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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앞으로 흐른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간은 앞으로 흐른다. 열역학 제2법칙을 배우지 않아도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음을 누구나 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살면서 경험하는 주관적 시간은 때로 멈추기도 하고 거슬러 흐르기도 한다. 잊었나 싶으면 떠오르는 옛 기억에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슬프게도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막상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고 만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는 과거를 바꾸려 할수록 현재와 미래가 더욱 엉키는 모습을 통해 시간 앞에 무력한 인간의 처지를 보여준다.
시간이 앞으로 흐르는 건 차라리 다행이다. 아픔과 후회가 과거로 남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허나 현재의 시간에는 과거와 미래가 겹쳐 흐른다. 독립한 성인으로 진로를 모색하며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옛 기억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 잠자리에 든 지 두 시간도 채 안 돼 악몽과 가위에 시달린다. 지난날의 아픔과 앞날에 대한 불안이 더해진 시간의 무게는 홀로 감당하기 버겁다. 떨쳐낼 수 없는 기억들에 진저리를 치며 한참을 울던 어느 새벽,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든다. 리비도와 타나토스, 살고자 하는 나와 죽으려 하는 또 다른 나의 싸움 속에서 아침이 오는 것을 본다. 서서히 밝아오는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며 새삼 시간의 흐름을 선명하게 느낀다.
시간을 느낀 순간
어릴 적 낮과 밤이 바뀌는 하늘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꼈다. 낮에는 눈부시게 파랗던 하늘이 밤만 되면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사는 지구가 뜨거운 태양 주위를 돌면서 팽이처럼 회전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자 눈앞에서 우주가 그려졌다. 머릿속에 우주를 펼쳐놓은 채 밤하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렸다. 깜박이는 별들과 환하게 빛나는 달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밤새도록 하늘만 바라보다 저 멀리서 어스름한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면 곧 해가 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별과 우주에 사로잡혀 여덟 살 무렵부터 천문학자를 꿈꿨다.
SF영화와 백과사전은 호기심을 채워주는 보물창고였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얼른 백과사전을 펼쳤다. 윌리윌리, 허리케인, 지역마다 태풍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며 우리나라가 태풍의 오른쪽에 있으면 태풍이 움직이는 힘과 회전하는 힘이 합쳐져서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배웠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외계인은 있을까? 인간의 원초적인 의문이자 해결되지 않은 과학의 물음들에 이끌려 자연스레 과학의 길로 들어섰다. 어릴 때부터 꿈꿨던 천문우주학과에 들어갔다.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교수님들은 열정적이었고 학생들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별과 은하, 우주를 다루는 천문우주과학에는 정작 우주에 대해 감탄하는 ‘사람’의 자리가 없었다. 물리학 공식과 복잡한 수학, 지루한 관측과 끝없는 보정을 통해 나온 값은 끔찍할 정도로 불확실했다. “<우주비행학 실습> 과목에서는 우주복을 입느냐”는 다른 과 친구의 물음에 “우주로 날아가는 공식을 유도하고 수학 문제를 푼다.”고 답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깊은 방황에 빠졌다. 어릴 적 내 꿈은 그 곳에 없었다. 언제 사라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릴 때는 분명 모든 감각과 관심이 우주를 향해 있었다. ‘꿈’이라는 한 글자에 가슴이 떨려 눈물이 흘렀다.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밤하늘을 보며 하루빨리 대학에 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숨 막히게 크고 넓은 우주 앞에 인간 세상은 시끄럽고 하찮을 뿐이었다. 2006년, 모의고사를 앞두고 흘끗 본 뉴스 속보에서는 경찰과 군인들이 새까맣게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이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최초로 정부가 시위 진압에 군대를 투입한 평택 미군기지 건설 현장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회와 역사에 눈을 뜨자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간 2007년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해였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자 도리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비정규직 부당해고가 일어났다. 2008년에는 한미 FTA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문제로 전국이 들끓었다. 2009년에는 용산에서 재개발에 항의하며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과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특공대가 불에 타 죽었다.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로 20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노동조합은 파업을 벌이다 진압되었다. 2011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이명박 정부의 반값등록금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하던 대학생은 대형마트 기계실에서 질식해 죽었다.
차츰 학과 공부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 비정규직 보호법과 한미 FTA,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강의실과 화장실에 놓아두었다. 반값등록금 실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종로 거리를 뛰어다녔다. 타워크레인에 올라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응원하러 갔다가 경찰 곤봉에 맞아 팔이 부러졌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강행되던 제주 해군기지 건설 현장에서 사지가 들려 연행됐다. 강의실 안과 밖에서 그렇게 다른 시간을 살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학교에서는 여전히 수업과 과제, 실습과 시험이 계속됐다. 교수님들은 말했다. 이쪽 공부에 소질이 없고 연구에 흥미가 없으면 빨리 자기 길을 찾아 떠나라고. 뜻이 없다면 억지로 끌고 갈 수 없으니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으라고. 어려서 우주에 매혹됐던 나는 이제 사회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 방황의 늪에 빠진 나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버리는 시간과 버티는 시간
생각 없이 버리는 시간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하는 시간도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 도서관을 찾기 시작했다. 리포트를 쓰고 시험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책을 읽은 것은 방황의 시기를 버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대학생으로 지낸 5년 동안 600권의 책을 읽었다. 어릴 때는 우주로 향했던 마음이 사회와 역사, 철학과 인간으로 옮겨갔다. 냉철하고 분석적인 과학적 사고 대신 회의와 성찰을 거듭하는 인문학적 사유로 빠져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내게 감히 누군가를 구원할 자격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 결국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려면 고통 속에 괴로워하는 개개인이 우선 스스로의 힘으로 떨쳐 일어나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언가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바로 서야 했다. 우주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인간으로 관심사는 바뀌었지만 책을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깨우치는 것이 나를 이끌어 온 삶의 방식이었다. 이 방향으로 내 길을 찾아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만이 나를 구하면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5년을 버틴 끝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NASA의 연구책임자 입장에서 새로운 우주탐사 미션을 설계하는 과목이었다. 이 탐사가 왜 필요한지, 과학적인 목적과 기대 효과는 무엇인지, 이 프로젝트를 지원하면 정부와 사회와 국민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했다. “여러분이 연구자가 된다면 이러한 연구 기획과 프로젝트 설계를 숱하게 해야 한다. 과학자는 골방에 처박혀 공부만 할 게 아니라 연구에 돈을 대는 정부와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사회에 그 성과를 내놓고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았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천문우주과학에서 과학기술정책으로 길을 틀었다. 방황을 거듭했던 대학 시절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았다. 대학원 면접에서 “학문은 집을 짓는 것인데 벽돌이 썩어 있으면 그 집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에 “썩은 벽돌은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짓겠다.”고 답했다.
대학원에 들어온 지도 어느새 3년이 흘렀다. 석·박사 통합과정을 수료했고 전문연구요원 복무가 시작되었다. 박사학위를 받아야 공부로 밥벌이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학위를 받으려면 독립된 연구자로서의 문제의식과 연구 역량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방황이 끝나지 않았다. 좁은 주제, 한정된 범위 안에서 통제된 변수들의 관계를 밝히는 무미건조한 논문에서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인간적인 모습, 삶에 대한 열정과 회한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아직은 더 좋다. 논문을 쓰려면 책을 끊어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염려와 딴 짓 좀 그만 하고 논문에 집중하라는 지도교수님의 타박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다. 습관은 무서운 법이다.
모든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정책으로 전공을 바꾼 뒤에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회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다. 정책은 정부가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과연 사회는 누군가의 의도와 의지대로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지금의 사회는 과거의 누군가가 원했던 모습인가? 지금과 다른 사회를 꿈꿨던 사람들의 소망은 어디로 갔는가? 도대체 인간은 사회 변화를 얼마나 유도할 수 있고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가? 의문은 끝이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사회도 승자의 소망만이 구현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회구조가 반드시 최고이자 최선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현재의 구조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제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사회란 있을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치열한 논쟁과 실천이 필요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회를 누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했던 서구 사회에 비해 왕조국가, 식민지배, 독재정권을 겪은 한반도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제대로 싹트지 못한 듯하다.
모든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학문은 시간을 중요한 변수로 본다. 손에 잡히는 물질과 통제 가능한 변인들로 이루어진 실험이라도 행위가 결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실험과학에서는 반응 속도를 조절하는 촉매의 역할이 중요하다. 천문우주과학의 재료인 별과 은하, 우주는 실험실에서 조작하거나 재현할 수 없다. 그래서 각각의 진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값들을 바꿔 가며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고 관찰하는 시뮬레이션 기법이 사용된다.
정책학은 자연과학과 다르다. 정책을 이루는 것은 시스템과 제도, 돈과 사람, 그리고 시간이다. 정책은 실제 사회와 현실 속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계되고 집행된다. 정책은 기획과 설계, 집행과 점검, 평가와 개선의 주기를 가지며 이것의 반복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정책의 시간적 범위는 수개월에서 수년,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며 정책의 실행이 반드시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것도 아니다. 과학 실험은 잘못되면 다시 할 수 있지만 한 번 실시된 정책은 중단할 수는 있어도 결코 없던 일이 될 수 없다. 정책이나 제도를 폐지하더라도 사람과 돈이 그것을 따라 움직인 흔적과 관성은 남는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욕망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정책은 매우 신중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policy)은 정치(politics)의 재료이자 산물이다. 정책은 정부 권력에는 정당성을, 정당 활동에는 경쟁력을 부여함으로써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의 일부가 된다. 어떤 정책이든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이 있다. 정책의 본질은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유연하게 조율하여 바람직한 사회변화를 유도하는 데에 있다. 합리적인 설명과 끈질긴 설득이, 때로는 과감한 결단과 엄정한 집행이 필요하다.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정책연구를 업으로 삼기에 우리나라의 풍토는 답답한 점이 많다.
과학기술정책학에서 과학기술정치학으로
특히 과학기술 분야는 정부가 이끌어 온 역사가 길다. 아무리 군사독재를 비판하더라도 한국의 압축적인 경제성장에서 정부 주도적 과학기술 및 산업 육성 정책의 역할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여전히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연구에 필요한 돈과 장비, 사람을 모두 정부가 통제하기에 과학기술 현장은 정부의 입김에 너무도 큰 영향을 받는다. 과학기술정책도 치열한 논쟁을 거쳐 나온 합리적인 대안이라기보다 정치 논리와 부처 간 힘겨루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이 분야에서 정부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거나 집권여당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논문은 쓸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정책 논문과 연구자들은 정치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무색무취,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다. 뚜렷한 정치적 입장이 드러난 논문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허나 이렇게 인위적으로 탈색된 과학기술정책학계는 사실 지극히 정치적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녹색성장이 우리의 비전이라고 말했을 법한 학자와 교수들이 지금은 창조경제 전도사가 되어 여기저기 강연을 다닌다. 그들의 ‘먹고사니즘’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처럼 정치에 민감하면서 비정치의 가면을 쓰는 모순은 씁쓸하기만 하다.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데 한 청중으로부터 연구의 배경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듣자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정치적 배경이 없는 정책 연구, 사회적 맥락이 없는 사회과학 연구란 가능한가? 지금의 사회 구조와 정부 활동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속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는 것이 정책 연구의 목적이다. 정치적 맥락을 제거한 정책 연구는 학문적 순수도 정치적 중립도 아닌 체제에 대한 복종일 뿐이다. 학자도 직업이라 밥벌이를 위해 하는 일이니 모두가 목숨 걸고 권력과 싸우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국민 세금으로 연구하고 월급을 받는다면 소수 기득권보다는 다수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논문을 써야 하지 않는가?
정치 논리와 정부 입김에 휘둘리는 과학기술정책은 눈가리개로 옆을 가린 경주마나 코뚜레에 꿰어 끌려가는 소와 다를 바 없다. 국제정세와 사회 환경은 역동적으로 변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 또한 민감하게 변화한다.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들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시민들의 관심과 견제 아래 바람직한 방향을 잡아가지 않는다면 과학기술은 통제와 억압, 착취와 불평등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파놉티콘과 빅브라더는 멀리 있지 않다.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을 논하던 시대는 지났다. 인위적으로 탈색된 채 정부의 입장만 대변하는 무기력한 과학기술정책은 사회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무겁게 성찰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과학기술정치학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어떤 상황에 있고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 가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성찰하고 논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책상을 치며 4차 산업혁명과 사물인터넷, 인공지능의 시대를 부르짖어도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시간의 길이
내가 박사학위 주제로 관심을 가진 분야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사회기술시스템 전환’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돌아가는 산업자본주의는 천연자원과 화석연료를 태워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온실기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로 인한 자원고갈과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감소는 인류 문명의 토대를 무너뜨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정치경제와 과학기술, 사회문화 전반에서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무겁게 느낀다. 기후변화가 심해질수록 가장 가난한 사람들부터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높고 튼튼한 건물 속에서 밤낮으로 에어컨과 히터를 틀어대는 사람들은 아무리 심한 더위와 추위, 태풍과 폭설이 몰아쳐도 크게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전한 집과 충분한 에너지를 갖기 어려운 사람들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날씨에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에너지와 기후에도 정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정부는 여전히 찍어 누르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해마다 쏟아내는 기술개발 사업과 산업육성 계획, 규제 제도 개선안이 그것이다. 정부가 무슨 계획을 발표했다는 기사에는 ‘이번에는 또 누가 얼마를 받아먹었느냐’, ‘그것이 창조경제냐’는 비난이 줄을 잇는다. 국민을 믿지 않는 정부, 정부를 믿을 수 없는 국민. 우리는 긴 세월을 이렇게 보내 왔다. 국가 차원의 산업 육성과 제도 변화도 필요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고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을 이끌어내는 양방향의 정책이 필요하다.
한편 국제 사회는 실효성 없는 논의만 되풀이하고 있다. UN은 이미 기후변화 ‘방지’가 아닌 ‘적응’을 말하고 있다. 지금껏 뿜어 댄 온실기체로 인해 이번 세기 안에 지구의 평균 기온이 섭씨 2도 이상 오르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뒤늦게 배출권거래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지만 어느 나라도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 나서지 않는다. 지구 어디에서든 결국 ‘사람’이 움직여 일한다. 사실상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통제할 자격과 권한이 있겠는가. ‘신의 회초리’라도 있지 않다면 말이다. “감축 목표를 각자 제출하고 알아서 시행하고 5년마다 결과를 내놓자”는 협의가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해결책은 기술뿐이라는 것으로 결론이 모인다. 그러나 기술이 산업이 되고 소비자들의 일상생활에 녹아들어 사회문화를 바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화로 인해 죽어갈지 두렵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 한 사람의 걱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엇을 연구하여 어떤 논문을 써야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막막하다.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내 아이만큼은 지금보다 덜 위험한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나부터 습관을 바꾸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오늘도 너무 많은 물과 에너지를 쓰고 온갖 쓰레기를 배출하며 산다.
시간이 흘러도 남는 것
목숨이 끊어져도 사람은 무언가를 남긴다. 더불어 웃고 울며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흔적으로 남는다. 폭군과 독재자, 살인마나 전범 등 인류에 해를 끼친 사람은 나쁘게 기억된다. 선군과 혁명가, 인류에 감동을 준 예술가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은 좋게 기억된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생의 흔적을 남길 가능성이 높다. 드물게는 오랫동안 역사에 이름이 남기도 한다. 나는 무엇을 남긴 사람으로 기록될지 걱정이다.
학자는 결국 글로써 지식과 관점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글로 먹고 살고 싸워도 글로 싸운다. 외국의 논문을 보면 연구자의 정치적 관점과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낸 논문이 꽤 있다. 다양한 관점의 학회와 학술지가 있어 비슷한 시각의 연구자들이 모이거나 때로는 다른 입장을 가진 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한다. 연구와 이론의 발표, 다른 연구자의 비판과 반박, 원저자의 변론과 반격을 통해 발전하는 외국의 학문을 보고 있으면 우아하기까지 하다. 칸트, 프로이트,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등 뛰어난 학자의 삶 자체에 대한 연구와 전기 출판도 활발하다. 학문하는 사람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며, 때로는 비판하고 질책할 수 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논문은 어떤가. ‘모 부처 또는 기관의 과제를 받아 수행하였다.’가 연구 배경이고 ‘외국은 이러한 연구가 활발한데 우리는 뒤처지거나 없어서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게 연구의 필요성이다. 선행 연구는 외국 학자들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거나 국내에서 관련된 논문을 낸 사람들의 이름만 나열한다. 연구 방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향후 연구 과제를 도출하였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를 통해 경제성장과 창조경제 실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결론에 이르면 허무하다 못해 애잔하다.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것인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우리 사회와 공동체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글이 엉망진창이다. 주술호응도 맞지 않으면서 어려운 단어들만 계속 늘어놓는다. 분량을 채우려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유식하게 보이려는지 한 문장으로 서너 줄, 심지어 문단 전체를 채우는 경우도 있다. 기본적인 맞춤법과 띄어쓰기조차 맞지 않는 것을 보면 이게 대한민국 박사와 교수들의 수준인가 싶어 안타깝다. 짜깁기와 표절, 논문 대필과 학생 논문 가로채기는 심심찮게 기사로 나오니 연구 윤리의 부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딜 가나 경력과 실적이 필요한 한국 사회에서 자기 이름을 앞에 올린 논문이 많을수록 유리하긴 하겠다. 허나 논문과 이름은 기록으로 남는다. 모국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엉망으로 쓴 논문과 단 한 번도 읽히지도 인용되지도 않는 논문 중 어느 쪽이 더 부끄러울지 모르겠다. 나는 나의 무지와 편견이 무섭고 낯 뜨거워 말 한 마디도 망설이는데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많은 것들을 내뱉고 산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아진다면 우리의 학문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의 더께와 학문의 무게
내 몸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 온 시간은 28년 7개월쯤 된다. 허나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기 위해 137억 년의 우주 진화와 40억 년의 생명 진화가 있었음을 안다. 100만 년 전부터 두 발로 걷는 슬기로운 사람들이 문명을 이루기 시작했음을 안다. 2천5백 년 전 홀로 도를 깨우친 사람과 2천 년 전 모든 인간의 죄를 끌어안고 목숨을 바친 사람이 있었음을 안다.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지나친 발전이 이제는 도리어 위협이 되고 있음을 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간신히 봉합하고 ‘지구촌’을 이루었지만 전 인류를 결딴낼 핵전쟁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안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류를 지배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의 작은 반도에 곰을 따르는 민족이 터를 잡고 5천 년을 살아왔음을 안다. 오랜 세월 잦은 침략과 전쟁으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었으며 제국의 군대에 끌려 간 소녀들은 처참하게 유린당했음을 안다. 이념에 눈이 멀어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였으며 목숨을 잃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뿐 권력을 잡은 이들은 대를 이어 권력을 누리고 있음을 안다.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정권을 차지하여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하루아침에 사형시켜버렸음을 안다. 권력자가 부하의 총에 죽자 또 다른 군인이 권력을 쥐기 위해 수천 명의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음을 안다. 학살을 지휘하여 권력을 잡았던 자는 아직도 살아서 은밀한 권력을 행사하며 대대손손 호사를 누리고 있음을 안다. 이제는 돈이 최고의 권력이자 계급이 되었으며 돈이 없는 자는 모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안다.
100년 전의 식민 지배와 50년 전 군사 독재의 망령이 끈질기게도 힘을 잃지 않는 이 시대에 한 편의 논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돈이 없어 일가족이 목숨을 끊고 취직이 어려워 청년들이 목숨을 끊고 낙오자가 될까 두려워 아이들이 목숨을 끊는 우울한 사회에서.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정보기관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해도 진상조차 밝힐 수 없는 허울뿐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배가 뒤집혀 300명이 차가운 바닷물에 가라앉아도 단 한 명도 살려서 구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나라에서. 당신들의 논문은, 우리들의 학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매년 수많은 학회에서 발표되고 쌓여가는 수천, 수만 건의 논문들은 한국 사회를, 인류 문명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데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석사논문은 아무도 읽지 않으며 박사논문은 냄비 받침으로 쓰인다는 말에 학문하는 이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까. 화려한 분석기법들과 정교한 모델들로 무장한 수많은 논문들이 결국 기득권과 구체제를 지키기 위한 숫자놀음과 말장난은 아닌가. 그 많은 실험과 이론, 통계와 설문들은 무엇을 밝히고자 무엇에 눈 감고 있는가. 수만 편의 논문을 쓰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한 줌이라도 도움이 되고 있는가.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학문을 한다는 모든 이들에게 나는 감히 묻는다.
다시, 나의 시간이다.
모두들 저마다의 시간을 산다. 가만히 흘려보낼 수도, 부지런히 채울 수도 있는 것이 시간이다. 앞서 내가 뭉뚱그려 비판한 사람들 대부분은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을 거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말하기에 나는 아직 어리고 얕다. 그래도 내 나름의 무게를 짊어지며 나의 시간을 살아왔다. 역사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 이성의 진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어느 것 하나 또렷하게 보이는 건 없다. 그럼에도 늘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글로 쓰며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나의 시간을 채워간다.
대학원에 들어온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논문을 쓰지 못했다. 학부는 졸업논문을 요구하지 않았고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석사학위 논문 없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구과제와 관련하여 짤막한 논문에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을 뿐 주저자로 쓴 논문은 없다. 학술대회에서 두 번의 발표를 했지만 많은 비판을 받고 나니 손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 단 한 편의 논문도 쓰지 못할지 모른다. 제도권 학계에 써내는 논문이 과연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짓 위에 인생을 세울 수는 없다. 사람은 죽어도 흔적은 남는다. 부끄러운 흔적을 더하며 살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잊혀질 권리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멋모르고 세상에 남겨 온 흔적들을 갑작스레 마주하는 순간에는 당혹감을 감출 길이 없다. 내 글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내 연구가 옳고 유의미하다고 주장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하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글을 쓰지 못할 거라면 내 이름으로 논문을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연구들이 모여 조금씩 더 나은 지식과 학문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안다. 한 명의 천재로 인해 발전하는 학문은 이제 없다거나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고 읽을수록 모르는 것만 쌓여간다. 학창시절의 열정은 오랜 시간 방황하며 식어버린 지 오래다.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할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수십만 건의 논문들을 보면 공허하기만 하다. 책에서는 감동과 희열을 많이 느꼈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는 논문은 아직 한 편도 만나지 못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논문, 치열한 논쟁과 실천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학문이 필요하다.
좁은 시야와 아집 속에 숨어 나의 무능과 게으름을 당돌한 비판으로 포장한 이 글이 텍스트의 홍수에 공해를 더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지나치게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려 하거나 구체적인 것은 무엇도 시도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태도가 연구의 걸림돌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결국 학문은 내 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을 믿는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쓰며 시간 속을 걷는다. 내 발걸음이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지는 몰라도.
-마침-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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