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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라는 비석이나 태평환우기,진서 등에 나오는 글들을 가지고 조선을 찾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감탄이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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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③]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고조선 알린 결정적 사료 ‘두로영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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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환우기≫는 노룡현 조항에서 고죽성, 요서성과 함께 조선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죽성 다음에 조선성, 조선성 다음에 요서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죽성 부근에 조선성이 있고 조선성 인근에 요서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조선성이 왜 송나라의 하북도 평주 노룡현 지역에 고죽성, 요서성과 함께 폐성으로 남아있었던 것일까.
≪태평환우기≫의 저자 낙사는 노룡현에 있는 조선성을 소개하면서 “조선성은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 황폐한 성이 남아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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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과 고조선
≪진서≫ 109권 재기(載紀) ‘모용황전’에는 요서에서 활동하던 창려 사람 선비족 모용황이 전쟁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운 공로로 325년 조선공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모용황은 선비족 모용외의 아들로 태어나 요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당시 그의 행동반경은 선비족의 근거지인 오늘의 시라무렌강 상류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어떻게 조선공을 봉할 수 있었을까.
진나라 시대의 기록인 ≪진서≫에는 당시 낙랑군이 평주에 설치되어 있고 낙랑군 25개 현 중의 첫째 현으로서 조선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용황은 진나라 때 사람이니 그가 봉해진 조선은 바로 이 당시 평주의 조선현일 것이다. 그를 조선공으로 봉한 것은 그가 조선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많다.
낙랑군 조선현은 모용황이 활동하던 지역인 시라무렌강 유역 부근 요서에 있었고, 선비족의 조상들은 조선의 옛 땅을 근거지로 발전했으며, 조선은 역사·문화적으로 모용씨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에게 조선공을 봉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활동하며 전공을 세운 모용황에게 아무런 연고나 관련도 없는 수천 리 떨어진 대동강 유역의 조선현을 떼어서 그에게 봉지로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서≫의 기록은 고조선과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결정적 단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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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
‘조선국’과 고조선 상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금석문만큼 중요한 사료는 없다. 금석문은 한번 글자를 새겨 넣은 다음에는 위조나 변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로공신도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농우총관부장사를 역임하고 태자소보에 증직된 두로영은공의 신도비다. 그의 본래 성은 모용이고 두로은으로도 불려 ‘두로은비’, ‘모용은비’로 불리기도 한다. 이 비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중국 섬서성의 함양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1500년 전 요서에서 활동한 선비족 두로영은의 신도비문을 주목하는 까닭은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국의 실체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내용이 이 비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로공신도 비문에 나오는 명문의 첫 구절은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다. 요서에 있던 조선국과 고죽국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의 건국과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조선건국 고죽위군” 이라고 요약한 것이다.
모용선비의 주요 활동지역은 진한시대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중부 지역까지를 포괄했다. 이 지역은 이른바 고조선이 건국을 했고 고죽국이 통치를 했으며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래서 모용선비의 역사를 이야기 하며 “조선건국 고죽위군”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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