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만 한 언더우드 목사가 최초의 선교사라는 글에 약간 발끈하여 조사한 자료들을 토대로 쓴 글입니다.
개인적인 신앙만을 기반으로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거나 혼동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나라에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군종사제였던 세스피데스 신부입니다.
다음으로 1832년, 독일의 귀츨라프 목사는 일본을 향하다 짙은 안개로 백령도, 충남 보령 등에 정박했었고요. 이 때 바이블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조선의 경고를 받고 이를 중단하고 떠났습니다. 조선을 향해 떠난 선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성격이 애매합니다.
이후 카톨릭(천주교)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방문하였으나 국내/외적 상황 때문에 탄압을 받기도 하고, 한강변에서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실질적인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방문은 카톨릭 신부들이었고 특히, 1836년의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가 최초입니다.
개신교 중, 조선을 목표로 한 최초의 선교사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1840-1866) 목사입니다. 처음에는 프랑스 군함과 함께 오려고 했으나, 계획이 좌절되자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 호에 승선하여 조선을 방문하였습니다.
제너럴 셔먼 호는 텐진에 정박하던 미국 상선으로 영국 메도스 상사와 결탁하여 비단·유리그릇·천리경(만원경)·자명종 등의 상품을 적재하여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대동강을 거슬러 온 것이었으며,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하고 있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선주인 미국인 프레스턴, 선장 덴마크인 페이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를 포함한 서양인 5명, 통역인인 중국인 이팔해를 비롯한 청나라 사람 13명, 당시 조선에서 오귀자라 불리던 흑인이 5명, 총 23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으나, 외국 - 서양의 함선들에 대해서 무조건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조선을 찾아 왔던 서양 배들 가운데 조선측의 공격을 받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으며, 또한 그들이 식량과 물품을 요구하면 조선측에서는 대체로 그것을 들어주고 조선에서 떠나가도록 타일렀습니다. 셔면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그 해 5월, 미국상선 서프라이즈호(The Suprise)가 평안도 철산에 표류했을 때 평안감사 박규수가 이들을 구조하여 후대한 뒤 중국까지 무사히 호송했던 점을 보더라도 외국선박에 대한 조선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셔먼호에도 마찬가지로, 조선 - 평양감영은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거절하였으나 셔먼 호의 요청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쌀, 쇠고기, 돼지, 닭, 달걀, 땔감 등을 지원하였으며, 떠나가도록 몇 차례에 걸쳐 권했습니다. 하지만 셔먼 호는 물러나기는커녕 보트를 내려 수심을 측정하는가 하면 18일에는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정박하고는 보트에 무장한 선원들을 태우고 북상을 시도하고 이를 제지하려던 중군(조선의 군관 계급) 이현익을 납치하였습니다.
'고종실록'에서는 이현익이 제너럴셔먼호에서 나온 소청선(小靑船)을 감시하며 따라가다가 피랍되었다고 하고, '평양지'에서는 제너럴셔먼호측에서 글을 보내 중군과 상의할 것이 있다고 유인한 뒤 억류했다고 하며, 오문환의 '도마스목사전'에서도 이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셔먼호 사건을 조사한 미국 측의 '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에서는 조선군이 무장 태세를 갖추는 것을 보고 경계하던 제너럴셔먼호측에서 최후 통첩을 하기 위해 찾아온 중군을 납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에서는 제너럴셔먼호를 찾아온 중군의 신인(信印)을 빼앗은 뒤 이에 항의하는 중군을 억류했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셔면호는 강변의 조선 군민들을 대포와 소총으로 공격하는 등의 패악을 벌였으며, 이에 주민들과 조선 군인 다수를 죽거나 다쳤고, 셔먼호는 조선군의 포격을 피하다가 장마로 불어났던 강물이 줄어들자 모래톱에 좌초하게 되었고, 화공에 의해 불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5년 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합니다.
여하튼, 이러한 해적질에 가까운 행위를 도운 - 혹은 주도한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라 합디다. 배가 활활 타고 있는 와중에 강변으로 바이블을 던지며 "예수! 예수! 예수!"라 외치고, 사형당하면서도 사형집행인에게 바이블을 건네주며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른다' 라고 기도했다나요. 뭐, 대동강변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입네 하면서 자랑스러운 순교자로 이름을 날리고 계십니다. - 대부분 이는 토마스목사 사망 60주년을 기념하며 개신교에서 출판한 오종환의 도마스목사전(傳)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기록정신은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고종실록, 패강록, 평양지 등의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보자면, 저 토마스 목사는 제너럴셔먼 호가 공격당하자, 납치되었던 중군(당시 조선군의 군관 계급) 이현익의 신표를 창 끝에 걸고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억지로 빼앗은 군번줄을 흔들면서 '이거 필요하지? 돌려줄테니 나 죽이지 마' 라는 거지요.
결국 '포박'되어 강변으로 끌려나왔으나 셔먼호에 의해 죽거나 부상당한 군민들의 가족들 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군인들이나 형리에 의해 사형집행을 당한 게 아니지요. 품 속에서 바이블을 건넸다거나 두 손을 맞잡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등의 영웅적이고 위대한 장면 따위가 등장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사형당하며 바이블을 넘겼다거나, 그걸 받은 군인이 개심하여 목사가 되었다거나 하는 '전설'들은 모두 60년 후에 개신교에서 출판한 토마스목사 전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입니다.
하기사, 뭐- 그 전기가 성령의 감화로 씌여졌을지도 모르니, 진실 여부는 각자 판단하시길.
이하는 참고자료.
===================================================================================================
1867년, 미 해군 군함 USS 와추셋(Wachusette) 함장에게
황해도 감찰사 박승휘(朴承輝) 가 보낸 서한 중, 제너럴셔면 호 사건에 대해 설명한 부분 발췌(현대어로 번역)
다른 나라의 상민(商民)이 역풍에 휩쓸려 우리 해역에 표도할 경우 우리나라의 법규에 의하면, 그 배가 온전하면 바람이 잠잠해져 회항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선원이 필요로 하는 식료와 생필품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배가 난파되어 그 배로 돌아갈 수 없을 경우에는 그들의 소원에 따라 호송관을 파견, 육로로 선원들을 북경까지 안전하게 호송하고 있습니다.그러한 구휼행위는 박애의 정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 가을 평양 대동강에서 사라진 이양선 사건에 관한 언급입니다. 당시 어떤 이양선이 대동강 하구에 도래한 일이 있는데, 지방관의 생각으로는 그 배가 그저 표착해 온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조선 관리에게 난폭하게 굴었을 분만 아니라 문정을 거부하면서 고의로 문정관을 모욕했던 것입니다. 우리 문정관은 이와 같은 무례함에 격분했지만 그것을 참고, 최대한 성의있게 문정한 결과 이 배가 폭풍으로 표류한 배가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원 중 최(崔, 崔蘭軒, 로버트 토머스 목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프랑스인을 자처했으나 선원 중 다른 이는 그를 영국인이라 하였습니다. 최가 말하기를 프랑스 전함 다수가 이곳으로 쳐들어온다고 호언하면서 조선 지방관이 그들과 통상한다면 자기는 영불 함대를 돌려보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우리 지방관은 교역은 일개 지방관이 허가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고 대답했고, 최는 이 말에 승복하지 않아 난폭하게 행동했습니다. 대동강의 수심이 얕아 큰 배가 오기 힘들다고 말했는데도 이에 개의치 않고 상류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방백성들은 서로 불상사가 없게 하기 위해 쌀과 고기, 채소, 땔나무 등을 제공했습니다. 최는 이것을 받자 다음날 바로 떠나겠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대동강 상류로 배를 몰아 올라간 것으로 보아 평양까지 소항할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평양중군은 매일 소선을 타고 이 양선을 따라다니면서 선원과 우리 백성 사이에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했습니다. 어느날 최는 쇠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던져 중군이 탄 배를 잡아 그 인신(印信)과 함께 그를 억류했습니다. 그리고는 대동강을 오르내리며 대포를 쏘는가 하면, 심지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인명피해가 얼마나 났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중군의 납치가 이와 같은 충돌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내력을 발휘하여 회유의 말로 중군의 석방을 호소하였으나, 그들은 자기네가 평양에 들어가 감사에게 중군을 직접 인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말했습니다. 최는 조선말을 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비길 데 없이 잔인하고 흉폭하며, 태도가 매우 거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평양으로 기어이 들어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수만 평양 군민이 격분하여 대동강 기슭으로 몰려나와 중군을 구하려고 이양선에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양선이 쏜 대포에 맞아 우리 군민 10여 명이 죽자, 전 부민은 흥분,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대동강 양안에 몰려나온 부민의 수는 끝없이 늘어나 그 세력이 대단했습니다. 마침내 강 양안에서 화공을 감행했으니, 뗏목에 불을 붙여 양선에 부딪히게 함으로서 이를 불태운 것입니다. 화공을 가하는 뗏목에 실어둔 폭약이 터져, 이양선은 소파되었고, 선원 전원은 몰살을 당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이 배가 미국 배인 줄을 몰랐습니다. 최는 무단으로 우리 내강 깊숙이 항해하며 도발을 자행한 바,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조사해 왔으나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 귀하의 편지를 받고 나서 문제의 양선은 최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다른 나라의 배, 즉 미국의 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 사건의 전말은 여기에 최대한 설명해 두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의 발생과, 그 이어진 일로서 우리는 다른 나라와 교섭을 통해 커다란 번영을 가져온다는 귀국의 관행이 우방인 청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까지 충분히 인식되었습니다. 귀하의 편지에서 귀하는 예전부터 서로 상해하는 불상사 없이 우호적인 사이를 유지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본인의 생각으로는 이번 사건이야말로 작은 티끌과 같은 사소한 사건의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본 사건에 대해서 양자 모두 조금도 나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하는 이를 충분히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