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이 사람은 고교때 정말 공부를 잘했습니다.
반에서 1등은 물론 맡아놓은 자리였고
전교에서 10등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하고 얘기하면서 고등학교때 얘기를 하면 늘 반에서 10등안에
들어본 적이 없었던 저는 좀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그런데 으례히 그 또래 공부좀 한답시는 아이들이 그랬듯이
그는 좀 건방진 구석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때 담임선생이 반장을 하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
숙정이니 뭐니 해서 뒤숭숭할 때였는데 일체의 선거를 포함한
단체행동이 금지되었고 따라서 반장조차 담임이 지명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사람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반장을 맡게되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죠. 담임선생이 어처구니가 없어 강압적으로 시키려
하자 그의 어머니 힘을 빌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킵니다.
어머니가 담임선생을 찾아가서 간곡한 회유(bribe)와 압력을 넣은 결과죠.
"그때 그 담임선생이 참 멍청했어. 그런 사람이 담임을 했으니 나도 재수
가 없었지.."
그의 말입니다.
그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 서울대 법대였습니다.
친구관계를 비롯한 일체의 시간을 코피터지며 공부에 매달렸지만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그에게도 그 관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나 봅니다.
학력고사 점수가 잘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 점수도 낮은 점수는 아니어서
웬만한 서울의 4년제 대학의 인기학과는 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서울대 법대를 고집합니다.
담임이 아무리 설득하고 때리고 말렸어도 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아 떨어져도 내가 떨어지는데 담임이 무슨 상관이야! 내 인생이지 지 인생이야?"
이렇게 악을악을쓰며 담임선생과 싸웠더랍니다.
이렇게 나오는 학생은 담임 아니라 교장이라도 못 당합니다. 결국 서울대 법대에
원서를 집어넣었고 결과는 당연히 낙방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당시 대학입시라는것이 시장에서 뺑뺑이돌려
찍는 뽑기보다 못한것이어서 입시원서 창구에서 즉석으로 전공이 바뀌기도
했습니다.
좀 있는집 자식들은 그당시 처음 나오기 시작했던 빨래방망이 만한
무선전화기로 무장한 눈치작전부대를 동원, 미리 학교장 직인을 찍고
전공란은 공백으로 남겨둔 "백지원서"를 여러장 만들어 배포한다음,
신속한 정보망을 통해 정원이 미달된 과에 즉석에서 전공을 적어넣어
접수했습니다.
좀 없다싶은 애들은 나름대로 동생과 친구들을 동원하여 공중전화를
점거하여 눈치작전을 폈습니다. 그러다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학생의
눈치부대와 무력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학생 자신이 지원한 학교와 학과를 지원마감일이 지나도록 본인도
모르는 웃지못할일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정말 그당시 대학입학 원서접수일은 국가적으로 대 변란이라도 일어난것처럼
나라 전체가 떠들썩 했습니다.
그는 쓰라린 패배감을 안고 재수를 합니다.
재수후 다시 학력고사를 보았으나 점수가 지난해 보다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서울대 법대는 그 점수가지고는 어려웠습니다. 공부에는 귀신이라는 사람이
일년을 더 공부 했는데 점수가 더 안나오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대부분의 낙방생들이 그러하듯이, 아니, 오히려 자신만만했던 학생이 낙방하면
더 실망하듯이 적지않은 시간을 방황으로 보내버렸더군요.
안되겠다 싶어 고려대를 들어갑니다. 참나.. 저는 고려대는 하늘같이만
보였었는데 점수가 안되어 할수없이 들어간 학교가 "고작" 고려대라니..
전공도 인기학과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자신이 초라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때 같이 난다긴다 하던 놈들은 지금 서울대 법대에서 법관의 꿈을
키우고 있는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한창이던 어느 봄날, 그는 마침내 휴학을 합니다.
그리고는 입시전문 학원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삼수생활하는 1년내내,
집에서는 학교를 계속 잘 다니고 있는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영장이 나왔지만 예상대로 심한 평발로 인해 면제처리 되었습니다)
세번째 본 학력고사 점수는 그런대로 지난해 보다는 잘 나왔지만 서울대 법대를
지원하기에는 좀 아슬아슬한 점수였습니다. 연세대나 고려대 법대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삼수를 한 사실을 알고 충격이 컸지만 이왕 이렇게 된것
인생의 꿈을 위해서 한것이니 용서를 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는
낙방의 위험이 있으니 그래도 일류대 소리를 듣는 고려대나 연세대 법대에 지원할
것을 권합니다.
그는 외면을 하며 말합니다.
"고작 연고대 가려고 맘먹었으면 내가 공부하지도 않았다."
(이런 제길.. 그럼 난 뭐냐)
그러나 그는 집념을 버리지 않고 서울대 법대를 지원합니다.
그리고........... 또 낙방을 하였습니다.
눈물로 몇날 몇밤을 지샌 그는 축 늘어진 어깨로 복학 신청을 합니다.
수강신청을 건성건성하고 학교를 나갔지만 재미가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일류가 아닌것하고는 얘기하는것 조차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신이 일류가 아닌것들 틈에 끼어있다는 것 자체가 죽고싶도록
혐오스러웠습니다.
무단결석과 휴학, 그리고 하루에 두갑씩 피워대던 담배가 인이 박힐즈음
그럭저럭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그런 학교생활로 졸업 학점이 될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어머니와
누나가 담당교수를 찾아가서 눈물로 호소하여 겨우겨우 졸업할수 있었습니다.
입학한지 7년만의 졸업이었습니다.
졸업후 그래도 일류대를 나왔다고 어찌어찌해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알만한 대기업 계열회사의 마케팅 부서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누구누구가 이번에 사시에 패스해서 연수원에 있다거나
변호사 개업을 했다든지 검사임용이 되었다든지 하는 소식에만 관심이 갑니다.
영감님 영감님 하면서 주위에 나이먹은 사람들이 아첨을 하더라는 소리와
어딜 가더라도 칙사대접을 받는다는 소식에 매일 회사근처 허름한 식당에서
밥먹어가며 야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초라해보일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회사생활은 지옥같은 생활의 연속이었고, 줄담배를 피우며 인상
팍팍쓰고 있는 그에게 누구하나 그에게 말을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우두커니 혼자앉아 밥을 먹었고, 상사의 업무지시 외에는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이 손에 잡힐리가 없었고, 업무에
실수가 잦아졌습니다.
얼마후 부장과 싸우고는 부서를 밥먹듯이 전전하며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부서의 부장도 그를 받기를 꺼려했던 것이죠. 승진이 될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얼마안가 부장에게 극도의 모욕적인 질책을 듣고서는 그자리에서
사표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퇴사소식을 듣고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지금같은 시기에 제발로
회사를 관두다니.
어제 모 회사의 마케팅 담당 경력사원 모집광고를 가지고 그를 만났습니다.
지독한 담배냄새가 찌들대로 찌든 그의 방에서 방금 일어난듯한 그와
마주앉았습니다.
방 한구석에 구겨져있는 때에 쩔어 꼬질꼬질한 이불이 그동안의 그의
생활을 설명하는듯 했습니다.
"그래 실업수당 신청은 했어요?"
"아뇨? 그거 저도 받을수 있어요?"
비록 자신이 사표를 낸 경우라도 직장이 멀다거나 신병이 있거나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면 실업수당을 받을수 있습니다. 이 얘기를 해주자
그는 회사사람 그 누구도 그런말을 해주지 않았다며 긴 한숨을 쉬었습니다.
실업수당을 타려면, 퇴직사유를 그에 합당하게 써 넣어서 노동관청에 신고를
해야 합니다. 즉 퇴직의 이유를 어떻게 써넣느냐에 따라서 실직후 다만
몇개월이라도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이 됩니다.
(당시 최장 6개월, 이전 월 평균 임금의 50%,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
서류상 그의 퇴직 사유는 "전직" 입니다. 그래서 실업수당 대상자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퇴직 신청서를 낼때 부서의 여직원이 퇴직사유가 뭐냐고
묻길래, 딱이 생각나는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부장이 꼴보기 싫어서라고
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나가서 장사하려고 그런다고 했더니
두말없이 그렇게 써 주더랍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그는 철저히 자신을 고립시키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 결혼도 물론 안했고, 가진돈도
없으며, 더우기 실업자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만 천만원 남짓한
퇴직금이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서른 중반이 가까운 나이에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으며
반찬 타박이나 하는 룸펜이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이제 연로하셔서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이며 따라서 그의 형과 출가한 누나가 한달에
몇십만원씩 보조해주는 상태입니다.
내가 구인광고를 주며 한번 시도해보라고 하자 놀랍게도 그는 별로 취직할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법고시 준비를 하는 모양인지 옆에는
법전과 각종 두터운 참고서들이 무겁게 쌓여있더군요.
제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법관이 되려고 합니까?"
"글쎄.. 옛날부터 되려고 맘먹었기 때문이죠. 힘있고, 권력있고, 하다못해
변호사 개업이라도 하면 떵떵거리면서 살수 있기 때문이죠.. 누구든지
우러러보고 굽실거리잖아요.. 지금까지 돈때문에 제가 겪었던 고통.. 이해
못하실 겁니다. 돈이 있었다면.. 서울대 법대에 합격할수 있었을겁니다..
좋은 공부방에, 수백짜리 과외 독선생에, 승용차 통학.. 부모몰래 입시학원
다니면서 대학준비해본 사람의 고통을 아마 모르실겁니다.
휴.. 고등학교때 제 친구는 저보다 공부 못하던 놈이 사시 패스해서
지금 변호사 개업해서 벤츠타고다녀요.. 참, 그놈 성적은 내 뒤에서
빌빌대던 놈이.. 참.. 휴..."
저는 구인광고를 가지고 조용히 일어섰습니다.
그의 눈에서 남을 자기 발아래에 꿇어 앉히길 좋아하는, 사람의 포악한
본성을 분명히 읽을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사람이 사법고시에 영원히 합격하지
못하길 간절히 빌었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술집에서 웨이터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동기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와서는 맥주 몇병을 마시고 갔습니다.
다음날, 그 친구는 그 남자에 의해 폭행범으로 몰려 체포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이마에 반창고를 하고 있었고, 내 친구가 그를 마구잡이로
때렸다는, 생전 보지도 못한 증인까지 있었습니다.
돈을 뜯어내기 위한 사기극이었습니다.
그는 검사앞에게 구둣발로 채이고 뺨을 맞아가면서 인생 최대의 모멸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폭행범이 아닌데 폭행범이 분명하다고 그러니 환장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남자와 대질을 해 달라고 해도, 해꼬지 하려고 그런다며 더 흉악한
놈으로 몰아붙이는데 나중에는 내가 정말로 그 남자를 때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답니다.
천신만고끝에 그 남자와 대면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친구는 어금니를
악물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얘기 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가 나같은 놈 어디를 보고 저를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돈없어 술집 아르바이트 하던 놈이요. 혹시, 만에하나 돈때문에
그러셨다면, 잘못봐도 한참 잘못보신 거요. 나, 탈탈 털어봐야 먼지밖에
안나오는 놈이요. 이대로 가면 아저씨는 한푼도 못건지고, 저는 깜빵가는
수밖에 없소... 나 깜빵가면, 우리 어머니 길바닥에 나 앉아야 합니다."
그 친구의 눈빛을 보더니, 이 남자가 "너같은 놈은 콩밥을 먹여야 되지만,
학생이고, 집안도 어렵다니 내 큰맘먹고 봐준다. 에이 퉤퉤."
그리고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 일이 있고나서 몇달동안 충격때문에 고민하다가 제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재작년에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깊은밤, 포장마차에서 그와 씁쓸한 소주를 마시며 그 얘기를 나눈지가
벌서 10년이 넘었군요.
몇달전이던가,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연수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돌렸습니다.
설문지의 내용은 "자신이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즉 성공했다고 생
각하느냐"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수의 연수생들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막 법조인의 문턱에 들어선 그들의 과제는 이제 시작입니다.
억울한사람을 구하고 나쁜 범법자들을 징벌하여 살기좋은 사회를 만드는
중대한 임무가 그들의 어깨에 이제 막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벌써 목표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혹시 그들의 목표는 교과서에 나오는 살기좋은 나라 살기좋은 사회 운운
하는 닭살돋는 유치한 것이 아니라 좀더 윤택한 삶, 남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목표를 절반은 달성한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윤택한 삶과 떵떵거릴수 있는 지위를 목적으로 하는 법관들이
얼마나 공정한 법 집행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부패 공화국이 된 것에 이들이 큰
일조를 한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뛰어난 머리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만큼 남들보다 노력하고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았기에 그럴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당연히 이 사회를 이끌어갈 그룹에 합류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사회적인 지위와 힘을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만 생각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런 위치와 힘을 가지는 것은 물론 당연하지만, 그들에게는 사회를
올바로 이끌어야만 하는 더욱 중요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고등학교때 열심히 공부한 댓가로 일류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대학생은
충분히 그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지만, 그것이 곧 공부안하고도 일류대
학생 신분을 유지할수 있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는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어떤 신분을 얻었다면, 그 신분에 걸맞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 법대 지망생의 허망한 인생을 얘기해 드렸습니다만,
어느것이 행복한 삶인지는 내가 왈가왈부할 성격의 것이 아니겠지요.
다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권력으로 할수 있는것, 돈으로 할수 있는것..
모두다 해봤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어떤
"막강한" 사람의 얘기가 생각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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