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개루 카페 : 이병도는 친일파? 일반인? 애국자?
2. 부흥 카페 : 근데 이병도가 참 동네북인듯..
3. 부흥카페 : 식민사학의 거두 두계대마왕(이병도)의 식민사관을 파헤친다!
4. 조인성 선생님 : 李丙燾의 한국고대사연구와 식민주의사학의 문제- 《韓國古代史硏究》를 중심으로
4-1 단군신화에 대해서
"(전략) 이병도는 “설화학적?민속학적 방법”으로 단군신화를 고찰하여그에 반영된 역사적 요소를 탐구하였다. 그는 단군을 제정일치시대 지배자의 칭호로 보고 (중략) 그리고 아사달 사회는 조그만 부락국가 혹은 도시국가였다고 이해하였다. 이상과 같은 파악은 단군신화가 후세 佛敎徒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고 보았던 那珂通世, 白鳥庫吉, 今西龍 등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4-2 기자조선에 대해서
"이병도는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이른바 기자조선의 지배씨족은 기자나 그 후예 혹은 다른 중국인 계통이 아니라, 토착 사회의 씨족 으로서 아마도 요동방면에서 대두하여 아사달사회의 구 지배씨족을 몰아내고 등장하였으며, 점차 발전하여 후에 “古典國家”를 형성하였 던 것이라고 보았다. 그 씨족의 성을 韓氏라고 고증하고, 이에 따라 기자조선을 한씨조선이라고 이름하였다. 기자동래설은 왕실에서 그 가계를 빛내기 위하여 殷末의 賢人인 기자를 시조로 삼으면서 생기 게 되었다고 하였다"
4-3 위만조선에 대해서
"이병도는 위 만이 순수 중국계가 아니라 연 지방에 토착한 조선인 계통이라고 하였다. 이는 각종 개설서에 채택되었고, 국정의 국사 교과서에도 소개되었을 정도이다"
4-4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韓百謙의 ≪東國地理志≫ 이후 한사군의 한반도 내 존재설 이 유력하게 되었고, 安鼎福의 ≪東史綱目≫ <朝鮮四郡三韓圖>에서 는 그 위치를 반도 내로 명기하였다. 이병도는 진번군의 위치를 비정하면서 韓百謙과 淸末의 학자 楊守敬의 연구로부터 계몽받은 바 적지 않다고 밝혔거니와, 그의 한사군 위치 비정은 실학의 연구 성과를 계승하고 있는 측면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4-5 한사군의 영향에 대해서
"이병도가 한군현의 설치를 중요시하였던 것은 그 식민지 지배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중략) 이병도는 이러한 외부의 타격과 압력이 오히려 진한 사회 내부 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진한사회의 주도적 역할 을 하였던 慰禮部落이 여러 부락을 합쳐 고대국가를 건설하기에 이 르렀는데, 이때가 고이왕 때라고 보았던 것이다."
4-6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제 19대 訥祗로부터 마립간의 칭 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遺事≫ 王曆에 따라 제 17대 奈勿로부터 사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나물마립간을 신라 건국의 태조로 보았던 것이다 (중략) 이병도가 고이왕 이전의 기록들이 전후 상황으로 보아 그 연대가 틀렸다고 하였을 뿐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모두 후세 사가의 조작으 로 돌리는 津田左右吉의 사료 비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백제의 건국을 고이왕대로 올려 잡은 것과 더불어,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일정하게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4-7 맺음말
"지금까지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가 식민주의사학의 영향을 받 았다는 비판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고조선 문제에 대한 이병도의 학설은 오히려 민족주의사학과 근접 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조인성 선생님 : 李丙燾의 韓國古代史?究- 漢四郡ㆍ三韓의 歷史地理 ?究를 중심으로
"이병도의 한사군·삼한의 역사지리 연구는 한백겸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 중심의 역사지리 연구를 또 다른 배경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 다. 그리고 역사지리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찾아내고, 본격적인 학설로 취급하였던 것은 아마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병도의 연구는 사료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학설에 대한 엄정한 비판 위에 이루어졌다. 그는 근본 자료에 대한 치밀한 분석, 기왕의 학설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태도, 지리적 상태와 당시의 대세에 대한 고려를 중시하였다."
6. 김일수 선생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출신) : 이병도와 김석형- 실증사학과 주체사학의 분립
"두 사람은 역사가로서 두 가지 측면에서 학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다. 먼저, 실증사학 연구방법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역사 연구 방법의 도입과 적용을 통해 한국사의 정립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병도에게는 역사발전의 문제의식 부족과 시대구분에 대한 인식 부족, 그리고 김석형에게는 실증적 검토의 부족이라는 문제점이있다."
"이병도의 경우 한사군의 위치 주장은 남한 학계에서 정설로 자리 잡았으나 삼한 문제는 제자들로부터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7. 민현구 선생님 : 이병도
"두계는 수사관보(修史官補, 1925. 8~1927. 5)와 무급촉탁(無給囑託, 1927. 5~1929)으로 모두 4년간 간여하였다 (중략) 그러나 전임직(專任職)인 수사관보 자리에서 그는 22개월만에 물러났 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일본인들과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중략) 그의 상관격이었던 이마니시(今西龍)와는 학설의 대립으로 논문의 게제가 거부당한 일이 있었고, 뒷날 두계는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부정하고 왕건 의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의심하는 이마니시의 설을 정면에서 비판한 바 있는 것이다."
8. 한영우 선생님 :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우리나라 사학사에서 역사를 완전히 독립된 학문으로 정착시킨 이를 꼽는다면 아마 이병도를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랑케와 같은 존재였다."
"이병도 사학의 문제의식은 독립정신을 고취한다거나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이ㅜ해서 혹은 역사벌전에 대한 신념에서 출발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략) 일본인과의 학문적 경쟁의식이 더 큰 동기유발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민주의 역사학과의 정면대결이 아니라 일인 사학의 큰 테두리 속에서 한국인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하는 동참적 경쟁의식이라 할 수 있다."
역개루랑 부흥이야 원래 제가 눈팅하는 곳이긴 한데 원래 부터 저런 입장이고 이곳 역사게시판과 큰 입장 차이가 없네요.
그리고 그 아래에 제가 찾은 논문들과 저서들이야 워낙 유명하신 분들의 글이고 최근에 이병도를 인식하는 일반적인 입장이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참고로 학계 일각에서 이병도의 학문이 식민사학에 영향을 받았다 라고 하는 주장이 있긴 한데 이게 80~90년대에 막 민족주의 사학이 힘을 얻으면서 나온 것들이라 최근에는 관련 연구도 나오지 않는 편이고 논문도 없어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사장된 주장이라고 해도 될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참고로 최대한 중립성을 갖춘다고 진단학회에서 나온 논문들은 제외했어요. 그리고 이주한씨 같은 분들의 저서도 당연히 뺏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