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사회는 전근대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그나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사노비가 해방된 것은 소위 갑오개혁 시기입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자유주의 혁명, 미국의 노예해방, 세습노비제가 아니었던 중국 및 일본의
경우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회경제체제를 바라보는 지독한 고정관념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의 노예해방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19세기 초반 영국의 곡물법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시기 영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대륙에서 식량을 수입할 길이 요원하자
국내의 곡물가격을 통제할 목적으로 일명 곡물법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당연히 이는 당시 지주세력(귀족세력)에게 매우 유리한 제도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 곡물법을 폐지해서
대륙의 곡물이 영국으로 들어오게 되면 곡물의 가격이 폭락하게 될 것이므로 이를 계속 유지하려 합니다.
반면 당시 신흥자본가(젠틀맨, 요오먼 등)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생계비가 낮은 수준에 있어야 하므로 곡물가격의 하락을 바라게 되었고 따라서
곡물법의 폐지를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경제학자 리카아도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곡물법이 폐지되게 되었고
이로써 영국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마지막 걸림돌인 지주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신흥부르주아지들이 정치와 경제를 전부 장악하게 됩니다.
쉽게얘기해서, 지주의 입장에서는 쌀값이 비쌀수록 좋고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쌀값이 쌀수록 좋으니까
둘은 결코 양립할수 없고, 자본가가 승리함으로서 비로소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확립되었다는 것이죠.
미국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미국의 산업혁명이 완성된 시기는 "남북전쟁 이후"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어떻게 보면 잘 이해가 안될수도 있습니다. 노예해방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혁명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영국의 곡물법논쟁를 이 경우에 비추어 보면, 미국 노예해방의
엄청난 무게를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미국의 자본가세력(북부)이 지주세력(남부)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현대경제학이론에 비추어 설명해보면,
완전탄력적인 노동공급(멜더스 저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 영국의 17세기 엔클로져운동, 미국 19세기 초 흑인노예의 노동자로의 전환,
한국의 1960년대의 이촌향도, 중국의 1990년대의 농민공출현 등) 하에서 사용자는 시장임금(보통 최저 생계비 수준...)에서
원하는 만큼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을 위해 내전(남북전쟁 : The Civil War)까지 치루었던 것에 대해
경제학적 해석을 덧붙이자면
미국에서는 19세기 초 까지만 하더라도 노예가 주된 (현대경제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생산요소" 중의 하나였다는 얘기가 됩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노예가 경제적 근간이었던 지역들에서 오히려 노예의 신분해방이 급격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마제국의 경우, 노예제도가 급격하게 무너져 농노제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로마의 군사력이 약해지고 노예공급이 줄어들면서 노예를 1회성으로 소모하기 보다는
농지에 예속시키는 것이 "주된 생산요소"의 지속적인 재창출에 유리했기 때문이죠.
한편 같은시기 중동, 중국, 한반도 등지에서는 급격한 노비해방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 지역에서는 노예가 아닌 "자영농이 주된생산요소"였기 때문입니다(경제학자 마르크스는
유럽의 경제체제 발전단계를 노예제, 농노제, 자본주의로 설명하였는데 그로서는 동양의
자영농중심 경제질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물론 권력자의 토지겸병현상이 있긴 했지만 원칙적인 경제의 원동력은 자영농이었고 왕조교체때 마다 끊임없이 자영농중심의 농업경제체제로의
복귀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사례가 고려말(고려가 망하기 몇 년 전 완전말기......) 정도전에 의해 실시되었던 농지개혁이었죠.
이를 통해 조선왕조는 자영농중심의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적 관념에 입각했을때)
건실한 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렇듯 자영농기반의 경제체제하에서는 노비는 주된 생산요소가 아니어서
사회경제적 차원의 대규모 개혁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온정적 관점에서 행해지게 됩니다. 세종시대의 공노비 출산휴가제도 등이 그것이죠.
한편 조선왕조 말에 공노비가 해방된 것이 조선 후기 (동아시아 거의 모든 왕조들의 헬게이트 였던...)토지겸병으로 인해
자영농기반의 경제체제가 문란해지면서 세수확보라는 정책목적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조선왕조는 끊임없이 자영농 기반의 건전한 경제체제를 지향한 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자! 결론을 내려보겠습니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무한정의 (값 싼...) "생산요소"를 확보하기 위해 "노예해방"을 한 "미국"의 경우와
"자영농기반 경제체제 유지를 위한 노력과정"에서 "(예비) 자영농"을 확보하기 위한 "공노비해방" 또는
"사회기술적 근대화 과정(산업혁명화 과정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는 1960년대부터 이루어 집니다)"에서 "만국보편적 기준에 맞는 사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사)노비제 폐지"가
동일선상에서 파악되는 것은, 개화기 당시 조선왕조에게는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닌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리하자면,
첫째, 경제사상적으로 서양의 경제적 자유주의(자본주의)나 동양의 자영농중심주의는 모두 국민경제발전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으므로
성리학적 경제관념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고(물론 자본주의 막대한 생산력과는 비교할수는 없지만...)
둘째, 비교연구적 측면에서 경제적 혁명과정에 있던 미국과 사회적 개혁과정에 있던 조선을 동일선상의 양극단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셋째, 역사인식 측면에서 조선왕조에 대한 몰이해 내지 서구에 대한 사대주의로 인해 조선의 후진성이 지나치게(물론 당시 조선이 후진적 요소가 많은
사회였음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부각시키는 점이 있다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