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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규교수 출간예정 '요동사' “고구려는 요동國” 파문예고 ‘고구려는 한국의 일부도 중국의 일부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요동(遼東)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건립된 국가로 역사에 출현했다.’ 한중간 고구려사 귀속논쟁이 일고 있는 가운데 고구려를 한국이나 중국과 구별되는 제3의 역사공동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학술서가 출간될 예정이어서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 전망이다. 문제의 연구서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음달 초 출간되는 ‘요동사(遼東史)’. 저자는 중국고대사 전공자인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54·사진)다. 김 교수는 책 서문에서 “고구려사는 한국사를 형성한 요소일 수도 있고 중국사를 형성한 성분일 수도 있지만 고구려가 한국임과 동시에 중국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와 한국, 또 고구려와 중국은 각각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동류(同類)의식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요동사’원고를 미리 입수해 그 핵심 주장을 정리한다. ▽활동 공간이 달랐다=고구려가 강성했던 4세기 초∼7세기 중엽 ‘한국’의 공간적 범주는 삼한(三韓)의 범위, 즉 한반도 중·남부에 국한돼 북쪽으로 대동강을 넘지 못했다. ‘중국’의 지배영역도 중원(中原) 지역에 국한돼 동북으로는 요서(遼西) 지역을 넘지 못했다. 즉 고구려는 한국도 중국도 아닌 요동의 국가였다. 수(隋), 당(唐) 시대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요동’이라 불렀고 고구려 침공을 가리켜 ‘정요(征遼)’라 했다. 당시의 고구려인들도 ‘요동인’이라 자칭했다. 수, 당 시대 요동은 한반도 북부 이북의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토 범위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출현해 평양 천도(427년) 이후에는 요동과 한반도 일부를 지배한 통합 국가였다. ▽종족과 언어가 달랐다=고구려의 주축이 된 인적 집단은 맥인(貊人)이었다. 여기에 예계(濊系)와 말갈 등이 포섭됐고, 평양 천도 이후 한계(韓系)가 포함됐다. 이 가운데 맥과 예계 및 말갈 등은 모두 요동 전역에 분포돼 있었고 한계는 한반도 중남부에 살았다. 따라서 고구려인은 중국인과는 동류의식을 가질 수 없었고, 한국인과도 천도 이전까지는 동류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평양 천도 이전 고구려는 퉁구스 계통의 독자적 언어를 사용했고 천도 이후에야 한국어 요소가 고구려어에 혼입됐다. ‘삼국지’의 ‘동이전(東夷傳)’에는 “읍루(중국의 고대부족)의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고 기록돼 고구려 부여 옥저 동예 등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중국과는 다른 역사공동체를 이뤘음을 시사했다. 고구려인은 부여와 관련된 건국신화를 가졌다. 또 기자신(箕子神)에게 제사함으로써 (기자)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의식을 표현했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발해인이 다시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명함으로써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요동사적 역사의식이 형성됐다. ▽요동공동체론=요동은 역사공동체로서의 자립성이 약해 요동에서 출현해 번성한 국가는 예외 없이 중국이나 한국 등 주변지역으로 진출해 통합국가를 이뤘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은 한국의 북부를 통합 지배했고 요, 금, 원, 청 등은 모두 요동을 장악한 뒤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를 통합 지배했다.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영토의 일부가 한국이나 중국으로 편입되고, 그 문화가 한국과 중국문화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구려라는 요소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한국과 중국의 주변적 성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진영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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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 “요동공동체론은 日의 ‘滿鮮史觀’연상" “고구려가 한국도 중국도 아닌 요동국(遼東國)이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요동지역을 역사적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만들어 놓으면 일본도 만주국(1932∼45)을 근거로 이 지역에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다.” 중국고대사 전공자인 김한규 서강대 교수가 2월 초 출간할 예정인 ‘요동사’(문학과지성사)의 내용이 동아일보(27일자 A19면)를 통해 미리 알려지자 한국사학자들은 김 교수의 ‘요동공동체론’에 대한학술적 오류를 지적하고 이 책이 끼칠 국제 정치적 파장을 우려했다. 조법종 우석대 사학과 교수는 “요동은 한국과 중국의 변경(邊境)지역이지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한 역사단위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사학자들이 제기한 ‘요동공동체론’의 문제점을 정리한다. ▽종족과 언어가 달랐다?=고구려가 독자적 종족과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김 교수의 주장에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고대에는 수많은 종족이 서로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다(多)종족 국가를 형성해 갔으므로 현재의 기준으로 종족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언어 문제와 관련해 박경철 강남대 교양교수(고구려사 전공)는 “‘삼국유사’에는 신라 화랑 집단에 고구려 첩자가 숨어들어와 사투리가 심해 발각됐다는 내용이 있다”며 “삼국은 같은 알타이어족으로 편차가 심한 방언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또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년)를 기점으로 언어가 달라졌다는 주장에 대해 박 교수는 “평양 천도는 고구려 발전과정의 한 고비일 뿐 지배집단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문화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평양 천도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 중심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동류(同類)의식이 없었다?=김 교수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이에 동류의식이 없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송 교수는 “고구려인의 묘지명에 ‘삼한인’으로 돼 있거나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각각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부르기도 했다”며 “김 교수가 사료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백제의 개로왕이 472년 중국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신(백제)과 고구려는 그 근원이 부여로부터 나왔다(臣與高麗 源出夫餘)’고 한 점 △한반도 중심의 지석묘(고인돌)가 요동지역에서도 발견되는 점 등으로 미뤄 당시 고구려와 한반도는 같은 문화권이었으며 양국간 동류의식이 형성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만선사관 부활의 위험성=김 교수의 ‘요동공동체론’에 대해 일부 한국사학자들은 ‘만선사관(滿鮮史觀·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묶는 것)’을 연상케 하는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만선사관은 일본의 만주국 건국(1932년)을 정당화하기 위해 1920년대부터 일본 학자들이 제기하기 시작했다. 만주를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사로부터도 분리시켜 한국의 역사를 반도에 한정지으려는 식민사관이다. 최광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요동공동체론’이나 만선사관은 일본과 러시아인들에게 유리한 논리여서 일본이나 러시아가 이 지역에 개입할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우리역사의 비밀 http://www.coo2.net/ 민족문제연구소 http://www.banmin.or.kr/ 율곤학회 http://www.sanggosa.co.kr/ 유목민마을 http://www.eurasiad.com/nomad.html 대종언어연구소 http://www.hanja.com/ 대륙조선사 http://www.chosunsa.co.kr/ 고구려 연구회 http://www.koguryo.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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