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판 다이빙 벨을 봤습니다. 잠을 이룰수가 없네요. 그냥 이 심경을 글로나마 남기고 싶어졌어요.
1년 넘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며 글을 써 볼까합니다.
올해 34살인 남징어입니다. 전 아주 평범하게,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불편함 없이 자랐어요. 누구나 갖고 있는 가정사 한 두개쯤은 제게도 있지만,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 해 본 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7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돌아가신 것은 어렸던 제게도, 지금의 제게도 너무나 큰 아픔이자 상실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제겐 할머니가 계셨거든요.
저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어요. 아니, 지금도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른들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곧 잘 하던, 아주 평범한 아이었죠.
이날 이때껏 살면서 제가 해 본 가장 큰 일탈이라고는 31살 때 아주 연한 갈색으로 염색을 한 일 정도랄까요. 누구나 한 두개씩은 갖고 있는 무용담도 없고, 나이트나 클럽조차 가 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저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에 충실히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IMF때로 기억 합니다. 사실, 연일 언론에서 국가부도다, 금 모으기 운동이다, 라고 할 때 조차 전 피부로 실감하지 못 했어요.
할머니께서 소위 말하는 알부자였거든요. 그 시기조차 전 아무 생각없이, 아무 불편함 없이 자랐습니다. 사실, 당시 중3이었던 꼬맹이가 알았다고 해도 얼마나 알았었겠냐~란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긴 하지만 말이죠.
IMF가 터진 그 해 겨울, 제가 다니던 성당에서-지금도 다니고 있는-서울역으로 밥차 봉사를 따라 나섰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제겐 정말 충격적인 모습이었어요. 뉴스에서나 봤던 노숙자가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존재 한다는 사실도 큰 충격이었고, 우리 성당 건너편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한 교회에서 마치 장사치들처럼 노숙인들에게 밥을 나눠주며 '우리 교회로 와서 밥을 먹어야 구원 받는다'라는 말을 외치던, 대머리 아저씨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봉사활동에서 돌아온 저녁, 밥을 먹으며 할머니께 여쭤 봤습니다. 왜 저렇게 노숙인들이 많은 것이고, 우리 나라가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 또, 같은 예수님은 믿는다고 생각하던 교회에서는 왜 우리 성당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하느냐고 말이죠.
할머니께서는, '무능력한 사람들이 분수도 모르고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러니 넌,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 그래야 그 노숙자 '놈들'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네. 저희 집안은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콘크리트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1번. 김대중은 빨갱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정기구독.전 진짜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나라가 어려워졌다고 생각 하면서 자랐습니다.
실제로 전, 고등학교 3년 내내 어른들과 선생님이 정말 좋아하는 모범생으로 살았습니다. 말썽을 피운다거나, 지각, 결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쁜 일이었죠. 성적은 꽤나 좋았기에, 그 상으로 사 주셨던 플레이 스테이션과 만화책, 음악 CD들이 제 유일한 흥밋거리였고, 관심사였습니다.
그렇게, 전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생'이 되었습니다. 당시엔 정말 자랑스럽게도, 마침내 저도 SKY 대학의 일원이 됐죠.
대학생이 된 후에도, 전 변하지 않았습니다. 술과 담배를 배웠고, 플스1이 플스2로 바뀌었고, 용돈을 받는 것 외에 과외를 하며 동기들보다 주머니 사정이 좀 더 나았다는 것 정도가 변했다면 변한것일까요.
그러다가, 2001년 1학기 기말고사쯤으로 기억합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사당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게,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제게 유인물을 나눠줬습니다. '조선일보를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 정도의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친일 행적, 부패한 기득권에 대한 공정하지 못 한 보도, 등의 내용이었죠.
아주 당연하게도, 전 그 여성분이 자리를 뜬 후 코웃음을 치며 그 유인물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죠.
그 얘기를 동방에서 여자 선배에게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 웃긴 일 아니냐? 과거에 그렇다 하더라도 지난 일이고, 내가 어디서 봤는데 한겨레 신문은 세금도 제대로 내지도 않았다더라. 최소한 그 것들 보다는 세금도 잘 내고 있는 대형 언론사가 더 좋은거 아니냐? 란 정도의 말이었죠.
그 선배는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을 해 줬습니다. '넌 아마 공부도 굉장히 잘 했을거고, 학교 생활 하는거 보니까 가정교육 잘 받고 자란 착한 아이인 것 같다. 근데, 그 찌라시 나눠준 애들이 왜 저러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일이 있느냐. 그 애들도 너처럼 공부 잘 하는 대학생일텐데. 왜 공부도 안 하고 저러고 돌아다닐까?'라고말이죠.
-_-
제 표정이 딱 저랬습니다. 'So what?'이었던거죠.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사회가 요구하는 아주 바람직한 모범적인 학생이고, 졸업 후에도 아마 좋은 회사에 들어가,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되는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텐데.
말 없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던 제게, 그 선배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오늘 끝나고 술을 사 줄테니, 얘기나 하자고 하더군요.
전 속으로 '아..시험 보고 집에 가서 파판10 칠요의 무기 노가다 해야 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전 손 윗 사람의 말은 무조건 잘 들어야 한다, 란걸 아주 어릴때 부터 학습해 왔고, 막 배우기 시작했던 술에도 맛을 들여가고 있었고, 그 선배는 아주 예뻤기 때문에(....) 그러마, 고 대답했습니다.
그 날, 아주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근현대사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인권에 대해서, 또 정의에 대해서.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죠. 솔직히 그랬습니다. 그런거 모르고 살았어도 난 아주 잘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잘 살텐데.
하지만. 그 선배는 예뻤기에(...) 그냥 묵묵히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더군요. 저 선배도 우리학교에 왔을 정도면 모범생이었을거고, 앞으로도 보장된 미래가 있을텐데(당시엔 정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왜 저런 생각을 갖고 살까.
그 날 이후, 전 공부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나마 가장 잘 할 수 있는게 공부였고, 또 그 예쁜 선배와 더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에.
이상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아무 고민이나 성찰 없이 살아 왔지만, 줄곧 말씀 드린대로 전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윤리와 도덕에 대한 기준과 생명의 중요함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의 영향도 있었겠죠.
상상 할 수 조차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부당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 하는 것이 불법이라며, 정의를 외치는 것이 불법이라며 죽임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우리 나라를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줬다고 알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 '각하' 는 제가 생각했던 훌륭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국부 이승만 선생님은, 아주 저열한 기회주의자이자 살인자였습니다.
의리있고 추진력 있는 '사나이' 전두환은 염치없는 잔혹한 살인자였고, 북한에 돈이나 퍼주는 나라 말아먹는 빨갱이 김대중은 그런 사람이 아니더군요.
뭔가 이상 했습니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배웠던 기본적인 가치관. 어른을 공경하고, 법을 준수하며,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대전제를 아주 우습게 어긴 사람들은 호의호식하고 있고, 타인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은 할머니께서 그렇게나 말씀하시던 '저런 밑바닥 인간들'로 살고 있더군요.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고, 의심스럽기도 했죠.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지만, 루머들이 판을 치는 곳이라고 알고 있던 저였기에 말이죠. 내가 알게 된 이 사실들이 정말 '진실'일까? 란 의심, 아니, 내가 여태껏 학습해 온 기존의 지식들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눈에 많은게 들어 오더군요. 길거리엔 항상 누군가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아한 상아탑이자 지성들의 모임인줄로만 알고 있던 우리 대학교 안에서조차 누군가는 삭발을 하고 '데모'를 하고 있으며, '아니 고작 세금 몇 만원 올리는게 무슨 큰 일이라고'생각했던 일들이 정말 큰 일이더군요.
그렇게, 저는 집안에서 말 하는 '빨갱이'가 됐습니다. 전 제가 머리가 좋아서, 제가 노력했기 때문에 잘 살아왔고, 잘 살 것이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날 위해 군홧발에, 총칼에 피를 흘린 누군가 덕분에 제가 발을 딛고 살고 있던 것이더군요.
전 제 인생 처음으로, 할머니 말씀을 거역하게 됐습니다. 제 최초의 투표를 노무현에게 던졌거든요. 당연히 이회창을 찍어야 했고, 찍은 줄 알았던 말 잘 듣던 손자가 졸지에 빨갱이가 된겁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세상은 좋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말 안 듣고 저 빨갱이 새끼 찍었더니 나라 꼴이 이렇지 않느냐. 언론과 사회는 '모든게 노무현 때문이다'시전. 장갑차 사건. 탄핵 정국. 막말 파문. 등록금, 집값 폭등.
저 역시, 어린 마음에 뭔가 극적으로 바뀔 것이란 기대가 컸던 탓인지, 내 한 표로 세상을 바꾼다는 환상이 깨졌던 탓인지, 혹은 뿌리 깊게 학습된 과거의 습관 때문인지, 실망이 컸었답니다.
다행히, 민주주의와 정의, 평등, 상식의 가치에 대한 소중함까지 잃게 되지는 않더군요. 돌이켜 보면 정말 다행입니다.
군 제대 후, 전 인생에서 최초의 실패라면 실패를 맛 보게 됩니다. 사실 실패도 아닌데. 고시에 실패한거죠. 무슨 되도 않는 자신감이었는지, 전 당연히 한 번에 붙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아. 그 예쁜 선배는 결혼을 했더군요. 하하..
뭐. 집에서는 당연히..하란대로 공부나 할 것이지 쓸데 없이 빨갱이처럼 이상한쪽에 관심을 쏟으니까 떨어지는거 아니냐! 란 말이 나왔죠.
처음으로 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게 뭘까? 아니, 내게 그런게 있기나 했을까? 오직 집에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만을 충실히 따라 왔던건 아닐까, 란 생각을 했어요.
영화나 소설처럼 제가 극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고시에 붙었다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뭐. 고시도 시키니까 한 거지, 과연 붙어서 검사나 판사가 된다고 해서 정의로운 사람이 될 자신도 없었고. 다시 시작하지도 않았죠.
적당히 타협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학점은 훌륭했고, 외국어도 꽤 능했던 편이라 고시 낙방 이후 목표로 삼던 회사에 입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진 않더군요(청년 여러분, 죄송합니다. 지금의 여러분보다는 확실히, 좀 더 수월하게 취업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이렇게 거지같은 사회가 된 현실에 대해서 깊은 부채감을 느낍니다).
이후에 독립을 했고, 여기저기 후원을 시작을 했으며, 앞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지는 못 할 망정 뒤에서 지켜보고 돕는 일은 하게 됐습니다(또 한 번 미안합니다. 전 비겁한 사람이라..앞으로 나서지는 못 했습니다).
근현대사에 대한 공부를 넘어, 그 이전의 역사, 세계사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겠네요.
그 후, 쥐새끼가 대통령이 되는걸 지켜 봤습니다.
온갖 한탕주의와 비리, 몰염치가 성공의 지름길이 됐습니다.
그가 돌아가셨습니다. 서울역 분향소에서, 저도 모르게 서러운 눈물이 나더군요.
그 이후, 그나마 주변사람들에게 제 생각을 당당히 얘기하고, 옳지 못한것을 옳지 못하다고 말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유난떤다'라고 하더군요. 혹은 넌 그래도 먹고 살만 해서 그런 배부른 소리나 하는거 아니냐란 소리도 많이 들었고, 듣고 있습니다.
다카키 마사오의 망령이 그 딸에게 이어져, 또 다른 대통령이란 이름의 괴물이 탄생 했습니다.
그래도 박원순, 안희정, 문재인, 안철수(전 아직 이 사람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갖고 있습니다) 등에게서 희망을 봤기에, 뒤에서나마 열심히 응원하고 후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306개의 우주가 사라졌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태어나서 맛 본 가장 큰 슬픔과 충격이었습니다.
한 없이 미안했고 부끄러웠습니다. 이번에도 뒤에 숨어서 응원만 한다면 저는 저를 용서 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휴직을 하고 수 없이 팽목항과 안산, 광화문에서 봉사도 하고 단식도 해 봤습니다.
물론, 애도는 의무가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사람이라면. 죄 없이 사라져 간 영혼들에게 욕 보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죠.
경제를 살려야 한답니다. 진정한 유족들을 가려야한답니다. 온갖 비방과 음모가 난무합니다. 전 광화문에서 희망도 봤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지독한 절망감을 맛 봤답니다.
제가 유족들과 봉사자들 옆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들과 정반대의 말들이 언론이란 이름의 쓰레기들에서 쏟아져 나왔고, 진행중이란 사실에 뭔가 저도 부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과를 가게 됐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복직을 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무한도전을 보며 낄낄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보고,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만 빼면 말이죠.
사실, 그 날 이후 제 모든 옷과 소지품, 자동차와 메신저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기는 하지만, 늘 생각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문득 생각나서 슬프고, 눈물이 나는 정도죠.
제 리본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왜 아직도 그런걸 달고 다니냐. 너랑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지 않느냐' 라고 말이죠.
제가 이상하답니다.
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죠. 분명히 우리 모두, 생명은 소중 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겁니다. 특별법이니, 닭이 7시간 동안 어디 갔었느니, 보상이 어떻니 ,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를 다 빼고서라도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란건 누구나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 생명이 덧 없이 사라져 간 것에 대해 슬퍼하고 생각하는게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게 아닐까요?
전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이빙 벨을 계속해서 보지 않고 있다가 결국 보게 되어서 이런 긴 글을 남기게 됐네요. 괜히 봤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은데, 자꾸 이 사회는 제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게 절 참 슬프게 하네요.
학생 여러분, 청년 여러분, 또 어르신들. 미안합니다. 좀 더 노력해서 제가 당연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 사회가 됐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해서 미안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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