮮, 始 置吏 築障. 秦 屬 遼東 外徼. 漢初 燕人 滿 王 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 朝鮮為 真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後漢 出入 青幽二州, 遼東 玄菟 二郡 沿革 不常.
동경 요양부는 본디 조선의 땅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자 그는 조선으로 향했고, 무왕은 그를 그 땅의 제후로 봉해 주었다. 기자가 백성들에게 팔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를 알게 되었고, 농사와 양잠으로 크게 부유해진 이후에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년이 지난뒤 연나라가 진번 조선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는데 진秦나라 시기의 요동 바깥에 속했다, 한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이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무제 원봉 3년에 한나라가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을 설치하였고 후한 때에 청주와 유주에 편입되었으나 요동군과 현도군은 그 소속이 일정하지 않았다.
漢末 為 公孫度 所據, 傳子 康 孫 淵 自稱 燕王, 建元紹漢, 魏滅之. 晉 陷 髙麗, 後歸 慕容垂, 子寳 以勾麗王安 為 平州牧 居之.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後為 渤海大氏所有. 大氏 始保 挹婁之東牟山, 武后萬歳通天中 為 契丹盡忠 所逼, 有 乞乞仲象者 度 遼水 自固, 武后 封為 震國公. 傳子 祚榮 建 都邑 自稱 震王, 併吞 海北, 地方五千里, 兵數十萬. 中宗 賜 所都 曰 輝罕州, 封 渤海郡王. 十有二世 至 彛震, 僭號 改元 擬建 宫闕, 有 五京十五府六十二州, 為 遼東盛國. 輝罕州即 故 平壤城也, 號 中京顯徳府.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을 거쳐 손자 공손연에 이르러 스스로 연왕을 자칭하고 소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는 고려를 함락시켰는데 후에 모용수에게 귀속하였다, 그 아들 보는 고구려 왕 안을 평주목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는데 원위元魏 태무제가 그 들의 땅인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으니 이후의 요나라 동경이 바로 이곳이다.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의 대씨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본디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무후 만세통천 연간에 거란 이진충이 핍박을 받고 이에 걸걸중상이 요수를 건너 독립하니 이를 두고 무후가 그를 진국공에 봉하였는데 그 아들 대조영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이라 자칭하였다. 발해가 북쪽으로 기세를 넒히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는데 이에 중종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에 책봉하였지만12대가 지나 대이진 때에 이르러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는 한편 5경 15부 62주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이 홀한주가 바로 이전에 평양성으로 불렸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라고도 한다.
太祖 建國 攻 渤海, 㧞 輝罕城, 俘 其王大諲譔 以為 東丹王國, 立 太子 托雲 為 人皇王 以主之. 神册四年 葺 遼陽故城 以渤海漢户 建東平郡 為 防禦州. 天顯三年 遷 東丹國民 居之, 升 為 南京
요나라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함락하고 발해의 왕 대인선을 사로잡았는데 발해를 동단왕국으로 삼고 태자 도욕을 인황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 4년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유민, 한족으로 동평군을 만들어 방어주로 삼았으며천현 3년 동단국 사람을 옮겨 거처하게 하고 남경으로 승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