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전남함에서 근무하던 시절...

우리 부서에 좀 어리바리한 병기병이 한 명 있었다.

사실은 어리바리한 게 아니라 애가 워낙 띨띨했다.

일병을 달도록 공구 이름도 제대로 몰라서 늘 엉뚱한 공구를 들고 오는 건 기본.

그래도 우리 부서에 두 명뿐인 수병이고 애가 착해서 다들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그놈 바로 위로 병장이 한 명 있었는데,

병장을 달도록 혼자서 고생하다 밑으로 이병이 들어온데다

워낙 기수 차이도 많이 나고 하니 갈구기는 커녕 늘 감싸주고 배려해줬다.

영외거주자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영내 하사들도 걔 직속 선임인 병장한테 맡기고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걔는 늘 해맑게 웃으며 평화로운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걔 밑으로 신병이 한 명 들어오면서 애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신병을 쥐잡듯 잡는 것이었다.

처음 한 두번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날이 갈 수록 그 강도가 더 해갔다..

그리고...

이놈이 공구 이름이며 장비 명칭을 정말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 앞에서는 맨날 어리바리 하던 놈이

신병을 잡을 때는 장비 명칭이며 기능, 공구 이름까지 아주아주아주아주 정확하게 꿰고 있는 것이었다.

그놈이 공구를 들고 이름이 뭔지 물어봤을 때 신병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그 공구로 머리를 때리는데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뭔 일 나겠다 싶었던 나는 병기 직별 하사들과 병장을 불러다 사실을 알려줬다.

다들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놈이 자주 출몰하는 곳과 시간을 알려주고 직접 보라고 했다.

다음날...

현장을 목격한 병기 직별 하사들과 병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즉각 그놈과 이병을 분리시키고 그놈을 특별 관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그놈 인생을 생각해서 선임하사(중사)선까지만 보고하고 윗선에 보고는 하지 않았다.

정체를 들킨 그놈은 그날 이후 사사건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영내하사들과 있는 자리에선 자기 성질대로 주먹으로 체스트(관물함)를 치기도 하고

일 하다 말고 공구를 집어던지는 일도 있었다.

영외거주자들도 그놈의 만행을 알고 있었지만 말로 주의를 줬을 뿐, 딱히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놈이 짜증난다고 집어던진 공구에 영내하사가 맞았고,

화가 난 영내하사가 그놈을 개 패듯 패 버린 것이다.

그자리에서 혼절한 그놈은 바로 의무대로 실려 갔고

영내하사는 경위서를 작성하고 함내에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말을 전혀 하질 못하는 것이었다.

군의관 말로는 충격에 의한 일시적 실어증 같다고 했다.

병기장(원사)과 주임원사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그놈과 필담을 주고 받았다.

'너를 때린 병기하사를 처벌하길 원하느냐?'

'그렇다'

'그러면 신병을 폭행하고 하사에게 공구를 집어던진 너도 처벌 받게 된다'

'...'

'그래도 네가 처벌하길 원한다면 원하는대로 해 주겠다'

'아니다. 내 생각이 짧았다. 처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좋다. 의무대에서 퇴실 후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 주겠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 해라'

'...'

'어느 곳으로 가고 싶나?'

'그냥 전남함에 계속 있고 싶다'

'그렇다면 의무대에서 충분히 쉬고 네가 오고 싶을 때 다시 와라'

그놈은 정말 똑똑한 놈이었다.

우리배에서 자신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하등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니

그나마 분위기 좋고 사람들 좋은 우리배에 남기로 한 것이었다.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되고 일주일 쯤 후 그놈은 우리배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놈의 실어증은 호전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그놈이 밉긴 했지만 실어증에 걸린 그놈이 안타깝고 불쌍하기도 해서

전처럼 그놈을 받아주고 배려해주면서 지내기로 했다.

그놈도 의무대에서 개과천선을 했는지 이전보다 더 잘 웃고 열심히 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가끔 현기증을 호소하거나 가슴 통증 등을 호소해서

그놈에게는 힘든 육체노동은 시키지 않고 비교적 쉬운 일을 맡기고 현문당직도 빼줬다.

그렇게 한달 여가 지난 어느날...

병기사인 후배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내게로 왔다.

"내참~~ 우와~~~ 허참~~~ 우와~~~"

"야 뭔 일이냐?"

"선배임... 저 죽겠습니다"

"왜?"

"아 글쎄요... 우리 뱅기뱅 있잖습니까"

"병기병 누구?"

"실어증 걸린 놈예"

"그녀석이 왜?"

"제가 일 하다가 똥이 매러버가 화장실에 갔다 아임니까?"

"그런데?"

"똥 싸는데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기라요"

"그게 뭐?"

"그기 누군지 아십니까?"

순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딱 왔다.

"그놈이냐?"

"네에~~~~ 하 참... 어이가 없어가..."

"그래서?"

"그래서는요... 지한테 딱 걸리니까 갑자기 화장실 바닥에 쓰러지는기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기지예?"

"그래서 어떻게 했냐?"

"마 일나봐라! 캤더니 꼼짝도 안 하는 기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짜나 볼라꼬 부드럽게 '마. 니 이제 말 하나? 다행이다. 일나봐라. 어디 좀 보자' 캤더니 기절했다 깬 것처럼 일나는 기라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어떻게 했냐?"

"우짜긴요. 뱅기장한테 바로 보고했다아임니까"

그랬다.

처음부터 그놈은 실어증 같은 건 걸리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고 편하게 군생활을 하고 싶었던 그놈은

무려 한달이나 실어증 환자 흉내를 내고 다닌 것이었다.

추궁 끝에 그놈이 모든 사실을 털어놨을 때, 우리는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은 입대 전에 선배들로부터 군생활을 편하게 하는 법을 전수 받았다고 했다.

하나는 철저하게 고문관 노릇을 하는 거였다.

처음엔 다소 힘들겠지만 나중엔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일도 시키질 않으니

편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고 자기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꼴통짓을 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놈은 고문관 짓거리를 하다가 정체가 탄로났을 때 그토록 꼴통짓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문관 짓거리든 꼴통 짓거리든 하다가 탄로나서 맞게 되면

그대로 기절한 척하고 의무대에 며칠 있다가 정신이 이상한 척하면 된다는 거였다.

화가 나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배에서는 고심을 한 끝에 그놈이 원하는대로 편한 곳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그렇게 그놈은 우리 선배가 병기장으로 있는 고속정으로 발령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