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 때 아니게 ‘인문학의 위기’로 언론들이 설레발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언론이란 물론 조중동 이하 수구언론들을 말한다.
인문학이 고사 직전에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 얘기도 아닌데, 갑자기 인문학 위기 운운하는 것을 보니, 이제 바다이야기, 작통권, 전효숙건 기사는 잘 안 팔리는 모양이다. 또, 위기 위기 하니깐 경제위기니 북핵위기니 안보위기니 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지겹게 들어왔던 레퍼토리가 떠오른다. 참으로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인문학 위기라는데, 돈이 안 되어서 위기인지, 책이 안 팔려서 위기인지, 수강신청인원이 모자라서 위기인지, 인문학의 콘텐츠가 부실해서 위기인지 명확하지 않다. 보아하니, 위기론을 양산하는 ‘조중동이 위기를 떠들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다’라는 역설이 사실인 만큼, 인문학의 위기는 진짜 위기가 아닌 것 같다. 즉, 정작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인문학은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을 말하는 거 같은데, 오호! 그렇다면 인간과 시대정신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던가? 그 핵심은 ‘열림과 소통’이 아니던가? 그러면 한 가지 확인해보자. 인문학을 걱정하는 우리나라 언론들은 열림과 소통을 지향했나? 인문학의 위기에 그들은 정녕 아무 책임도 없단 말인가? “인문학의 부활은 제대로 된 글쓰기로부터”라고 훈장질 하는데 글쓰기 기교가 중요한가, 아니면 글에 담기는 콘텐츠가 중요한가? ‘민족정론지’라고 자칭하는 수구신문들은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기자질 하는가? 그들은 올바른 기자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답변을 제대로,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신문만이 인문학의 위기를 논할 자격이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진정 위기에 빠진 것은 인문학이 아니고, 기자정신이다. 적어도 ‘잃어버린 10년’ 동안의 조중동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진짜로 걱정해야 할 것은 언론자신의 인문학, 기자정신이다. 한 가지씩 살펴보자.
우리나라 언론은 열림과 소통을 지향했나? 오늘날 수구신문들의 영향력은 갈등에서 나온다. 그 갈등이란 남북갈등, 지역갈등, 계층간, 세대간, 이념적 갈등이다. 그들은 안보를 팔아 영향력을 유지한다. 겉으로는 지역통합을 외치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 권력과 돈이 걸렸다 싶으면, ‘우리가 남이가’를 과감히 표제에 걸거나, 최소한 방조한다. 입으로는 서민을 옹호하지만, 기업지배구조 개편에 이른다 싶으면 입에 거품을 문다. 얼떨결에 정권 잡은 ‘나라말아 먹을 철없는 것’들은 50대가 육두문자를 써서라도 가르쳐야 할 대상이다.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색깔론에다 사상검증이다. 결정적으로 신문시장은 왜곡되어 있다. 이런 구도하에서 열림과 소통은 있을 수 없다. 수구들은 열림과 소통의 광장, 길거리응원과 인터넷마저 돈을 들여 장악했다. 소통은 없고 일방적 배설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인문학 위기에 아무 잘못이 없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언론은 반성해야 한다. 그들이 주구장창 강조해왔던 것이 무엇인가? 경제제일주의-정치냉소주의, 재테크, 처세술, 대박, 인생역전, 뭐 이런 것 아니던가?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다’류만 추천하고 권장하면서 어떻게 문학, 역사, 철학을 논한다 말인가? 한번 생각해보자. 언론들이 ‘경제적, 혼자 살아남는 이기적 인간’을 논했는가? 아니면 ‘철학적, 인간적 시민을 지향하는 이타적 인간’을 논했는가? 물론 실시구시나 경제적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재테크를 설교했던 똑같은 입으로 ‘문사철 위기다’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다. 인문학의 위기를 만든 것은 곧 언론 아니던가? 전봇대 잡고 생각해 봐라.
글쓰기 기교가 중요한가, 콘텐츠가 중요한가? 형식(하부구조)은 내용(상부구조)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물론에 해당하는 말이다. 적어도 인간과 시대정신을 지향하는 인문학은 글쓰기 자체보다 글의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 작가 김수현의 글은 기교를 넘어서 현란하기까지 하나, 아쉽게도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philosophy)이 없다. 그저 글 장난뿐이다. 이문열의 소설에서는 사회와 역사를 볼 수 있되, 그것은 항상 거꾸로 매달려 있다. 구시대적 질서에 대한 찬미뿐이다. 마찬가지로 수구언론들은 구질서를 옹호한다. 지난 50년 동안 친일―친미―분단―반공으로 확립된 질서는 절대 선이고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진리이다. 변절한 헤겔의 말대로 그들에겐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이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안보를 불안케 하고, 경제를 망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글은 잘 쓰나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이 없다. 펜놀림은 예술적이나 뇌는 퇴행적이다.
언론들은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기자질 했던가? 기자 에드가 스노우는 1936년 중국의 오지 연안을 방문한다. 홍군 해방구이다. 대장정으로 지리멸렬해진, 한줌도 안 되는 홍군의 아지트를 왜 그는 방문했는가? 대장정이라는 사건자체가 도도한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기자된 사람으로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노우는 ‘중국의 붉은 별’에서 대장정 참가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왜 홍군이 2년간의 대장정과 부패한 국민당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살아남는데 성공할 수밖에 없는가를 냉정히 서술한다. 기자출신 리영희는 서슬 퍼렇던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을 연재했다. 당시의 일반통행적 역사해석과는 달리 그는 베트남 전쟁의 원인은 ‘(베트남―프랑스 전쟁)휴전 후 공정한 총선을 통해 베트남을 통일한다.’는 제네바 조약을 미국과 그 괴뢰정권이 일방적으로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차분히 분석해냈다. 유신시대 반공의 광풍이 불던 당시 그는 투옥을 무릅쓰고, 사이공이 함락되기 훨씬 전에 이 책을 써냈다. 탁월한 역사의식과 시대적 안목이다. 과장도 편견도 왜곡도 없다. 오직 팩트를 가지고 원인을 분석해냈다. 오늘날 ‘할말을 하는’ 기자들은 이런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가진 지사적 인간인가? 아니면 단순한 종업원인가? 답할 수 있는가?
그들은 올바른 기자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지난 15년간 전 세계에서 580명의 기자들이 취재 중 목숨을 잃었다 한다. 편안한 데스크에 앉아서 소설 쓰다 그랬을 리는 없을 테고, 대부분 발로 뛰면서, 생생하게 사건과 현상의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현장(물론 전쟁터가 가장 많다)을 누비다가 죽은 것이다. 취재는 발로, 팩트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자 정신 아닌가? 그런데 수구신문들에서 매일같이 보는 작문, 표절, 과장, 왜곡 등등은 다 무엇인가? 발로 뛰면서 얻은 팩트들은 다 어디 갔나?
여기서 로버트 카파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소개내용을 보자.
로버트 카파에게는 신화라는 수식어가 모자란다. 그는 보도사진의 신이다. 그의 보도철학인 ‘카파이즘’은 위험을 무릅쓰고 생생한 현장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기자정신을 의미하는 말로, 이후 사진 저널리즘의 전설이 됐다. 대문호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에게 이런 헌사를 바쳤다. “카파는 카메라가 차가운 기계에 불과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모든 의심을 넘어 증명해 보였다. 카메라는 펜과 마찬가지로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는 1954년 베트남 전쟁 취재 중 사망했다. 가장 사진기자다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사진은 고스란히 20세기 역사로 남았다. 돌격하던 병사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한 스페인 내전 사진(아래 참조), 피로 물든 노르망디 해변 사진 등은 인류가 지나온 역사를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 카파,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오늘도 데스크에, PC 앞에 편하게 앉아 연일 소설을 써대고 있는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정몽준도 노무현을 버렸다’류의 사설을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싸지르고 계시는 논설위원님들에게 묻고 싶다. 수습기자 시절, 스노우, 리영희, 카파를 배웠나, 안 배웠나?
그렇다고 너무 걱정마라. 당장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의 종군기자로 달려가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것은 기대도 않는다. 다만 기사 쓸 때 발로 뛰고 팩트만 가지고 기자질 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인터넷이나 시중에 떠도는 루머를 듣고 작문하지 말고, 또 말장난 하지 말라는 얘기다. 진지하게 부탁하는데, 제대로 기자질 하려면 제대로 된 역사책, 철학책, 시대적 인간을 담은 문학을 평소 읽으라는 말이다. 추리소설이나 읽지 말고. 시대의 인문학을 걱정하기 전에 기자들 당신들 인문학부터 걱정해라.
진짜 위기는 인문학에 있지 않고, 개판일보 직전의 기자정신에 있다. 뭘 좀 알고 떠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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