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남자친구도 없고, 돈도 없고, 가슴도 없는 난 집에서 티비 채널을 돌리며 혼자만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친하게지내는 나보다 한살 동생의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누나 어디야?"
"홍대" (집이 홍대임...)
"바뻐?"
"음..바쁘진 않아."
"나 오랜만에 신촌왔는데 친구들이랑 있거든. 누나 안바쁘면 일로와. 얼굴이나 보게."
"지금은 좀 그렇고 정리좀 하고 한시간 후에 갈게."
"알았어. 누나. 이따봐."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목욕탕으로 달려가서 세수부터했다.
그리고 화장을 하고, 옷을 다 끄집어내 이것저것 입어보았다.
사실 엄마친구아들에게 잘보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이렇게 잠깐이라도 기분을 내고 싶었다.
한시간여의 준비끝에 신촌으로 향했다.
도착한 호프집엔 엄마친구아들과 친구인 남자아이들 두명, 다른 여자아이들 세명이 앉아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3:3미팅중이었다고 했다.
"미팅중이면 너희끼리 놀지. 나 왜불렀어."
"아. 그냥 자주못보니까. 얼굴이나 보려고그랬지. 이제봤으니까 누나 안녕!"
"불렀을땐 마음데로였지만, 집에가는건 아니란다."
난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놀다가겠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묻는다.
"이 여자는 뭐야?"
"우리 엄마친구 딸이야."
"엄친딸?"
"그냥 딸이잖아..."
"딸이맞긴 한거지..?"
분위기는 점점 화기애애해졌다.
다행히 그곳에 있던 여자친구들도 내게 언니라 부르며 잘 따라주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날 경계하며 막말을 내뱉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언니는 왜 크리스마스이브에 여기 낑겨서 놀아요?"
난 조금 화가났지만, 우리 집 가훈이 정직하게 생활하자 이기때문에 솔직하게 얘기했다.
"갈데가 없어."
그러자 그 친구는 그때부터 내게 잘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재밌게 놀다가, 2차를 가게됐다.
그곳에서도 우린 재밌게 놀았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밤은 깊어갔고, 나와 같이 놀아준 아이들이 고마웠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때쯤 그 여자아이가 엄친아에게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이걸로 계산해. 2차는 내가 낼게."
멋있었다.
나이도 어린 여자아이가 7명의 대인원의 술값을 혼자 계산하다니.
얘기를 들어보니 무슨 국회의원 딸이라고 했다.
그래서 돈이 많은가보다, 있는 집 아이는 통도크고 가슴도 크구나 감탄하고 있을때쯤
먼저 집에가겠다며 그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만 계산하고 집에가겠다니. 너무 멋있어보였다.
나는 양팔을 펄럭이며 잘가라고 배웅해주었다.
그런데 순간 옆을보니 내 가방이 파헤쳐져 있었다.
뭔가 이상해서 가방을 뒤적여보니 지갑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여자아이가 건넨카드가 내 카드와 똑같았던 것이 기억났다.
똑같은 카드를 쓴다는게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의 육감이 발동했다.
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그 여자아이를 불러세웠다.
"00아~!! 잠깐만!!"
하지만 그 여자아이는 듣지못했는지 점점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뛰었다.
그리고 바로 뒷통수에대고 그 여자아이를 다시 불러세웠지만
귓구녕에 아까 안주로 나온 떡볶이를 쳐박았는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난 어깨를 그 아이를 돌려세웠다.
그제야 그 아이는
"어머 언니. 저 데려다 주시게요?"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말하고있는 그 아이의 눈동자는 심하게 요동쳤다.
"아니. 뭐좀 확인할게 있어서. 아까 호프집에서 계산한거 계산이 잘못됐다고하는데, 카드좀 다시 줘볼래?"
"네? 왜요?"
카드를 달라고하자 그 아이는 갑자기 내게 방어태세를 취했다.
카드엔 내 서명이 적혀있기에 그것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끝까지 카드를 주지않고 내게 삐딱한 자세로 막말을 내뱉었다.
"언니 지금 뭐하자는거에요? 저 의심하는거에요?"
"의심? 무슨의심. 카드 계산이 잘못됐다고해서..."까지 말하던 나는
우리집 가훈을 다시 떠올렸고, 이왕 이렇게 된거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래. 사실은 내 지갑이 없어졌는데. 집이 인천인 네가 지금이 새벽2시인데 갑자기 집에가겠다고 하는게 이상해서. 그리고 아까 니가 계산한카드가 내카드 같은데..내가 지금 카드사에 확인해볼까 아님 카드를 줄래?"
하지만 그 아이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돌아 다시 빨리걷기 시작했다.
난 쫓아가서 그 여자아이를 막아서고 말했다.
"내가 오해하는거라면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할게. 근데 지금 니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그래. 확인만 시켜줘."
그때였다. 호프집에있던 엄마친구아들과 남자아이들이 나와 내게 다가왔다.
"누나 왜그래요?"
"내가 뭐 확인할게 있어서. 너네는 들어가 있어."
"뭔데요?"
내 화난 표정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엄친아가 여자아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뭐야? 너 누나한테 뭐 잘못했어?"
그러자 여자아이가 울면서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날 의심하잖아. 짜증나. 이상한년이네 진짜."
그 여자아이는 첫날밤 옷고름풀듯 내 이성의 끈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년? 야 가방내놔."
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여자아이는 내 말에 가방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 18년이.. 너 내 가방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책임질껀데?"
난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성의 끈을 고쳐묶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니 가방을 확인하는게 말도안되는거 같으니까. 우리 경찰불러서 아저씨한테 검사해달라고하자. 어차피 내가 지금 지갑을 도둑맞았어. 그거때문에라도 경찰불러야하니까 일단 그렇게 확인하자.
난 말이 끝나자마자 가짜로 버튼을 누르며 수화기에 대고 모노드라마를 찍기 시작했다.
"촬아저씨. 여기 신촌00호프인데요. 제가 지금 지갑을 도둑맞아서요...."라고 말이 끝나기도전에
여자아이는 내게 순순히 가방을 내밀었다.
순간, 머릿속에는
'어..아닌가? 아....내가 괜히 의심한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가방은 확인해봐야했기에
가방을 열어제쳤는데 거기엔 내 지갑이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내 모습처럼 구석에 찌그러져있었다.
난 지갑을 들어보이며
"이거 내 지갑이잖아. 이건 내 카드고. 너 무슨짓을 한거니?"
그러자 그 여자아이가 그때부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아니라요. 언니지갑인줄 몰랐어요. 다른사람껀줄 알고 가져간거지 언니꺼였음 안가져갔죠."
"다른사람꺼라도 그걸로 계산하면 안되지. 이거 절도야 너."
그 아이는 절도라는 말에 매우 흥분한듯 다시 이성을 잃었다.
"절도? 말 막하네? 니껀줄 몰랐다잖아. 뭐 이딴년이 다있어."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을 낚아채고 다시 가던길을 걷는 것이었다.
난 말리는 남자아이들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그 아이에게 달려가 앞을 가로막았다.
"사과하고가. 그럼 그냥 실수라고 생각하고 너 나쁜애로 기억하지 않을게."
"내가 사과를 왜해? 짜증나. 니껀줄 몰랐다고. 그리고 다시 찾았으면 된거아니야? 남자애들앞에서 나 망신이나 주고. 꺼져!"
꺼지라니. 사귀던 남자친구들에게 들었던 익숙한 그 말.
난 그 말에 스스로 내 이성의 끈을 풀었고, 그 여자아이에게 육두문자를 선물해주었다.
난 사실 욕을 잘하는 사람인데, 친하지 않은사람들에겐 내 실체를 들키지 않으려
20년넘게 잘 참아왔고, 잘 숨겨왔는데.
엄친아앞에서, 처음보는 그 친구들앞에서 그런꼴을 보이자니 조금 망설여졌지만,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계란후라이하면 쌍란만 나올년아. 사과하고가. 경찰부르기전에."
"이미 불렀잖아!!!! 근데 내가 왜 사과를 해야하는데!!"
그랬다.
그 여자아이는 아까 내가 정말 경찰서에 신고를 한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황급히 도망치려했던 것이고, 이미 신고를 했으니 내게 사과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난 다시 모노드라마를 찍었다.
"촬아저씨. 죄송한데 지갑 찾았어요. 안오셔도 돼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어설픈 연기였지만, 그 상황에서 그 아이는 그것이 진짜인줄로만 알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
"남자애들앞에서 자존심상해서 못하겠어요."
그말에 난 남자아이들을 호프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그 아이는 그제야 내게
"언니. 미안해요. 언니껀줄 몰랐어요."
라고 말하며 내 곁을 떠났다.
"그냥 가지말고 풀고가야지."
난 다시 여자아이를 설득해서 호프집에 데려갔다.
그리고 술을 한잔따라주며 아까 막말해서 미안하다 사과를하는데
결국 그 여자아이는 창피해서 더이상 못있겠다는 말을 전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후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아이는 국회의원 딸도 아니었고, 도벽이 습관처럼 몸에 벤 아이라는 말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씁쓸한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슬프게 지나갔고
난 다시 방구석에 쳐박혀있었지만,
그때 있던 한 남자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누나. 그 멋진 모습에 반했어요. 우리 내일 에버랜드 놀러가요."
나는 기뻤다.
그리고 기쁜마음에 친구네 집에가서 회를 떠다먹으러 나가다 택시에 치여서 데이트강제종료..
병원에서 새해를 맞이한, 그해 나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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