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진지 벌써 12년이 지났습니다.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고 시간이 지나고 전쟁염증이 점점 커지자 이라크 전쟁에 대한 시각은 점점 비판적으로 변했습니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봤을 때 이라크 전쟁은 미국 네오콘의 오만, 석유회사들의 음모였다는 주장이 거의 주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9/11 직후라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사실 이라크 전쟁은 필연이었습니다. 이라크가 실제로 대량살상무기(WMD)를 가졌는지 아니었는지를 떠나서요.
9/11 직후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미국 본토가 공격당했고, 그 공격을 감행한 이들은 국가가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정규군을 통해 전쟁을 하는 국가와는 다르게 추적하기가 매우 힘들고, 그들의 공격을 막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미국은 사상 초유의 테러사태의 배후에 알카에다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들이 본거지로 삼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아프간 탈레반은 알카에다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오사마 빈라덴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개전 명분은 충분했고, 미국은 주저하지 않고 아프간에 복수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은 알카에다라는 조직의 박멸이었습니다. 아프간이라는 국가를 패배시키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죠.
물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도시와 도로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언론과 미디어는 미군이 승리했다고 자축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미국 국방성과 CIA는 아프간의 도시 점령이 모두 완료되었을 때 더욱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아프간 탈레반 정부는 일단 잠정적으로 패배시켰지만, 알카에다를 놓쳐버렸고 빈 라덴도 놓쳐버렸기 때문이죠. 게다가 아프간의 도시와 도로를 다 점거했음에도 불구 알카에다의 행방은 오히려 전쟁 전보다 묘연해졌습니다.
미국은 이와 같은 실패의 배후에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가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ISI의 전 수뇌였던 장군은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계속지원할 것이라는 인터뷰를 하면서 어그로를 끌었습니다) 파키스탄 정부에 분노하면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항의와 위협을 가했습니다.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이자 독재자였던 무샤라프에게 미국의 호의와 ISI 중에 택일하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ISI는 미국에게 테러리스트들이 핵물질 또는 핵무기에 준하는 물건을 획득했다는 첩보를 제공합니다. ISI에 대한 미국의 분노를 수그러뜨리고 미국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를 놓쳐버린 미국은 이미 엄청난 패닉 상태였고, 이러한 첩보가 입수되자 더욱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파키스탄 ISI가 일부러 이런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의심도 했지만,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는 가정도 해야 했습니다. 9/11 직후의 상황이 그러했으니까요.
특히 미국 CIA는 9/11을 막지 못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가장 사소해보이는 정보 또는 가장 허황된 정보도 주의깊게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특히 대량살상무기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정보에 집중했습니다. 예전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허위정보로 취급했을 불량 첩보들이 이제는 실제로 있을 법도 한 진지한 정보로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CIA 직원들도 각자 자기들이 입수한 첩보가 진짜 중요한 첩보라고 서로 선전 또는 과대포장 했습니다. 자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또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보고를 하지 않은 정보 때문에 또 다시 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핵물질을 이용한 테러가 전례가 없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 몇차례 핵무기까지는 아니지만 핵물질을 이용한 테러가 존재했다고 합니다(모두 실제로 이루어지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이죠...)
그러한 상황에서 알카에다가 대량살상무기를 구하려고 여기 저기서 노력하고 있다는 복수의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일단 그 정보가 사실이든 아니든, 복수의 소스로부터 유사한 이야기가 나타나면 정책결정자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핵과 같은 어마무시한 물건을 테러조직이 자체적으로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알카에다가 핵이나 이에 준하는 대량살상무기를 얻게 된다면 이는 분명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국가가 고의적으로 (정부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그 내부에 있는 반미세력에 의해) 방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핵시설을 갖춘 모든 국가에게 철저한 관리를 요청하였고, 테러단체에 대량살상무기를 넘길만한 국가를 모두 집중 타켓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연설 중 <악의 축>이라는 발언은 이러한 맥락에선 나왔습니다. 미국은 명시적으로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키면서 이들에게 분명한 경고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3 나라는 모두 대량살상무기를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고, 만약 테러 단체와 어떤 연계가 있다면 이 3 나라가 가장 유력했습니다.
미국은 심지어 최악의 경우 이 3 나라에 있다고 의심되는 시설을 모두 동시에 타격하는 계획을 입안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대량살상무기가 터지는 것보다 압도적인 공군력을 이용해서 믿지 못할 나라의 대량살상무기 시설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이는 구상이었고, 사실 실제로 실행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심리상태가 그만큼 절박했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런 심리상태에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알카에다와도 연관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온 것입니다(전쟁 후에는 그 첩보가 거짓이었다는 게 드러났지만....)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절박했고, 테러 단체 손에 대량살상무기가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습니다. <예방전쟁>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고 그 결과가 이라크 전쟁인 셈이죠.
물론 그 진행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처참했고, 정말 무능과 무지의 극치였습니다. 알카에다가 지고 더 미친 놈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돌이켜 봤을 때 이라크 전쟁의 개전 자체는 결국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