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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여도(廣輿圖)’의 요계관방지도. 이 지도에 따르면 선춘령은 두만강 이북으로 표기돼 있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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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김종서가 북방 여진족을 물리치고 |
윤관이 설치한 9성의 위치에 대한 여러 학설. |
▶윤관이 세운 선춘령비(先春嶺碑)는 어디에 있는가?
1107년(예종 2)은 고구려 이래의 우리 민족의 영토가 다시 두만강 이북 만주까지 확장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해다. 윤관(尹瓘)이 동북면의 여진을 물리치고 9성을 설치한 때문이다. 이때 윤관은 여진 정벌 후 선춘령에 고려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이 비는 ‘윤관비(尹瓘碑)’ ‘선춘령비(先春嶺碑)’라고 불렸다.
고려는 여진 정벌 이후 영주-복주-웅주-길주와 공험진에 방어사를 설치하고 행정체계인 주(州)와 진(鎭)을 설치했다. 그러나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은 1109년 7월, 고려는 9성에서 철수했다.
이때 고려가 여진에게 돌려준 9성은 길주-영주-복주-함주-웅주와 숭녕-통태-진양-선화진으로 처음 설치된 9성과는 다르다. 9성 가운데 가장 북단에 위치한 공험진이 빠져 있고 2년 뒤(예종 6)에 공험진을 산성으로 수축했다는 기록을 볼 때, 고려의 영토는 동북 9성 반환 이후에도 여전히 두만강 이북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이 분쟁화가 된 것은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두만강 이북에 대한 영유권을 제기하면서였다. 1403년(태종 3) 명에서 만주지역의 여진에게 관리를 보내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해 여진족을 직접 관할하고 이 지역을 편입하겠다고 통고한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태종은 영춘추관사 하륜(河崙)과 지춘추관사 권근(權近)에게 명해 윤관이 여진을 치고 변경에 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예문관제학 김첨(瞻)을 계품사로 삼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의 여진족은 조선 관할임을 주장했다.
결국 명은 이듬해(태종 4) 10월, 공험진 이남 지역을 조선 영토로 인정한다.
이후 세종도 1433년에 신하들에게 “고려의 윤관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소탕해 9성을 쌓았으므로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명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조선 지도를 보고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고 말했다며,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宗瑞)에게 선춘령비와 9성, 공험진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하라고 명한다.
이와 같은 세종의 영토의식은 당시에 만들어진 지도에도 충실히 반영됐다. 세종의 명을 받은 양성지 등이 1463년(세조 9)에 완성한 ‘동국지도’에는 두만강 이북에 공험진과 선춘령이 뚜렷하게 표시됐을 것이다. 적어도 조선 전기에는 선춘령비가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에 위치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도 조선시대의 이러한 역사 인식과 무관치 않다.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까지가 고려의 영토이자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관이 개척한 공험진을 목표로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세종과 김종서의 6진 개척은 두만강 이북을 넘지 못하고 멈춰서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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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20307&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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