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민주주의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이고 그 반대편에 북한이 있으니까 민주주의의 반댓말은 당연히 공산주의 아니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질문은 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자신을 알게 해준 고마운 계기였다.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가 권력을 가지고 그것을 스스로 행사하는 정치제도' 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 반댓말은 소수의 뛰어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는 제도일 것이다. 이를 엘리트주의라고 한다.
다만,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를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수로만 구별짓기는 힘들다. 소코비아 협정을 결정하는 대통령들도 결국 소수의 권력자들의 모임이다. 핵심은 바로 그 권력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느냐에 달렸다. 117개국 대표들의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나온다. 대중은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대표가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권력을 회수할 수 있다. 그러나 엘리트주의는 다르다. 엘리트의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권력은 스스로의 빼어난 능력에 연원하고 그것에 기반해 힘을 행사한다.
"습관적으로 주권국가의 국경 따위는 무시하면서 어디서든 자신들의 선택을 밀어붙이는데다가, 솔직히 떠나고 난 뒤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미국 출신의 강력한 개개인 집단을 뭐라 부르나?" 이런 썬더볼트 로스의 비아냥거림은 얄미울 만큼 어벤져스의 아픈 부분을 찌르고 있다. 뉴욕, 워싱턴, 소코비아 등 어벤져스는 번번히 전세계적 위협에 대항하여 고군분투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나타난 곳은 어디든 재앙이 따라다녔다. 무소불위의 힘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했고 비극을 초래했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결코 제재를 받는 일은 없었다. 어벤져스의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이양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권력을 회수할 수도 없었다.
대중은 통제 불가능한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어벤져스는 117개국의 감시를 받고, UN의 허가와 지시에 의해 움직일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소코비아 협정을 제시한다. 영웅이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합리적이고 당연한 요구다. 이 협정은 전세계를 상대로 맞짱이 가능할 정도의 막강한 힘을 독점한 엘리트 집단에게 민주적 정당성을 촉구하는 경고장인 셈이다.
엘리트주의의 한계는 여러 독재정권에서 드러난 바 있다. 뛰어난 엘리트들도 결국엔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며 불순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버키는 이런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버키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조종당한 과거가 있다. 지모 대령은 이런 비밀을 미끼로 어벤져스팀의 내분을 유도한다. 지모 대령의 지모(智謀)에 놀아나는 아이언맨 팀과 캡틴 아메리카팀은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엘리트주의의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캡틴 아메리카의 행동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토니의 부모님을 살해한 버키를 맹목적으로 감싸고 끝까지 협정서에 서명하길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오직 자신들만이 정의를 지킬 수 있고 다른 권력자들의 목적은 변질되기 쉽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아이러니컬 하게도 엘리트주의는 민주주의가 꽃피었던 그리스 시대부터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플라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은 인물이었지만 부당한 이유로 기소되었고 무지한 배심원들의 투표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런 끔찍한 기억 탓에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 또는 '폭민정치'라고 폄하했고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물론 여기서 철학자는 철학전공자가 아니라 가장 지혜롭고 덕이 있는 엘리트를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정의로움의 상징인 캡틴 아메리카는 리더의 자리에 꽤나 어울리듯 보인다)
영화 설정상 굉장히 흥미로운 것은 캡틴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철학사적인 측면을 간략히 짚어보면, 중세시대에는 인문, 철학, 과학 등 모든 진리는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믿었고 근대로 넘어오면서 진리를 담지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제 1성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말은 진리를 신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을 통해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만유인력의 발견 등 과학이 발달하고 근대는 인간 이성으로 세상 모든 원리를 밝힐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그런 기대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2차 대전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짓밟는 전체주의, 우생학에 기반한 인종주의 등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들은 결코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았던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문제는 그런 일들이 강요나 강압에 의해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히틀러는 국민들의 자발적 투표를 통해 압도적 지지율로 지도자에 오른 '국민 히어로'였으니까. 즉, 캡틴 아메리카는 2차 대전에서 나치 뿐만아니라 민주주의를 가장한 중우정치, 전체주의와도 싸웠다. 그런 측면에서 합리성을 상실한 이번 시빌워(내전)는 캡틴에게 있어 2차 대전의 재현인 셈이다.
영화로 다시 돌아가 토니 스타크가 캡틴에게 서명하라고 건넨 펜을 떠올려보자. 그 펜이 루즈벨트가 2차 대전에 참전 할 것을 서명할 때 쓴 것이라는 토니 스타크의 설명이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 서명을 통해 캡틴 아메리카가 상징하는 '정의로운 미국'이 2차 대전이라는 시궁창에 발을 담그게 된 것 아닌가.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공항으로 갈때 타고간 클래식 폭스바겐 비틀이다. 비틀 자동차에서 영화의 의도를 좀 더 직접적으로 읽어볼 수 있다. 비틀이 1938년 히틀러와 나치정부 노동부 장관 라이 박사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차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캡틴 아메리카에게 이번 시빌워(내전)는 되돌아온 2차 세계대전의 망령이고 소코비아 협정은 언제든지 중우정치와 파시즘으로 변질될 수 있는 의심스런 족쇄인 셈이다.
이제 약간은 캡틴의 입장이 이해가 갈 법 하다. 어쩌면 주인공인 캡틴을 엘리트주의자로 규정짓는 것이 부당하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언제나 옳은 것이고 엘리트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은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도 중우정치나 다수에 의한 독재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반면 엘리트 정치가 캡틴 아메리카처럼 정의로운 영웅에 의해 구현된다면 가장 이상에 가까운 체제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개인적으로는 냉동인간이 되어 자신의 힘을 스스로 봉인하는 버키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진짜 영웅들이 있다면 정치 한번 맡겨볼만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