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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 이어서
(※ 빡치시는 분이 있으셔서 좀 죄송스럽네요. ㅠ 민감한 부분은 조금 다듬었습니다.)
□ 1592년 선조 25년. 음력 6월 초.
선조는 아직까지 왜적에게 침범 당하지 않은 전라, 충청 일부, 경상 일부 지역의 군사들을 소집, 북진하여 임금을 지킬것을 지속적으로 명령한다. 전라 순찰사 이광(李洸)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정(北征)하여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와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군사와 합류하고 서둘러 임금을 돕기로 한다.
왜구의 피해가 거의 없었던 전라도 쪽 병력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전라 순찰사 이광이 전체 병력을 통솔 하기로 하는데 당시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나 그때 모인 조선군의 병력은 약 4~6만명 정도에서 최대 10 ~ 13만 명까지라는 기록이 있다.
□ 6월 1일. 용인(龍仁) 전투에서 조선 육군이 대패하다.
전라 감사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아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호서(湖西)의 임천(林川)을 경유해서 진격한다.
이광의 입장에서는 선조 임금이 적의 배후를 빨리 치고 한양을 수복하라는 명령 때문에 엄청나게 후달리던 중.
전라도 쪽 병력을 전부 뽑아 올린 덕분에 전라도 내륙은 텅텅 비게 된다.
아무튼 이번 전투는 조기에 난리를 수습 할 실마리를 찾느냐 장기전으로 돌입하느냐의 국운이 달린 문제다.
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 목사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전북 익산) 대로를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넌다. (논산, 천안, 평택, 용인 방향으로 진격 예정)
경상 순찰사 김수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 상황에서 병력을 점령되지 않은 성에 분산 주둔 시켜서 적의 배후에서 지연전만 펼쳤더라도 왜구의 진격 속도가 상당히 늦춰졌을 것이고 또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평안도와 함경도 쪽 군사들을 소집하여 아래, 위로 압박해 들어오면 조선군에게도 어느정도 승산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의 이런 제안을 전라감사 이광은 무시하고 왜구와 전면전을 펼치다가 용인에서 왜구의 주력에게 대패를 하고 만다.
이 전투로 인하여 조선은 상당 기간 제대로된 육군을 규합 하지 못하고 전쟁은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게 됨.
약포집(藥圃集) 6월 1일(기축)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올라와서 행재소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전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으로 서용하였다.
□ 6월 2일.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결심하다.
용인 전투 패배와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소식 후.
임금은 여러 신하들과 결사항전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북쪽으로 피난 가기를 원한다.
이 날 조정의 회의에서 평양을 지켜야 한다는 쪽과 평양을 버리고 더 북쪽으로 가자는 의견이 대립되게 된다.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와중에 선조 임금이 한마디 하신다.
"의논들이 일치하지 않는구나. 내 생각에는 여기 평양이 안전한 지역이 아니니 군신(君臣)이 함께 왜적의 칼날에 어육(魚肉)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이주하고 싶은데 대신들이 따르지 않는구나.”라는 원망을 함. - 선조실록
임금은 피난 가는 길에 백성들이 왜적에게 협조하거나 길을 막아 피난에 차질이 생길 것 만 염려하였고 다른 이야기들은 그저 아뢴데로 하여라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뿐이었다.
이순신이 당포, 당항포, 영등포 등지에서 전라도와 서해안을 점령하려던 왜적의 수군을 차례로 격파한다.
장군은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로 승진한다.
□ 6월 5일. 명(明)나라의 차관(差官) 최세신(崔世臣) · 임세록(林世祿) 등이 적정(賊情)을 탐지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하니, 선조는 흑단령(黑團領)을 입고서 서쪽 행궁(行宮)에서 그들을 접견하다.(이와중에 임금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기록까지 하는 실록의 치밀함이 보인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아무래도 조선이 일본과 한 패로 일을 꾸미는게 아닌가 강한 의심을 하고 있다.
□ 6월 8일. 임진강 방어선이 돌파 당하다.
"왜적들이 와서 대동강 건너편 강변에 출현하였다." - 약포집(藥圃集) 피난행록 6월 8일
임진강 방어선이 왜적에게 완전히 붕괴되고 이미 임진강을 건너 대동강가 까지 왜적의 선발대가 나타났다.
□ 6월 9일.
"대가(大駕)가 영변부(寧邊府)로 떠나려 하자, 본부(本府 평양부)의 군민(軍民)들이 무리를 이루어 길을 막으며 떠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청하여 끝내 대가가 떠나지 못했다." - 약포집(藥圃集) 피난행록 6월 9일
□ 6월 10일. 북쪽으로 피난이 결정됨.
우선 평양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앞서 평양 군민들에게 임금이 평양에 남아 사수하기로 한다고 전달한다.
이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다.
선조 임금과 신하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평양의 백성들이 평양을 사수 하는 동안 잽싸게 평양을 버리기로 합의하고 피난 준비를 서두른다.
백성들의 동태를 찔러보기 위해 왕비 일행을 먼저 함흥으로 출발 시킨다.
그러자 평양 군민들이 왕비의 피난길을 가로 막고 왕비의 몸종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버린다. 도망갈꺼면서 왜 백성들은 불려 들였냐고... 당시 호조 판서(정2품) 홍여순은 이와중에 난동을 부리던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아 허리를 다치기도 했다.
홍여순은 천성이 호걸스럽고 교만하여, 일찍이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다.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려 하니, 그는 집으로 가 행장을 꾸려 호위하려 하였다. 그 때 길가의 난민들이 큰 막대로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하면서, 마구 때렸는데,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는 다른 이에게 오늘 죽을 뻔 하였다고 말하고는 등을 만지며 아픈 것을 참고 앉았다. 이유징이 말하기를,
하였다. - 기재잡기 中
왕비의 피난길은 잠시 보류 되고 거의 폭동 수준으로 변하기 직전의 평양성 내부. 황해도 관찰사 송언신이 난동을 부리던 백성 몇몇을 참수하고서야 겨우 힘겹게 진압 한다.
이날 승정원에서는 임금이 평양을 버리고 떠나면 북쪽으로는 더 이상 지킬만한 큰 성이 없고 평양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백성들을 타이를 명분이 없다고 상소를 올리나 선조 임금은 "적의 예봉을 피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짧막한 답장을 내리고는 피난을 떠난다. - 약포집(藥圃集) 피난행록 6월 10일.
그러나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선조 임금의 다음 행선지가 중국으로의 망명인지, 함경도 깊은 산 중으로 가서 게릴라전을 펼칠 것인지 아니면 왕비를 따라 함흥쪽으로 크게 우회전을 할 지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 6월 11일. 드디어 임금이 평양을 버리고 영변으로 길을 떠나다.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이원익 등에게 평양성을 지키도록 명하고 임금은 북쪽으로 떠났다. 중전은 함흥 쪽으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당일로 평양~순안(順安)~숙천(肅川) 구간(40~50km 정도)을 돌파 하는 사상 초유의 광속 피난을 시전한다.
이날밤. 평양에 남아있던 조선군 100여 명이 몰래 대동강을 꺼꾸로 건너 왜적의 진영을 기습 공격한다.
이때까지 어찌나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제대로된 공격을 한번도 하지 않았길래 최전방의 왜적들이 진영 안에서 전부 보초도 없이 전부 자빠저 자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수 백 명의 왜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 6월 12일. 당상관이 곤장을 맞다.
평양을 떠난 임금의 행렬은 바람처럼 내달려 숙천을 지나 쉬어 갈즈음에 해당 고을의 백성과 아전들이 전부 피난을 가고 없었다.
임금이 안주(安州)의 경계로 넘어가는데 길가에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고 텅빈 고을에 먹을것도 말먹일 풀도 없었다.
임금의 행차가 너무나 급작스럽고 신속하여 안주에서는 왕이 오는지도 몰랐다. 왕의 행선지가 결정되지 않아 그런 모양이다.
덕분에 안주 목사 이민각(李民覺)이 혼자서 나와 영접하는 꼴이 연출되고 그 죄로 곤장 40대를 맞았다고 한다.
이날 먹을 양식도 없는 안주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 6월 13일. 임금이 영변에 도착하다.
영변으로 들어가 보니 그 고을의 꼴도 안주와 다를바 없었다.
"상이 안주에서부터 비를 무릅쓰고 영변부로 들어가니,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고 관인(官人) 5∼6명만 있을 뿐이었다." - <선조실록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이날 왕의 최종 목적지가 결정되다.
영변에서의 선택
이 때 임금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1안. 강계로 가서 험준한 산맥을 의지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다 여의치 않으면 중국으로 넘어가거나 길이 차단되면 함경도 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서 함경도의 병력으로 지연전을 펼치는 방법.
2안. 함흥으로 들어가서 함경도와 평안도의 병력을 기다린 뒤 반격을 하던지 상황에 따라 강원도로 내려오던지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는 방법.
3안. 바로 의주로 가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방법.
아래의 글은 위 세 가지 방법에 대해 선조 임금과 신하들간에 오간 내용을 선조실록에서 그대로 옮겨본다.
(글 중간에 괄호로 부연 설명이 들어갑니다.)
이 날은 3~4차례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임금의 이후 행보에 대해 논의한다.
<선조실록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5번 째 기사>
영변 행궁에서 신하를 인견하고 이어할 곳을 논의하다
<선조실록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6번째기사>
양사가 머무르면서 왜적의 형세를 보아 피하기를 청하다
<선조실록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7번째기사>
출처 | 본인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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